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현 개인전, <휴먼스케일>
파리 루브르의 리슐리외관 825번 방에는 가로 121cm, 세로 85cm 크기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이 걸려 있다. 니콜라 푸생이 1630년경 그렸다고 알려진 이 그림에서 우리는 목가적 풍경 가운데 묵직하게 가로놓인 석재 무덤과 이를 둘러싼 네 인물을 본다. 파란 옷을 입은 수염을 기른 남자가 무덤의 벽에 써 있는 글귀를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읽는다. 무덤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 또한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왼편의 남자는 그 모습을 근심스럽게 내려다보고, 오른쪽의 홍조를 띤 어린 목동은 이게 사실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본다. 가장 오른쪽의 여인은 여기서 유일하게 우뚝 서 있지만, 창백한 얼굴과 읽히지 않는 표정 때문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무덤에 쓰인 글귀는 다음과 같으며, 이 그림의 원제로도 알려져 있다 ― Et in Arcadia ego,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위치한 This is not a church에서는 지금 이충현의 전시 <휴먼스케일>이 열리고 있다. 1층에서 좁은 나선형 계단을 따라 2층으로, 포스터의 안내를 따라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 3층에서 전시장 문을 열면 널찍하고 환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벽에 늘어선 좁고 높은 창들로 들어온 햇살이 한때 예배당이었던 이 공간을 따사로이 채운다. 한때는 긴 예배용 의자들이 있었을 자리를 지금 차지하는 것은 물이 빠져 쪼그라든 찻주머니들과 그 사이에 묵직하게 가로놓인 관(棺)이다. 전시장 한쪽의 연단에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세 개의 기둥 모양 조각이 서 있다. 조각상들의 키는 모두 작가의 키와 같은 180cm이다.
이충현은 그의 이전 전시 <Handsome>에서 자신의 몸, 특히 그의 손과 그것이 쥘 수 있는 ‘한 줌’을 다루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의 몸을 척도로 사용한다. 180cm 높이의 조각상들과 그의 몸통 크기의 찻주머니들, 그리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녹슨 관은 말하자면 전시의 제목처럼 ‘휴먼 스케일’이다. 그러나 작품들이 놓인 이 장소, 과거 예배당이었던 이곳은 휴먼 스케일이 아니다. 신을 섬기고 우러러보기 위해 두 층을 트고 세상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 천장을 높인 곳. 처음 이곳을 만든 이들은 이곳을 땅 위의 이상향으로 꿈꾸었을 것이다. 이제는 두 층을 아우르는 창문들과 거기서 들어오는 햇살만 남았지만, 거기서 비롯한 미약한 온기는 여전한 아르카디아의 잔존처럼 느껴진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는 문구는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낙원에서조차 죽음은 있다’, 또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경고로 읽히는 이 문구는 이충현의 전시를 본 후로 다르게 다가온다.
낙원에서조차 인간은 늙고 병들어 언젠가는 관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은 어디서든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는 죽음뿐이 아니며 인간이기에 보지 못하는 빛깔들, 듣지 못하는 소리들, 그리고 너무나 작거나 너무나 커서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 안에 깃든 물감은 그 양이 정해져 있어서 그려낼 수 있는 색채도, 쓸 수 있는 언어도 무한정일 수 없음을, 그러므로 소진된다는 것은 숙명이라는 것이다. 푸생의 그림이 건네는 말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이충현의 전시가 시작된다. 소진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희미하게 밝히는 이것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일까.
Gleam
빛이 처음 가 닿는 곳은 전시장의 바닥에 이리저리 놓인 찻주머니들이다. 뜨거운 물 속에서 한 때 부풀었다가 가진 바 찻물과 향기를 내어 놓고 이제 부드럽게 말라가는 찻주머니들의 겉면에는 솜털 같은 보풀이 일어나 어슴푸레한 빛(gleam)을 머금고 있다. 사람의 몸통 크기로 확대된 찻주머니들. 조각의 전통에서 몸통, 즉 토르소는 머리와 팔다리를 표현하지 않고 오로지 육체의 아름다음을 표현하기 위한 주제였다고 한다. 그처럼 견고한 근육과 골격까지 부스러져 내려앉은 이 형상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빛이다. 소진된 이후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내부의 색채.
Mill
찻주머니들 사이에 놓인 관 모양 작품은 자세히 보면 분쇄기(mill)의 형태를 닮았다. 관을 빼곡히 채운 톱니바퀴들이 과거와는 달라진 우리의 죽음의 방식, 혹은 장례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는 묻힐 땅이 없어 점점 줄어들어가는 매장(埋葬)이라는 방식부터 망자를 바람에 맡겨 떠나보내는 풍장(風葬), 새들에게 쪼아 먹게 하는 천장(天葬)이나 북극곰이 먹도록 내버려두는 웅장(熊葬)까지. 삶의 끝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취하는 자세는 각각의 시대를 살아갔을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분쇄기 속 톱니바퀴들은 오늘날의 기계화된, 자동화된 삶을 상징하는가? 그리고 그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끝내 분쇄를 마친 먼지로 남는 것뿐일지. 하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이 시대의 이상적인 장례법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뼈조차, 그 어떤 응어리조차 그 속에 들어갔을 때 모두 먼지가 되도록 갈아버릴 수가 있다면. 만약 이 시대에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가 새로 그려진다면 그곳의 무덤은 이처럼 톱니바퀴들로 가득한 관일 것인가.
대성당
큰 성당이라면 파이프 오르간이 있을 위치에 세 개의 기둥이 서 있다. 잘 닦으면 거울처럼 반짝일 듯한 이 조각들은 각도에 따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닥에 흩어진 찻주머니들과 대조적으로, 이 입상들은 곧고 단단히 서 있으며, 그 높이는 작가의 키와 같은 180cm이다. 기왕 기념비적 조각을 만들 거라면 더 크고 거대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작가는 그 높이를 자신의 키로 제한했을까?
푸생의 그림에서 유일하게 곧게 서 있던, 창백하여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이던 여성처럼, 이 기둥들은 인간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 사이에 선다. 그러나 푸생의 여인이 초월을 암시하는 동시에 신과 같은, 인간을 압도하는 낯섬을 품고 있었다면 이곳의 기둥들은 인간의 척도 안에 서 있다. 신을 향해 솟아야 할 대성당의 첨탑들 대신, 작가의 키 높이에 머무는 기둥. 이 제한 속에서 작가의 시선은 다시 바닥에 있는 찻주머니들을 향한다. 그 속에는 초월에의 욕망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자락
처음 전시를 둘러볼 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다. 작품은 네 개인데, 눈에 띄는 것은 위의 세 개뿐이다. ‘자락’이라는 이름의 작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세히 보니 바닥에 흩어진 찻주머니들 가운데 일부는 헝겊 위에 올려져 있다. 이미 다 쓴 찻주머니에서 남은 물이 스며들어, 헝겊에는 여러 색이 번져 있다.
그 얼룩에 서려 있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이나 추억일까? 흔적이자 얼룩, 잔존하는 색채는 이 모든 것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할까. 그렇다면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에서의 ‘나’는 우리의 숙명인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지나서도 희미하게 남을 잔광, 잔열, 잔존하는 빛깔, 또는 기억 같은 것이 아닐까. 푸생의 그림에서 무덤에 각인된 Et in Arcadia ego와는 달리, 이충현의 전시는 그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보여준다.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This is not a church에서 시작해 루브르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정을 뒤로 하고 나는 이 전시의 장소성을 생각한다. 예배당으로 쓰였던 공간, 지금은 ‘교회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공간에 놓인 네 작품은 결국 인간의 몸과 시간을 척도로 한다. 차가운 여신의 응시가 아닌 따사로운 여름 햇살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남는 희망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 진리이기보다는 잔존하는 어떤 것, 아마도 미약한 빛일 것이며 그 빛은 다시 이 자리에 선 우리를 비춘다. 여기 쏟아지는 빛은 초월과 영원을 향하는 대신 소진된 몸과 그 잔향을 품는다. 이충현의 세계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