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벼락치기의 심리적 인과관계
우리는 왜 미루기의 함정에 빠지는 걸까?
그림 하나를 떠올려 보자. 마감 3일 전, 책상 앞에 앉은 내가 있다. 커피를 마시며 유튜브를 켜고, 뉴스 기사를 읽고, 갑자기 청소까지 시작한다. 그러다 마감 하루 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벼락같이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패턴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미루기의 고질병으로 유명한 인물이 있다. ‘모나리자’ 한 점을 그리는 데 십년을 넘게 더 썼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쩌면 미루기의 대명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긴 시간을 창의적 탐색의 시간으로 삼았다. 미루는 사이 더 나은 구도와 빛의 원리를 실험했고, 수십 개의 드로잉을 반복했다. 미루기는 그에게 ‘멈춤’이 아니라 ‘더 나은 시작’을 위한 숨 고르기였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미루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동화같은 위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미루기로 인해 숨막혔던 개인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역시 경계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미루게 되는 걸까? 단순한 게으름일까?
연구자들은 다르게 말한다. 미루기는 '자기조절의 실패'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최근 연구들은 미루기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감정 조절과 성격, 동기 수준, 뇌의 구조까지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임을 보여준다.
첫째, 성격적 특성이다. 연구에 따르면 성실성이 낮고, 충동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일을 미루는 경향이 크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의 기분과 자극에 더 쉽게 흔들리기 때문에 장기 목표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한다.
둘째, 동기의 수학적 방정식이다. 피어스 스틸(Piers Steel)은 기대감(expectancy)과 가치(value), 그리고 충동성(impulsiveness)과 시간 지연(delay)이라는 네 요소로 미루기를 설명했다. 쉽게 말해, "이 일이 잘 될 것 같고", "이 일이 내게 중요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움직인다고 한다. 반대로 가능성도 낮고 매력도 없는 일이라면? 당연히 미루게 될 것이다.
셋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스트레스나 불안, 지루함, 좌절 같은 감정을 피하기 위해 미룬다고 한다. 마감이 임박하면 긴장이 오히려 집중을 만들어 주니, 감정 회피의 전략으로 미루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기분 수선(mood repair)' 전략이라고도 한다(Sirois & Pychyl, 2013).
넷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완벽주의다. "차라리 시작을 안 하면 덜 불안하다"는 심리. 미루는 사람일수록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라면 아예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한다. 이상은 높지만 자신감은 부족할 때, 미루기는 자기방어의 방식이 된다.
다섯째, 자기조절 기능과 뇌의 작동 방식이다. 연구에 따르면, 전두엽(계획과 통제를 담당)과 선조체(즉각적 보상을 추구하는 뇌 부위) 간의 갈등이 있을 때, 전두엽이 약하면 선조체의 유혹에 쉽게 휘둘린다고 한다. 즉, 뇌가 지금의 즐거움을 선택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Tuckman, 1991).
이 복잡한 미루기의 구조를 이해했다면, 이제는 이를 삶에서 어떻게 다뤄볼 수 있을지 가볍게 실험해보는 것도 좋겠다.
먼저, "왜 미루고 싶은 걸까?" 스스로에게 가볍게 물어보자. 단지 게을러서가 아니라면, 혹시 피하고 싶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닐까? 불안? 지루함? 아니면 실패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다.
일을 작게 나눠보면 어떨까? "논문 쓰기"보다 "서론의 첫 문장 써보기"가 훨씬 만만해진다. 뇌는 큰 일보다 당장 끝낼 수 있는 작은 과제에 덜 저항한다고 한다.
시간보다 목표로 접근해보자. "2시간 앉아 있기"보다는 "PPT 3페이지 만들어보기"처럼 구체적인 결과 중심 목표를 정하면 뇌가 일에 의미를 더 잘 느낀다고 한다.
감정도 일정처럼 계획해보면 어떨까? 집중이 잘 안 되는 날엔 먼저 기분을 돌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거나, 나만의 작은 의식을 만들면 좋다.
그리고 뇌가 좋아하는 보상을 설계해보자. 초콜릿 한 조각, 유튜브 10분, 좋아하는 커피 한 잔. 행동 뒤에 작은 즐거움을 연결하면 뇌가 조금 더 쉽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벼락치기로도 우리는 꽤 많은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감 직전의 집중력은 때로 놀라울 만큼 강력하다. 특히 '짧고 단기적인 과제'일 때다. 예컨대 아이디어 회의나, 자잘한 행정 업무처럼 즉각적인 집중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일에는 긴박감이 오히려 추진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장기 과제나 깊은 몰입이 필요한 작업에는 반복적인 벼락치기는 오히려 독이 된다.
하지만 벼락치기가 반복되면 시간부족으로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큰 실수로 연결되거나, 내가 가진 역량만큼 일을 해내지 못하게 되어 우리의 자기효능감은 점점 떨어지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는 스트레스, 수면 문제, 번아웃으로 이어지기도 쉽다고 한다 (Sirois, Melia-Gordon, 2022).
나는 가끔 이메일 회신을 하루 이틀씩 미루곤 했던 때가 있었다. 가볍고 긴급한 답변거리들 우선으로 처리하고, 오히려 중요한 내용에 대하여는 더 미뤘던 것 같다. 이유인즉슨 "완벽한 문장으로, 시간을 들여서 쓰고 싶다"는 나름의 완벽주의의 탈을 쓴 정성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하루는 마음먹고 3줄만 써보기로 정하고 답장을 보냈다. 의외로 그 메일에선 고마운 회신이 돌아왔고, 나는 나름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교훈을 얻었던 것 같다. "진심은 분량보다 빠른 타이밍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오늘의 할 일 중 가장 미루고 싶은 일을 하나 골라보자. 그리고 그 일을 '30분 동안만 집중해보자'고 가볍게 자신에게 제안해보자. 우리는 가끔씩 끝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시작도 안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은 감정을 이끈다고 한다. '시작'은 곧 동기다.
미루기는 누구나 겪는 습관이지만 이해하고 다루는 순간 그것은 선택이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 일과 삶을 조금씩 바꾸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