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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레다 Aug 11. 2020

청각이 무척 예민하시네요.

2020년 8월 11일


눈을 크게 뜨고 문을 향해 귀를 세웠다.

작은 방에서 거실을 거쳐 굳게 닫힌 큰방을 향해 청력을 최대치로 올렸다.

걸쭉한 욕설 사이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의 크기가 일정 높이에 다다랐을 때,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소리가 들렸을 때 큰방으로 뛰어갔다.


방안에 들어서니 조각난 살림살이가 반짝이며 흩어져 있었다.

홀로그램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한.

다행히 바닥에 핏물이나 토사물은 없었다.

부엌칼도 없었고 화장대 거울이 부서지지도 않았다.


남자는 제 몸 가누기도 어려운지 휘청대며 붉게 타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무언가 집어던질 것을 찾는 듯했다.

여자는 낡은 6짝 장롱 앞에 붙어 죽은 듯 엎드려있었다.

아니, 널브러져 있다는 쪽이 더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맞아서 그런 건지, 스스로 넘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방으로 뛰어들어간 이는 던질 것을 찾는 남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떤 말로도 상황은 종결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그는

날카롭게 부서진 두툼한 유리 재떨이를 집어 들어 턱 아래에 대었다.


여기서 더 하면 이 자리에서 목을 그어버릴 거야!

다 같이 죽어!


비장하게 말하면서도 정말 그을 생각은 없었다.

죽으면 죽는 거지 하면서도 죽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하던 그때,

터질 듯 뛰는 심장탓에 덜덜 떨던 손이 제멋대로 그의 목을 일부 그었다.

목을 타고 피가 흘렀다.

하지만 아픔도, 비명도,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도 그의 손에서 조각난 재떨이를 빼앗지 않았고, 흐르는 피를 닦아주지 않았다.



자,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이때가 먼저 떠오른다.

영상을 리와인드하듯 계속 그 날로, 그 밤으로 돌아간다.

14살이었다.

10대의 흐린 기억 사이에서 정확한 나이를 기억하는 유일한 순간.


가끔 그 아이가 나에게 말을 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널 지켜주지 않으니 사람을 신뢰하지도 기대하지도 말라고.

체온을 서늘하게 낮추고 무언가에 질린 눈빛으로 날 보며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는 이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내가 있잖아. 네 곁에 이젠 내가 있잖아.

여느 아이들처럼 울고 빌고 매달려도 괜찮아.

떼를 쓰고 화를 내고 사랑해달라고 요구해도 되는 거야.

너는 어리니까, 아이니까, 보호받을 권리가 있으니까.


지겹도록 오래 말해주고 싶다.

안아주고 쓰다듬으며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거짓말이라고 비웃더라도 끝까지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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