2023년 1~5월 소식
한 달에 하루는 스케줄을 비우고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리라는 것이 연초의 결심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고 오늘은 조금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정리한 혼자만의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것이 맞는가 조금 고민이 됐다. 하지만 (기대나 포용뿐 아니라 의심, 실망, 원망을 포함해)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런 지켜봄을 필요로 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해받고 싶은 부분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 나의 비공식 돌봄자, 감시자들에게 소식지 또는 이행 각서를 띄우는 마음으로 남긴다.
■ 큰 변화 - 나의 활동과 일로 만들어 가고 싶은 주제들을 찾다
‘이름없는학교’를 계기로 내가 다양한 인권 문제에 매우 무지하고 뒤처져 있음을 깨닫고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관심사가 넓어지고 모르던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단체들이 만드는 자리들을 다니면서 그중에 어떤 것은 내 화두가 되었는데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돈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하나 하나 생각하면 도저히 무언가를 버리기로 결정하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일단 주되게 고민할 문제를 정리해 보았다.(이 중에서도 순서를 좀 정해야 되지 않겠는지 자문하게 되지만… 일단 함께 천천히 해 나가기로.)
○ 성소수자 청소년, 특히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학교에서의 배제와 퇴출, 그와 연관되어 양육자/보호자라는 사회적 집단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
○ 이주배경, 중도입국, 특히 미등록 아동‧청소년들의 교육권과 정체성 형성은 어떻게 가로막혀 있으며, 어떻게 폐쇄적인 집단에 속하고 우범화되거나 범죄에 노출되고 있는지.
○ 직업교육을 정상화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폐지와 유지라는 평행선 바깥에서 어떤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까.
○ 청소년의 가족구성권. 그중에서도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아동‧청소년들의 권리란 어떻게 이름 붙여져야 할까. 그들의 출현에 따른 변화가 교육 프로그램 운영이나 바우처 지원만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고, 돌봄을 수행하는 ‘착한’ 사람만 지원받는 게 아니라 돌봄을 기피하고 탈출하는 사람들도 논의에 함께할 수 있으려면?
○ 학생인권이라는 문제는 어쩌다 자유주의적인 것, 기계적인 평등 등으로만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는가. ‘학생/학부모 vs. 교사’라는 납작한 구도로 이야기됨으로써 놓치게 되는 학생/학부모들 사이의 계급 격차, 소수성, 교사들 사이의 연령, 경력 등의 차이를 함께 이야기하기.
○ 연금 개혁 논의 등에서 보듯이 보수 정치와 언론이 추동하고 왜곡하는 경제적 세대 갈등과, 실제로 존재하는 주로 정체성 문제에서의 세대 갈등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세대간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돌봄’을 매개로 한 연대의 가능성을 찾고 싶다.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꼭 매체에 싣거나 책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계속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의미 있는 공론을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런 과정에서 벗이라는 조직에 함께 하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아마 유혹되는 행사가 열리면 못 참고 쫓아다니게 될 것 같은데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만큼 다 참여할 수는 없고 스스로 자제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기 위해서 인권단체들이 훌륭한 행사들을 너무 자주 열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저런 맥락에서 월 회비를 납부하는 곳이 기존 6곳에서 18곳으로 늘었는데, 그밖에도 미안함이 느껴지는 곳들이 많아서 어떤 기준으로 가름을 해야 하는가 늘 스스로 의문이 든다. 어쨌든 나도 회비로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서, 또 교회 대신 운동단체들에 십일조를 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가기로 했다. 모든 운동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결국 운동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작은 기여를 한다는 마음으로.
원래 CMS 목록 : 아수나로, 투명가방끈, 지음, 사랑방, 들, 다다다
새로 가입한 CMS 목록 :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조,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 우리동네나무그늘, 여성이론연구소,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장애여성공감, 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 플랫폼C, 언니네트워크, 다른세계로길을내는활동가모임
■ 변명하고 싶은 것
이렇게 관심사가 확장되는 한편 청소년운동에 가지는 연대감이나 관심이 줄어들었다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어떤 운동보다 내 기반은 청소년운동과 교육운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전체적인 사회운동 속에서 청소년운동과 교육운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싶고, 내 관계와 관심사가 넓어지는 것이 우리 운동에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이런 저런 과정에서 여러 단체들에 후원 멤버십을 가지게 되면서 기존에 청소년운동 단체들에 하던 후원 금액을 줄이게 된 것도 마음이 좀 쭈글해지는 부분이다. 어쨌든 제가 열심히 살다 보면 뭔가 또 청소년운동에 전달되는 게 있지 않겠나요? 지켜봐 주시라...
■ 여름에 해야 할 것
○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느라 후순위로 밀린 오랜 인연에 한 명씩 천천히 화답과 근황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 가족이라는 숙제를 조금씩 직면할 필요가 있다. 건설노조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노조가 극복하려 한 문제를 정확히 겪고 있던 건설노동자인 아빠가 생각난다. 돌봄 문제를 생각할수록 치매가 갈수록 심해지는 할머니와 그를 돌보는 엄마가 내가 남겨 두고 온 숙제같이 느껴진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기보다 내가 광주로 돌아와서 다시 돌봄을 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가족들에 거부감이 깊어 가족들과의 연락을 피해 왔다. 하지만 가족과의 관계를 정립해야만 내 정체성을 확립하는 면에서의 자립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반성
○ 며칠 전 한 출판계 선배로부터 ‘글을 주저리 주저리 쓴다. 좀 덜어낼 필요가 있다’라는 피드백을 들었다. 간파당한 느낌이어서 재미있었다. 어차피 널리 읽힐 글이 아니니 시간을 많이 들이지 말고 그때 그때 남기자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소수라도 읽어 주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앞으로는 조금 정돈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 지금 아수나로 활동가들 중에 내가 관여한 결정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만둔 뒤로 생긴 문제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반성하는 것은 내가 활동을 그만둔 과정이 충분히 책임지는 방식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직과 운동을 신경쓰고 있기는 한지에 대해 전하지 않은 것이 오해와 불신을 더 깊어지게 한 것 같다. 당시 그만둔 것은 오랫동안 여러 층위로 끊임없이 누적된 갈등 속에서 달리 어떻게 살아갈 수 없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었고 후회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더 깊이 상의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찾아야 했던 것 같다. 일단 나 자신부터 책임져야 한다는 진리와 누군가의 외로움에 대한 막막하고 먹먹한 부채감 사이에서 어디쯤 있어야 하는지 내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천천히라도 한 사람씩 그 원망에 대해 충분히 대화하기로 다짐한다. 나와 그들 사이 연결을 놓지 않아 준 활동가에게 감사한다. 그는 나에게 대화를 요청하며 의지가 된다고 말해 주었지만 실은 내가 그를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 감사
○ 운동적 의미에서 삶의 화두가 되는 일을 출판이라는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새삼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런 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잘하고 열심히 하고 싶다.
○ 무엇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과분하게 환대 받아서 감사하다. 내가 부끄럼없이 들이대고 다닌 덕분도 있지만 가끔 어떤 사건은 정말 축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느낀다. 작년 여름에 나는 게임에 중독되어 있었고, 그전부터 꽤 오랫동안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지난 9~12월에 열린 ‘한기호의 출판학교’에서 만난 출판계 선배들과 올 1~3월에 열린 ‘이름없는학교’와 인권연구소 창의 활동가 대상 《돌봄과 인권》 연속 강의와 뒤풀이들에서 특히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직접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그것이 파생시킬 다른 효과를 걱정해서 할 수 없지만, 시간 내어 만나 주고 만나자고 제안해 준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는 점을 남긴다. 때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행위 같은 것도, 지켜봐 주는 마음으로 전해졌다. 학교를 남들에 비해 못 다닌 대신 운동에서 배우고 돌봄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지각을 하든 어떻든 자리에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환영받는다는 점에서는 학교보다 낫다. 나도 기여하고 갚아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다짐
○ (뭐같이 실패하고 있으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 금연하기
○ 마음이 급하다고 너무 몰입하지 말고 스스로 과업에서 떨어지도록 허락하는 시간을 매일 만들기
○ 익숙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잘하기
○ 한 달에 한 번 정리하고 돌아보는 시간 가지기(방 청소도)
○ 자기 전과 일어난 직후에는 페이스북 보지 않기
■ (과연 있을까 싶지만) 끝까지 읽어 주신 분께
이렇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글을 읽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지켜봐 주세요. 혹시 조금 더 기대해도 된다면 위에 쓴 제가 고민하고 있는 여섯 가지 중에 무언가를 같이 고민해 주실 수 있다면 기쁠 거예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