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성경과 중국 교회
<우리말 성경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한글로 되어있는 성경이다. 성경은 본래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쓰였었지만 번역한 수고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이토록 편하게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성경은 100여년 전에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온지는 약 200년이 넘었지만 우리의 글로 성경을 읽게 된 것은 100년 전의 일이다. 우리말로 된 첫 성경은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 라는 신약성경이다.
1887년에 나온 이 성경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중국 만주 선교사 존 로스 목사님이 김진기, 백홍준, 서상륜과 같은 청년들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번역했다. 이 성경을 보면 ‘하늘’을 ‘하날’이라고 하고 ‘빌라도 총독’을 ‘빌라도 사또’라고 하며, ‘금식’을 ‘목욕재계’라고 부른다. 조선 사람들은 하늘을 숭배해왔기 때문에 ‘하날님’이라고 불렀고 ‘ㄹ’이 탈락하면서 하나님으로 부른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지방에 따라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이 없다. 하나님과 하느님 둘 다 아름다운 우리말이라고 할 수 있다. 빌라도 총독을 빌라도 사또라고 부른 것은 당시에 고을을 다스리는 이를 사또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금식을 목욕재계라고 부른 까닭은 날마다 굶는 분들에게 금식은 너무나 가혹한 얘기이기 때문에 목욕재계라는 표현을 사용해 의미를 살린 것이다. 처음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선교사님과 믿음의 선배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선교를 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완벽히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선배들을 통해 배운다.
<중국교회>
기존에 알고 있던 중국교회는 정부에 의해 통제된 가정교회, 지하교회의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 중국을 오기 전에 나는 2007년 장춘이라는 곳에 선교를 갔었는데 교회를 자전거 타고 두 시간을 몰래 오다가 공안에게 잡혀서 총살을 당한 얘기를 듣는 등 중국 교인들의 암울한 현실을 많이 접했다. 그래서 중국은 전 국가가 개인의 종교를 통제하고 말살시키려고 하는 나라인 줄 알았다.
최근 들어 중국에 대해 선교를 다녀오거나 학교 교수님들이 얘기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외국인들이 중국 내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져서 외국인들의 선교활동을 금지시켰지만 자국민 스스로 활동하는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간섭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중국에 와서 한 전도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조선족이었다. 연변에서 태어나 자란 전도사님은 중국교회 내에서 한국어와 중국어를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분에게 들은 중국교회의 현실은 그동안 들어왔던 중국교회와는 많이 달랐다. 중국교회는 소수의 지하교회와 다수의 삼자교회로 이뤄진다. 소수의 지하교회는 연변 지역에 있는 조선족들을 상대로 하는데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제자훈련을 하면 돈을 얼마 준다는 식으로 잠깐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형태의 교회가 많다고 한다. 한편, 삼자교회는 중국 현지의 교회인데, 중국에 있는 동방 삼성 신학교, 남경 신학교, 북경 신학교, 상해 신학교 등을 나오면 그곳에서 사역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의 삼자교인은 중국의 인구수가 많아서 그런지 굉장히 많다. 심양에 있는 존 로스 목사님이 세운 동관교회에만 3만이 넘는 교인이 있고 홍해탄이라는 곳에는 2-3만명의 교인이 있다. 이런 교회들이 곳곳에 심심치 않게 있다. 삼자교회의 특징은 돈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중국 교인들이 한번 헌금을 하면 2-3억은 우습게 내는 교회가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특히나 중국의 상위 1%가 사는 상하이와 중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알짜배기 부자동네 원저우의 교회에서는 수백억에 달하는 헌금이 오간다고 한다. 이러한 삼자교회는 지금도 커지고 있고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삼자교회에 대한 평가는 두 갈래이다. 교회가 성장하기까지는 중국 정부와 뒷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평가와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폭발적인 부흥의 주역이라는 평가로 나뉜다.
중국의 삼자교회의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문득 가능성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 70-80년대의 성장하는 분위기가 2015년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어떻게 하면 중국에 일어나는 부흥의 물결을 타고 갈 수 있을까 하고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크고 많게 성장해버린 교회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있는가? 덩치는 커졌는데 스스로의 정화능력을 잃고 사회적 성화는커녕 기초적인 윤리의 문제에 걸려 스스로 무너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삼자교회가 자칫 잘못하면 한국교회 이상의 괴물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혹자는 복음이 지구 한바퀴를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가면 예수님이 오신다던데, 이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괴물 교회들을 보고서 뭐라고 말씀하실까? 예수님은 과부와 나병환자와 불구자, 세리, 창녀들에게 다가가셔서 위로하시고 함께하셨다. 나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좋다. 예수를 따라갔는데 좋은 차와 넓은 집, 맛있는 음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삶은 가난하고 상처받고 핍박당하는 삶을 사셨다. 그렇기 때문에 삼자교회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어쩌면 나는 꽉 막힌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베드로와 같이 수천 명이 동시에 회심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스데반과 같은 순교의 모습에만 스스로 도취되어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은 아직 미숙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동안 배운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의 길이다. 유대 공동체 내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율법을 모두 지켜 행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이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다. 11세기 이후 중세 500년 동안 유럽은 삶의 뼛속까지 기독교화되었다. 사람들은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선행을 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길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 개혁(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중국에 와서 보니 중국교회가 앞으로의 세상을 주도할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시작이 십자가에서 시작하는가, 자신의 영광에서 시작하는가에 따라서 중국이 세계교회의 주역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끼리 꼬리를 만지고 코끼리를 판단하는 격이지만 적어도 코끼리의 어느 부분을 만져보고 나니 충격이 크다. 세상은 참 넓다.
<처음 한글 성경이 만들어진 교회, 동관교회>
동관교회 입구 근처에는 상인들과 구걸하는 환자가 즐비하다. 교회 입구에 들어서자 마당이 나타나는데 헌금을 자발적으로 먼저 내고 입장한다. 예배시간에 30분 늦게 도착해서 맨 뒤에 앉았다. 사람들이 마당까지 꽉꽉 들어차 있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것 같다. 3만명이 예배하는 것도 조금 과장되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명 혹은 천명 조금 넘는 사람이 앉아서 예배를 한다. 같이 온 전도사님이 아이를 데리고 있자 출입을 거절한다. 아이는 어른 예배에 함께 할 수 없다. 20대 후반의 정도의 여자가 나와서 찬양인도를 하고 중간에 찬양대가 들어와서 찬양을 하고 퇴장한다. 시간이 되자 시편 33편 12-15절 말씀으로 말씀을 전한다. 여자 전도사(?) 가 퇴장하고 남자 목사(?) 가 나와서 설교를 한다. 뒷자리에 앉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니면 예배 시간대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체로 어르신들이 앉아있고 종종 젊은이들이 보인다. 설교가 시작된지 15분가량 지났을까 찬양인도를 하던 여자 전도사(?) 가 찬양인도를 너무 열심히 해서 피곤했는지 연달아 하품을 하고 눈곱을 뗀다. 중국어 설교를 알아듣고 싶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설교자의 모습은 굉장히 열정적이다. 성도들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간중간 아멘을 외친다. 제스처를 과감히 취하고 때론 빠르게 때론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를 읇조린다.
주일 설교를 하신 목사님께서는 옳은 말을 하다가 여러 번 감옥 다녀오셨다. 정부에 대한 서슴없는 비판을 경계한 경찰이 감옥에 넣는가 하면, 목사님의 말씀에 영향력이 생기자 질투하는 사람들이 모함하여 감옥에 가기도 하셨다. 삼자교회라고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핍박이 있어서 옳은 것이 아니라 옳은 길에는 언제나 핍박이 있다. 목사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의 말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의 자신감의 근거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 올 곧게 서있다는 것은 그 만큼 불편하단 것을 뜻한다. 스스로 불편하기를 자처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편하고 좋은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옳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다. 말도 안 통하고 익숙하지 않은 냄새와 음식에 고생을 하면서도 묵묵히 성경을 번역하고 수백 킬로 떨어진 곳에 가서 또박또박 글자가 적힌 성경을 나누어주었던 존 로스 목사님, 중국 공안에게 끊임없는 고문을 당하고 질투하는 세력들에게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히면서도 당당히 자신이 믿는 바를 전하는 동관교회의 목사님은 불편하고 어렵고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었다.
여행을 하면서 자신이 가진 신념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할 때가 있다. 가령 나는 너무 기독교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술 담배를 하지 않기에 모임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내 이마에는 벌써부터 찍혀버린 주홍글씨 때문에 같이 다니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때로 이런 것들이 불평스럽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왜 나한테 교회에 대한 분노를 쏟는가 하며 되려 화를 내고 싶은 마음도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교회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 대신 사과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교회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나에게 설명한다. 계속 듣고 있으면 모두 맞는 말이다. 교회가 잘못했다.
편하기 위한 교회, 욕심 많은 교회, 서로 싸우는 교회. 모두 옳음과는 멀어 보인다. 불편하고 청빈하고 평화로운 교회. 그런 기독교인들을 이곳 심양에서 보고 다시금 반성하게 된다.
교회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여태껏 같이 돌아다녀준 선교사님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선교사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기차역에 들어와 앉아있었다. 기다리면서 어머니가 싸주신 누룽지를 뜯고 있는데 어느새 기차를 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짐을 싸서 기차를 탔다. 옆 좌석에는 대학생쯤 되보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