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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Jan 30. 2020

종교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의심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애국가를 부르다가 혼란이 왔다.

   언젠가 패키지 여행하던 중 버스를 타고 출발하기 전에, 투어 가이드가 몇 가지 안내사항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정치, 연봉, 그리고 종교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민감한 주제인 만큼 손님끼리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분야이기에 아예 가이드가 이야기를 원천 봉쇄했던 것 같다. 특히나 종교는 신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기에 굉장히 다분한 요소를 지닌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받고 하는 종교 투어를 한다는 것은 꽤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을 가져다준다. 종교 투어를 시작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내 전공 때문이었다.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배운 것을 사용해서 성취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상냥한 교회 선생님이 생일날 사탕목걸이를 만들어 내 목에 걸어주고 모두의 축하를 받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집 앞의 교회에서 피자를 사주며 로비를 했었지만 나는 사탕목걸이를 만들어주었던 선생님과의 의리를 지켰고, 그 결과 그 교회를 20년 넘게 다니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애국가를 부르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구절이 나왔다. 교회에선 하'나'님이라고 배웠는데 왜 애국가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궁금했던 나는 교회 선생님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선생님들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내놓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하나 밖에 없으니까 하나님 아니야?

-애국가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데?

-하늘에 계시니까 하느님이지.

-아니야. 성경에 하나님이라고 쓰여있잖아.


나의 자그마한 호기심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그 날 청소년부 전체의 이슈거리가 되어서 결국엔 목사님한테까지 바통이 넘어갔다. 모두의 관심이 쏠린 상태에서 목사님은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피했다.

중국 심양에서 2015년 ⓒ이서준


사실 싸울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이 질문이 궁금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로 기독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유대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의 명칭은 인간이 정확히 발음할 수 없다. '요드-헤이-바브-헤이'로 이루어진 거룩한 네 글자(테트라 그라마톤)는 애초에 인간이 발음할 수 없기에 라틴어에서 사용하는 '주인'이라는 뜻의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임과 동시에 여러 문화권에서 발음하던 음성학적인 통계로 미루어보아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불리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엘'이라는 신의 이름을 사용했고, 이집트를 탈출한 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되면서 이를 동시에 사용했다. 애초에 이스라'엘'이라는 단어 자체도 엘이 들어가지 않는가? 종교의 원산지(?)에서도 여러 가지의 이름을 사용하는데, 동아시아권에 성경을 번역하려고 왔던 선교사들의 고충은 얼마나 심했을까.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통하는 법이다. 예수회 소속의 신부였던 마태오리치가 동아시아에서 하늘을 숭배하는 사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천주'라는 단어로 이스라엘의 신을 표현했다. 훗날 이 단어가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자였던 존 로스에 의해 누가복음 단편성경에서 '하느님'으로 번역이 되었다. 당시에 성경번역을 진행했던 심양에서 가까운 곳인 평안도 의주 지방에서는 '하늘'을 '하날'로 발음했는데, 여기서 'ㄹ'이 탈락되면서 하나님이 되었고, 신약 전체가 나올 때는 존 로스도 '하나님'으로 바꾸어 번역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둘을 동시에 사용해오며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당시에 뛰어난 신학자였던 탁사 최병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는 주기도문의 구절처럼 하느님도 맞고, 한 분 밖에 안계신분이기에 하나님도 맞다고 이야기했다.


애국가를 부르며 혼란이 왔던 내 머릿속에 스토리가 정리가 되고 나니 꽤나 재미도 있고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싸울 일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합리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재밌는 주제였다. 지금도 이 주제는 계속해서 연구되고 토론되고 있는 주제이다. 다만 서로의 다름에 대한 존중을 해준다면 서로 더욱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생각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기회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강의 후 덕수궁 중명전

종교 투어의 시작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종교 투어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 종교 투어를 시작했을 때 참여하는 사람들의 80% 이상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학교 선생님, 다도를 공부하시는 분, 건축회사 사장님, 의사 선생님, 제약회사의 임원 등등 다양한 곳에서 종교 투어에 관심을 갖고 신청을 해주셨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종교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가 재밌다보니 투어 중간에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많은 것들을 즐겁게 같이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단체로 문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단체 문의는 주로 교회에서 많이 들어왔는데, 사실 투어를 할 때 가장 힘든 대상 중에 하나가 중고등학생이다. 이들은 재미가 없으면 1분 안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렇다고 선천적 노잼 캐릭터인 내가 아재개그라도 시도하는 날에는 그 날로 투어는 시작도 못해보고 끝나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중고등학생 투어는 에너지가 다른 투어에 비해서 2-3배로 많이 들어가는 투어이다. 하지만 단체 신청을 제일 많이 하는 것도 중고등학생들이다. 그리고 그 날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그들이 찾아온 언젠가였다.

배재학당

정동길을 걷다 보면 배재학당 역사기념관이 나온다. 배양할 배, 인재 재. '배재'는 유용한 인재를 길러내라는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만들어진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산실이다. 이 학교를 지은 사람의 이름은 '아펜젤러'라는 사람인데 아펜젤러는 조선 땅에 처음 왔을 때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 땅에 당장 필요해 보이는 것이 학교인데, 보통의 선교사들은 교회를 먼저 지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먼저 지어야 하나 교회를 먼저 지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만약 예수님이었다면 학교를 먼저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학교를 먼저 지었던 아펜젤러였다. 당연히 교회를 먼저 지어야 한다는 보통의 편견을 깨고 학교를 먼저 지었고, 훗날 이 학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는 등의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육영공원 터

이 이야기를 듣고 간 학생 중에 한 명의 이야기를 투어가 끝나고 전해 들었다. 이 학생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친구였는데, 평소에 숫기도 없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친구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응급실 수술을 들어가서 병원에서 자느라 새벽예배를 못 갔고 다음 날 어머니가 친구가 먼저냐 하나님이 먼저냐고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죄송해요 엄마. 다음부턴 교회 나갈게요.


라고 했을 친구였을텐데, 신기하게도 이 학생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선교사도 교회보다 병원 먼저 세웠대. 나도 병원이 먼저야.


어머니는 평소와 다른 학생의 자신감 있는 모습에 알았다고 하셨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많은 학생들이 투어를 듣고 내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거나, 투어를 듣고 나서 스스로 생각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는 피드백을 듣고 있으면 괜스레 뿌듯하다. 이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서도 비슷했다. '아 이게 그런 거였어요?'라고 하는 피드백을 받고 나면 이 투어를 참 잘 만들었다는 보람을 느낀다.

투어에 많은 협조를 해주신 서울성공회성당

하지만 종교 투어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실제로 나의 학식의 부족 때문에 혹은 인적 네트워크나 기회의 부재 때문에 투어 하고 싶은 종교 건축물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꽤나 있었다. 프랑스의 노트르담에서도, 이탈리아의 바티칸에서도,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도 하는 투어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에서 못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종교 또한 우리가 축적해온 문화이고 그 건축물들을 보다 짜임새 있게 해설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게 하는 것은 문화를 향유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많은 종교 건축물들의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계속해서 도전하게 된다면 언젠가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까라바죠, '의심하는 도마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1602),  Sanssouci Picture Gallery 소장

의심은 나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도마라는 사람이 나온다. 도마 안중근의 세례명이기도 했고, 영어 이름으로 하면 토마스라는 친숙한 이름인데 교회에서는 이 도마를 부를 때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그러나 그가 성경에서 의심한 적은 딱 한 번 나와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그가 증거를 대보라고 했고, 예수님이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면서 그 합리적 의심이 해소되었던 장면이다.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분명 다른 제자들 중에도 궁금한데 눈치 때문에 못 물어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의심하면서 사는 우리가 딱 한 번 의심했다고 '의심 많은 도마'라고 도마를 몰아세우며 의심이 마치 아주 나쁜 것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참으로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도마가 좋다.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의심하고, 생각하고, 판단했던 도마는 전승에 따르면 인도 남부(케랄라)로 건너가서 순교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심의 값은 그렇게 용기로 이어졌다. 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의심할 것이다. 의심하지 않고도 믿어지는 사람은 참 부럽다. 하지만 의심이 되는 것을 어떡하는가. 의심은 나의 원동력이다. 의심을 통해 생각하고 생각을 통해 투어의 연결고리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참 즐겁다.

이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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