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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Dec 05. 2019

몰락한 우리의 고향에서

윌리엄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



  이번에는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읽었다. 잉고 슐체의 <심플 스토리>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의 동독이 무대라면, <압살롬, 압살롬!>은 미국 남북전쟁 전후 미국 남부가 무대다.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들까지 되짚으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과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각각의 무대는 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9/11 사건 이후의 뉴욕과 파키스탄이다. 네 소설들의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패배하고 밀려난 고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서독과의 경제, 이념 대결에서 패배한 동독.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주의에 밀려난 파키스탄. 패배한 고향에서 태어난 인물들에게는 태생에서부터 패배자의 후손이라는 낙인이 쓰인다. 그리고 소설들이 패배자의 시선을 좇는 이유는 간단하다. 승자는 반성할 필요가 없으므로. 승자는 소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승자는 계속해서 승리하기 위한(혹은 패배한 이들이 승리할 수 있게, 하다못해 정신승리라도 하게 해 주는) 자기 계발서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압살롬, 압살롬!>은 미국 남부 미시시피 주의 서트펜 농원에서 일어난 일을 추적하는 퀜틴 컴프슨과 슈리브의 이야기다.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취재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뒷부분은 해석과 재구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퀜틴은 서트펜 농원이 속한 요크나파토파 군이 고향이고, 슈리브는 캐나다가 고향이다. 두 사람은 하버드에서 수학 중 만난 사이다. 1909년의 겨울, 바깥에는 눈이 오는 어느 추운 방에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눈다. 소설은 슈리브가 퀜틴에게 남부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을 때, 퀜틴이 서트펜가(家)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선택하면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하다. 서트펜가(家)에 일어난 비극의 중심인물은 1833년에 요크나파토파 군에 나타난 토머스 서트펜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흑인 20명과 프랑스인 건축가 한 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어디서 구해온 지 모를 돈으로 서트펜은 인디언에게 땅을 100평방 마일을 구입하고 그 땅 위에 거대한 저택과 플랜테이션 농장을 짓는다. 농원이 자리를 잡은 후 그는 청교도 집안의 딸 엘런 콜드필드와 결혼한다. 엘런은 주디스와 헨리 남매를 낳는다. 비극의 시작은 잊은 줄 알았던 서트펜의 과거가 그에게 돌아오면서다. 아들 헨리가 대학에서 사귀게 된 찰스 본이 주디스와 약혼하려는 것을 서트펜은 반대한다. 찰스 본은 서트펜이 미시시피로 오기 전, 아이티에서 한 첫 결혼에서 생긴 서트펜의 아들이다. 헨리와 본은 집을 떠나고 이듬해에는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서트펜과 헨리, 본 모두 남군으로 참전한다. 엘런은 전쟁 중에 저택에서 죽는다. 전쟁은 남군의 패전으로 끝나고 인물들은 서트펜 농원으로 돌아온다. 함께 돌아오던 헨리와 본은 다투게 되고 헨리는 총으로 본을 쏜다. 본은 사망하고 헨리는 도망친다. 농원에 돌아온 서트펜을 기다리는 것은 폐허가 된 농장과 주디스, 엘런의 여동생 로자, 그리고 그와 흑인 여자 노예 사이의 사생아 클라이티뿐이다.

  서트펜은 로자에게 청혼을 하고 로자는 그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서트펜이 그녀가 아들을 낳아준다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자 로자는 집을 떠난다. 서트펜은 농원에서 일하는 일꾼, 워시 존스의 손녀딸 밀리 존스를 유혹해 아이를 낳게 한다. 밀리 존스가 딸을 낳자 서트펜은 그들 또한 버리는데 그 직후 서트펜은 워시 존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후 수년이 흘러 퀜틴과 로자가 이야기를 나눈다. 퀜틴의 할아버지 컴프슨 장군은 서트펜의 친구였다. 남부에서 자라난 퀜틴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그 또한 그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이다. 이제 늙은이가 된 로자와 그에게 이야기를 듣던 퀜틴은 함께 서트펜의 저택으로 향한다. 로자는 그곳에 무엇인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저택의 병상에서 두 사람이 발견한 것은 고향에 죽기 위해 돌아왔다는 헨리 서트펜이다. 헨리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자 클라이티는 저택에 불을 지른다.


  위의 줄거리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최대한 배제한, ‘일어난 일’만을 간추려서 쓴 것이다. 즉 헨리는 왜 본을 죽였는지, 서트펜은 왜 주디스의 결혼을 반대했는지, 클라이티는 왜 저택에 불을 질렀는지를 묻는, ‘왜 그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들을 제거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이 역사적 사실들을 제공하는 주된 정보원은 두 명인데, 한 명은 로자 콜드필드이며 한 명은 퀜틴의 아버지 컴프슨 씨다. 두 사람의 증언은 일치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심지어 서트펜을 바라보는 두 정보원의 시선에는 확연한 온도차가 있는데, 로자는 줄기차게 그를 악귀라고 부르는 반면 컴프슨 씨 버전의 이야기에서는 초인적인 서트펜의 면모가 부각된다. 따라서 어떤 사건의 이면에 있을 어떤 감정들, 욕망들에 대해서도 정보원들의 증언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우리는 컴프슨 씨의 증언 중 한 대목처럼 ‘무섭고 피비린내 나는 불행한 인간 사건을 흐릿한 배경’으로 실제로 인물들은 어떠했을지 상상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아도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다만 말들과 상징들 그리고 환영들 그 자체만이 무섭고 피비린내 나는 불행한 인간 사건을 흐릿한 배경으로 신비스럽고 조용하게 버티고 있는 거야.” (145쪽)


  그 상상의 고리를 붙잡은 것이 퀜틴의 이야기를 듣던 슈리브다. 슈리브는 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이 이야기가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을 깨닫고부터는 스스로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가동하여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그는 캐나다 출신으로 승자의 입장도, 패자의 입장도 아닌 위치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의 입장은 지금 <압살롬, 압살롬!>을 읽는 우리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압살롬, 압살롬!>은 마치 신화처럼 읽힌다. 신화 속 등장인물들은 개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떤 원형질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 자체도 개개인의 이야기이기보다는 이야기의 원형을 간직한 거친 얼개에 가깝다. 우리는 독자로써 각자의 욕망이나 결핍을 등장인물들에 투사하여 신화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그것은 각자의 서사가 되고, 각자의 서사가 충돌하는 실제의 세상에서처럼 <압살롬, 압살롬!>에서도 충돌하여 비로소 포크너가 그려내고자 했던 세상을 만들어낸다. 로자, 컴프슨 씨, 그리고 그것을 듣고 소화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재구성해내려 했던 퀜틴의 이야기들은 살아남고자 하는 각자의 서사들이다.

  로자가 풀어낸 증오의 서사, 컴프슨 씨가 말하는 운명론적인 서사, 그리고 정체성을 갈구하는 퀜틴의 서사는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보도록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처럼, 우리는 마치 같은 이야기를 계속 다시 듣지만 결코 하나의 이야기만으로는 진실을 알지 못함을, 무한히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진실을 알 수 없음을 깨달을 뿐이다.


 “나는 되풀이해서 이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나? 그는 생각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시 들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벌써 반복하여 다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나는 다시 반복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이 이야기만 영원히 들어야 하는가 보다. 인간은 자기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 수 없고, 그의 친구나 지인들조차도 그렇다.”(396쪽)


  패배한 고향에서 자란 퀜틴에게 고향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과 같다. 슈리브가 퀜틴에게 남부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을 때 그가 서트펜가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서트펜과 서트펜의 몰락을 이해하는 길은 남부를 이해하는 길과 맞닿아 있다. 퀜틴은 그것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납득시켜 계속해서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남부의 망령이 아닌 자신만의 서사로 살아가길 바란 것이다.

퀜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소설 자체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마지막에 부록처럼 써진 서트펜가 연대기에서만 그가 1910년에 죽었다는 사실이 담담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결국 살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는 아마도 자살했으리라. 고향과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한 그의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 추운 매사추세츠의 겨울 속에서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압살롬, 압살롬!>의 신화를 접한 우리는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서트펜은 왜 몰락했는지, 그 몰락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그 몰락의 낌새가 보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토머스 서트펜이 남부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그의 속성 중 무엇이 몰락의 단초가 되었는가? 몰락한 서트펜가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찾지 못할 것인가?

  신사들이 사는 나라로 여겨졌던 남부는 실은 수많은 죄악을 내재하고 있었다. 등나무가 우거진 웅장한 그리스풍 저택과 광활한 플랜테이션, 마차들의 질주 이면에는 착취받는 노예들과 추노 당하는 프랑스인 건축가, 극도의 효율주의와 인종/성별 차별, 말하자면 비인간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패배한 이들은 자신이 패배한 이유를 곱씹는다. 대포가 부족해서였을까? 장군의 역량이 부족해서였을까? 병력이 부족해서였을까? 신화는 여기에 도덕성을 끌어온다. 도덕성이 부족해서 패배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신화의 공통된 속성이다. 실제로 남부는 북부에 비해서 도덕성이 결여되었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정말로 패배의 원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도덕성의 결여는 몰락의 원인이 될 수는 있다. 서트펜가의 몰락은 남북전쟁 이전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다. 어린 서트펜이 어느 대지주의 집 앞에서 제복을 입은 흑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아이티에서 결혼한 율레리아 봉에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어서 그 아들인 찰스 본 또한 순수한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두 사람을 버리면서부터, 서트펜가의 몰락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폭주하는 인간의 의지와 야만성 속에서 뒷전으로 밀린 인간성은 신화의 논리에 따르면 반드시 복수하도록 되어 있다. 인간성을 버리면서까지 의지를 관철시키려 하는 인간의 ‘순진성’ –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성정 – 은 반드시 죄의식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돌아온다.

  순진성(Innocence)은 서트펜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이 순진성은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백지 같은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는 외곬의 성정이다. 눈 앞에 새긴 목표를 향하여 외곬으로 돌진하는 마차와 같이, 서트펜에게 집착의 대상이 되는 그 계획 외의 모든 것은 거세게 구르는 바퀴에 으깨어질 방해물일 뿐이다. 방해물일 뿐인 줄 알았던 그들이 다시 일어서서 마부를 공격하는 것이 과거와 기억, 망령의 힘이다. 파괴하고 상처 입힌 일들로 가득했던 과거가 ‘순진’에 빠져 있는 주인공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 <압살롬, 압살롬!>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힘이다.

  그러나 과연 서트펜은 자신의 몰락의 이유를 깨달았을까? 그는 딸을 낳은 밀리 존스에게 ‘밀리, 너도 페넬로페 같은 암말이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마구간에 깨끗한 칸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409쪽) 따위의 말을 내뱉어서(물론 이는 퀜틴의 상상일 뿐이다) 워시 존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도 못하고 죽은 이의 업보는 대체 누가 져야 하는 것일까? 서트펜가의 몰락과 함께 아주 희미한 빛처럼 드러나는 것은 용서와 애도를 향한 서트펜의 자식들의 몸부림이다.


“어음을 지불해야 할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도 말이지. 왜냐하면 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많아 무력해졌기 때문에 아들이나 자손이 그것을 지불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어. (…) ‘주를 찬양하시오. 나는 내가 범한 부정과 박해의 죗값을 대신 걸머지고 내 양과 소를 강탈당한 자의 손에 다시 돌려주려고 많은 자식을 낳았소. 그래서 내가 죽어서도 대를 이어 몇 백 배로 불어날 내 재산과 자손들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오’. 그는,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462쪽)


  <압살롬, 압살롬!>에서 서트펜의 자식은 총 다섯 명이다. 태어난 순서대로 찰스 본, 클라이티, 헨리 서트펜, 주디스 서트펜, 그리고 밀리 존스의 이름 없는 아기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트펜가의 몰락에 기여하고, 각자의 형태로 몰락을 마무리한다.

  헨리는 그의 아버지가 주디스와 본의 결혼을 반대하며 이유를 설명했을 때 충격을 받고 집을 떠난다. 이후 헨리가 남북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본을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죽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확실한 것은 그 선택이 홧김의 선택은 아니라는 것이다. 헨리의 고뇌는 말하자면 양심의 움직임에 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을 것이다. 흑인 여인과 결혼하여 혼혈 아이까지 낳은 찰스 본이 주디스와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거나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주디스와 결혼하겠다는 본의 의지는 확고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헨리는 고민에 빠진다. 근친상간을 그저 지켜만 볼 것인가? 이 또한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되는 것 아닐까? 그가 가만히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운명론자였던 본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하고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헨리는 선택의 기로, 행동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서 행동을 선택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으므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어마어마한 고뇌를 겪었을 헨리의 고통과 마지막 결정에 우리는 숙연해질 따름이다.

  주디스가 비극을 온몸으로 견디어내는 모습은 <압살롬, 압살롬!> 전체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신적인 모습이다. 주디스는 서트펜가에 일어난 모든 비극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이다. 주디스는 찰스 본을 사랑하였으나 사랑의 대상은 같은 혈육이었고 그 사랑은 보상받지 못한다. 그녀가 사랑했던 이는 오빠 헨리의 손에 죽는다. 찰스 본은 심지어 뉴올리언스에 흑백 혼혈 아내와 갓난아이를 두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찰스 본의 묘지를 찾은 두 모자를 주디스는 알아본다. 후에 클라이티가 데려온 찰스 본의 아들, 샤를 에티엔 생 발레리 봉을 주디스는 거두고 자신을 고모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 흑인의 피가 섞인 남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서트펜 저택에서 주디스는 찰스 본의 아들을 보살피지만, 그가 걸린 황열병에 주디스 또한 걸리면서 그녀는 서트펜 저택에서 죽고 만다. 비극으로 시작하였지만 그것을 견디어낸 그녀의 인내와 포용의 의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나는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 대용품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와 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만약 아버지가 옳았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그와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잘못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말에 따를 것이다. 만약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행복해질 것이고, 괴로워해야 한다면 기꺼이 괴로워할 것이다.”(175쪽)


  신이 아닌 인간의 대속(代贖)은 가능한가? 속죄는 가능한지, 대속은 가능한지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와 연결되므로 여기서 언어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고뇌에 대해서 우리는 숙연해야 한다. 죄의식을 느끼고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은 현대인의 순진성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서트펜의 순진성은 현대인의 순진성을 닮았다. 수많은 곳에서 도사리는 양심의 과속방지턱들은 때때로 우리의 죄의식을 일깨우려 하나 우리는 더욱 발전된 서스펜션으로 재빨리 방지턱들을 넘어가길 바랄 뿐이다. 가까이는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의 사용과 채식의 문제에서부터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소비지상주의, 자본주의의 그늘 같은 것들. 나아가서는 설리와 구하라, 김용균과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 그리고 세월호를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불편한 일이나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 또한 순진했던 서트펜이 되는 것이다. 신화가 사라지고 전설이 자취를 감추는 세속화된 현대에서 죄의식 또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진정한 악, ‘순진성’, 혹은 ‘무지(ignorance)’가 고개를 들려 할 때 우리는 그를 직시하고 경계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 민감할 것인가? 어디서부터는 둔감해도 괜찮은 것인가? 죄의식과 순진함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삶은 가능한가? 무한한 죄사함과 신의 대속을 믿는 어떤 종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속죄와 살아감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패배한 고향에서 태어난 바람에 눈뜨게 된 자신의 원죄에 대해, 대체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죄지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바람에 짊어지게 된 업보에 대해 자식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짐의 근원인 고향에 대해 퀜틴은 증오를 담아,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한 한탄을 담아,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아니야. 아니야. 난 남부를 증오하지 않아! 난 남부를 증오하지 않아!”(539쪽)


  퀜틴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둔감해지는 것에만 있었을까? 비록 병에게는 패배했지만 비극에서는 살아남고자 애쓴 주디스의 의지와 스스로의 손으로 비극을 마무리지으려 한 헨리의 모습에서 미약하나마 희망을 찾으려 하는 것은 지나치게 암담한 해석이 될까? 나는 그것이 무신경한 순진성으로 세상에 무차별적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는 나은 인간의 태도이리라 생각한다. 자신의 민감함을 견디는 일은 반드시 괴로우리라. 그러나 이 괴로움 또한 지나가고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위안이 될까? 아주 긴 시간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괴로움은 순간이지만 우리의 행위들은, 서로에게 남기는 흔적들은 오히려 오래간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신화의 얼개처럼 우리의 묘비에 남을 ‘누구는 어디에서 태어나 무엇을 했으며 어디서 죽었노라’와 그 사이를 소설처럼 채울 나를 알았던 수많은 이들의 증언, ‘무엇을 했는가?’야말로 악귀가 아닌 인간의 희미한 모습으로 나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친절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패배한 고향에서 태어났든 승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든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야만 하며 오직 그것으로만 우리는 순진함의 괴물이 되지 않고 자신의 민감함과 괴로움을 견디면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압살롬 : 히브리어로 아브샬롬(אַבְשָׁלוֹם, Avshalom, "father of peace"), 평화의 아버지라는 뜻.

* 압살롬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다윗 왕의 셋째 아들이다. 매우 잘 생기고 매력적이어서 아버지와 히브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의 이복형 암논이 그의 누이 타마르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암논을 죽이면서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압살롬은 세력을 키워서 반란을 일으키고 다윗 왕을 궁지로 몰아넣으나 에프라임 숲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쫓긴다. 압살롬은 매우 긴 머리가 특징이었는데, 그것이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대롱대롱 매달린 채 포위된다. 다윗의 장군 요압은 압살롬을 생포하라는 다윗 왕의 명령을 어기고 투창 세 개로 압살롬을 찔러 죽인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이 절규한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 사무엘하 18:33[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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