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하 SEONGHA Sep 07. 2024

이야기의 시작 <1>과 <2>

방황에서 시작한 글쓰기

프롤로그

방황에서 시작한 글쓰기, 졸업 후 방황



‘졸업 직후 이별’


대학을 졸업하고, 책과 가까워졌어요. 계기는 단순했습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바람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배신감과 모멸감이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내가 책을 안 읽어본 줄 아나 본데, 나 공부 열심히 하거든, 시간이 없어서 못 있는 거거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사망선고를 내렸어요. 사실, 실제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어요. 지금은 느낄 수가 있어요. 아마 날 가장 가까이에서 보려 했던 사람이기에 그런 내 생각을 읽었을 거라 생각해요.



한 때, 나는 저는 책을 사랑했어요. 첫사랑에게 아끼는 책을 선물하는 열혈 한 독자였습니다. 쌍둥이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 소설이지만 공감했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감동을 느꼈기에 이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어요. (이 기억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거 같아요)


내가 책과 서먹해진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에요. 초등학교 절친처럼 소원해져서 멀어졌습니다. "사는 게 치열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스물의 초반, 독서와 손절하고 졸업을 하고 취업에 집중했습니다. 취업에 성공하니 그녀가 헤어지고 싶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하더군요.




‘방황’


취업한 이후에 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4년 간 쉬지 않고 굴려갔던 제 인생은 관성처럼 새로운 일을 하려고 이곳저곳으로 굴려갔어요. 심지여 빠르고 묵직하게요.


바쁜 일 하나 없는 하루인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방 밖을 나섰습니다. 4년 만에 돌아온 내 방이, 하루 밤 머무는 쪽방처럼 답답하고 좁게 느껴져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하루의 시작은, 07시에 모닝커피로 카페인을 충전하고, 전날 가보려 했던 어딘가로 하루 종일 길을 헤매었어요. 저도 제 방을 가지고 싶어서, 부동산도 열심히 뒤지고 자기 계발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영어공부, 회사 매뉴얼, 주식, 전기기사, 심지여 회계까지 오래 하진 못하고 분야만 바꿔가며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성과는 없었어요...


끝없이 헤매는 삶을 살다 보니 저의 전업은 친구의 고민 상담가가 되어있었습니다. 자칭 '취업 전문가'가 되어서 자소서부터 면접까지 친구의 인생을 대신 살아버렸어요. 나에게 남는 건 경험. 오만하기 그지없는 생각으로 그런 일을 했어요. 결국 자기만족으로 타인의 성취감을 빼앗아 버린 거 같아서 그때가 후회됩니다. 그 친구는 자신이 이루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서인지, 결국 사직하더군요.


길을 잃었습니다. 막막했어요. 발걸음은 빠른데 목적지가 없어서 앞으로 앞으로... 관성적으로...



‘독서’


다행히, 그런 나를 누군가 구해주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책을 읽는 누군가를 보았죠. 그 사람은 두툼한 책을 뚫어져라 보다가 갑자기 혼자 실실 웃습니다. 부러웠어요.


부러운 감정과 동시에, 예전 그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소심한 그녀가 독서를 권하는 그 말 한마디가, 한 달이나 늦게 도착해 버렸어요. 이제야 이해해 버렸어요.


'머리를 정말 씌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그때는 왜 몰랐는지, 후회할 시간도 없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젠가 읽으려고 쌓아둔 책을 정신없이 넘겼어요. 초반 30페이지 열심히 읽었던, 흔적 가득한 내구도 87%짜리 책이 이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냥 읽었습니다. 목적도 없이, 제목도 까먹고 읽었어요. 집에 11시 즈음 도착해서 씻지도 않고 밤을 새워버렸어요. 충혈된 눈으로 해가 뜨는 것도 모른 체 집착했고, 마지막 문장을 읽은 순간 카타르시스와 함께 잠들었어요.


독서를 시작한 처음 한 달은, 중독 그 자체였어요. 이 카타르시스와 고독한 느낌 자체가 매우 중독적이었습니다. 카페에서 읽는 것도 안 됐어요. 혼자 고독해야 했습니다. 읽는 속도가 점점 빨리 지는 것은 마치 네가 성장하는 기분마저 느끼게 하며 독서의 즐거움보다는, 빨리 읽는 게 목적인 냥 하루에 두 권씩 해치웠어요. 그 누구 와도 연락하지 않고 집에서 책만 읽었습니다.


필요한 건 밥과 책 이 두 개. 하루를 보내기가 힘들지 않았어요. 외롭지도 않았어요! 작가와 나는 단둘이 속닥속닥 대화 나누느라 마냥 정신이 없었죠.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나서, 친한 대학 동기에게 연락이 왔어요. 동아리 모임을 하려 하는데, 제가 연락을 안 받으니까, 전화를 자꾸 하더라고요.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사실 고마웠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시절 학과와 동아리, 동문, 논문팀을 진두 지위하던 대장부가 아니게 되었어요. 내성적이라 사람 눈도 못 마주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제가 아니라서 쉽게 만나려 갈 수 없었어요. 저의 삶을 회피하려, 읽었던 책들 그 이야기를 기억하느라 제 삶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어요. 머리가 복잡해서 '내가 생각한 건지'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였는지’ 자꾸 의심이 들어서 함부로 음성을 낼 수 없었습니다.


특단의 조치로 기억에 남는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아를 분리시켜 보았다. 이건 쇼펜하우어, 이건 니체, 이건 베르나르 베르베르, 시몬 페레스.... 

일종의 기억과 자아의 분리였을 거예요. 내 삶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서, 기억을 찾으려 오랜만에 인스타 계정에 들어갔어요.


그것은 힘들었던 순간들, 감정이 격양된 순간들, 즐거웠던 순간, 나를 대신해서 전부 기억하고 있었어요. 갤러리도 한참을 봤어요. 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에 대해서 궁금해졌어요…


저를 찾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저와 시간을 나눈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진을 보고 내가 쓴 글을 보면서 금방 기억해 냈어요. 나를 돌아보다가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들이 그리워져서 만나고 다녔어요. 

그녀도 만나보려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그때 당시 생각에, 지금은 과하게 공부만 했으니, 몸을 좀 써보고 싶었어요. 유튜브 알고리즘은 그런 나의 니즈를 어떻게 또 알았는지 때마침 검도를 해보라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검도를 동경했어요.


그렇게, 이종원 검사님의 '검도와 인생'이라는 책을 구입했어요. 이 책을 산 이유, 읽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24살 큰 덩치의 내가, 어린이들과 같이 검도를 시작해도 된다는 말 한마디가 필요했어요.



‘검도, 입문’


제가 검도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나름 특별합니다. 

큰 덩치를 가진 사람이다 보니, “복싱이나 주짓수를 하기에는 체급이 안 맞겠다”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검도는 시작하기 편안했어요. 뭔가 공평한 거 같아서였어요.


검도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손 발에 물집이 터지고 굳은살이 배기기 시작하자 뿌듯함을 느꼈어요.


좀 더 시간이 지나, 소란스럽게 느껴졌던 “머리!!!!!!”라는 소리가 단호한 기합이 되었을 때, 검사들의 사소한 몸짓이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지는 디테일이었다는 게 느껴졌어요.


신비한 경험이었어요.



‘해군 훈련소 입소’

검도를 배우기 시작한 지 5주 차, 승선근무를 위해서 3주 간 진해해군사령부에서 승선근무예비역 대상의 군사교육을 받으려 가야만 했어요.


하지만, 순탄치가 않았어요. 입영 일주일 전에 검도를 하며 힘을 쓰는 발(왼발) 발등에서 통증을 느꼈습니다. 일상생활이 불편했어요. 치료를 받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검도를 계속해야 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군사교육을 받는 3주 동안 휴식기를 가지고 다녀온 다음에 검도를 열심히 하면 되겠다는 계산이 떨어져서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어요.


그렇게 미세골절은 상상도 못 한 체, 입영통지서를 들고, 5월 27일 설레는 마음으로, 해군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중대장 훈련병 지원"


훈련소 입소 후 계획대로 중대장 훈련병에 지원했어요. 내가 중대장 훈련병이 되어야 하는 이유!

10가지를 준비해서 취업 면접 준비하듯 면접관 입맛에 맞을 답변을 준비해 놨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어요. 나름, 아버지의 이야기와 자신감을 다시 찾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냥 내가 적임자였어요.


훈련소 7일 차, 사건이 터졌습니다. 훈련소 입소 후부터, 점점 커져가는 통증이 버티기 힘들어졌어요. 아프다고 하면 심각하게 여길 까봐. 말도 못 하고 꾹꾹 참아가며, 몰래 들고 온 파스로 연명했지만 "이제는 못 참겠다" 생각했어요.


7일 차 오전, 첫 주 훈련이 끝나고, 야전교육 대대로 이동하여, 각개전투와 유격, 행군을 할 참이었어요. 무리였지만, 중대장을 지원한 책임 때문에 통증을 꾹 삼키고 각오를 삼 겼어요. 4일 정도만 버텨 보리라…. 각오를 다지며, 발등에 파스를 뿌리고 스스로 괜찮다고 격려도 했어요. 옆자리 동기도 모를 정도로 철저히 아픈 걸 숨기고 밝은 척하는 바보입니다.



7일 차 오후, 이동을 위해 짐을 꾸리고, 야전교육 대대로 이동하기 위해, 우리는 짐과 화기를 챙겨 트럭에 싣었어요.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서, 저는 마지막 확인을 위해 생활관 3층으로 부소대장 훈련병과 함께 특이사항을 점검하려 계단을 올랐어요. (약간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가 변곡점이었어요. 누적된 통증과 생각할 것이 많아 압박받는 상황에서 계단 마지막 한 칸에서 발을 굴려 버렸어요. 평소라면 사소한 해프닝일 법한 충격이었지만, 큰일 났다고 직감했죠.


다시 자세를 바로 잡고, 3층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발등에 뼈가 ‘박살’ 나 있음을 직감했어요. 그 직후 앞으로 꼬꾸라지고, 등골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장악했습니다. 전년도 오른발목이 골절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며, 승선을 앞둔 상황에 꿈을 위한 한 발을 두고 절벽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었어요.


현실을 부정한 체, 훈련을 끝내고 싶은 욕심과 지금까지 통증을 무시한 어리석음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돼요. 막상 막하의 싸움 끝에, 합의점으로써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은 후 훈련을 계속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죠. 다음 날, 별일 아니겠지 라는 마음으로 진료를 받았고, 진료 결과는 뜻 밖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의사 선생님은 제에게 퇴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퇴소’


훈련소 입소 직전까지, 수도 없이 CT를 찍으며 “골절은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는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나의 고집으로 목발을 짚으며, 야교대로 이동했어요. 또 다음 날 정형외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어요. 저는 몸을 함부로 한 대가를 치러야 했어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귀가 준비를 위해 이미 전역 증표를 달고 있는 전투복을 반납하며, 처절한 절망감을 맛보았어요.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니 지금 당장 오신다고 하셨어요. 집에서 3시간 거리를 한 걸음에 달려온, 부친과 동생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오히려 안심시켰어요. 별일 아닐 거야. 괜찮을 거야!


집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 보고를 통해서 승선과 다음 군사교육에 대한 정보를 공유받았어요. 현재 나의 상황과 군의 이해관계 또한, 공유했어요. 다행히 별 일 아니었죠. 몸만 무사히 회복하면 되는 일이었어요.


퇴소 직후, 검도… 그 당시에도 검도뿐이었어요.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지만 검도를 하고 싶었어요. 뭐라도 당장 ‘추구’ 해야 했어요. 도피처였던 거 같아요.


하지만, 좌절감 때문에 다시 검도장을 찾아갈 수는 없었어요. 훈련이 끝나고 와서, “훈련 별거 아니었어”라고 말하고 싶었기에 용기가 필요했어요. 훈련소 입소 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관장님의 조건이 떠올라서,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골절을 경험한 분들은 공감하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왠지, 골절되고 나면 평생 불구가 된 거 같은 기분이에요. 하지만, 제가 해야 할 것은 간단했어요. 

정형외과 전문의의 조언을 따라서 회복에 전념하는 일이죠. 


골절에 대한 가능한 많은 정보를 모아서 그대로 따랐어요. 고작 미세골절에 불과한 조그마한 균열이 저의 온갖 정성에 화답하듯이, 다행히 2주 만에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집 앞의 카페 정도는 목발 없이 다녀올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제 좀 살만 해졌는지, 다시 검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


원래라면 훈련소가 끝났을 시기, 귀가 후 2주라는 시간이 흘려갔어요. 자연히 나는 집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관장님의 제안으로 광주 검도동호회 리그전을 관전하게 되었어요. 검도를 하며 비슷한 시기 시작하여 친해진 누나가 리그전에 참여한다고 하여 응원하려 갔어요. 솔직히 부러웠어요. 나도 검도하고 싶은데, 치사해.


차량 문제가 있어서, 제 차로 선수들과 함께 이동했어요. 자연히 내 옆에 앉은 그녀는, 제가 검도를 다시 할 수 없는 이유라는 명목의 하소연 100가지를 전부 받아쳤어요.


저게는 응원이었습니다. "발에 골절이 있는데 꾹 참고 하래요." 

관장님이 학생부에게 자주 하시던 말이지만, 이럴 때 쓰지는 않으셨는데, 정말 철붙이인거 같아요.


참으로 상냥하면서도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철이 없었어요. 리그전이 끝날 때, 나는 이미 맨발로 경기장에 서 있었습니다. 당장 검도를 시작하고 싶은, 입문 초기 초심이 되살아났어요.


관장님은 그런 나를 꿰뚫어 보신 거 같아요.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말을 정말 가볍게 해 주셨어요. 

“기본을 다시 하기 좋은 시기 내요? 앉아서 검도를 하는 방법이 있어요. 내일도 나와요 성하 씨” 


평소 호탕하신 관장님이지만, 그 말은 정말로 내일 나오라는 말입니다. 옆에 계시던 사범님도 당연하다는 듯이 같은 말을 하셨어요…. 순간 제가 이상한가 싶었어요. 


깁스를 하고 검도를 할 수 있나? 


진짜 갔어요. 

(정말로 가는 저도 좀 이상합니다.)


앉아서 검도를 했어요. 의자에 앉아서 검을 휘둘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동작에 집중하던, 저의 시선'을, 손으로 옮겨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앉아서 검도를 하면서도 저는 행복했어요. 뭔가를 배운다는 건, 성취감을 주거든요.


그렇게 시간이 더욱 흘렸고, 어느덧 골절이 회복되어 깁스를 벗었어요. 앉아서 하는 검도 덕분에 더 좋은 검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관장님이 이번에는 그 경기에 선수로 나가라고 제안하셨어요. 

이제 한 달 배운 쌩 초보자인데, 경기라니. 참가자격은 되었지만 망설였었어요. 하지만 왠지, 관장님 말씀이면 믿어도 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성하 씨 이번 리그전 참여 하실 거죠?”라는 물음에 “네!!!”라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경기장에 선수로 나갔어요.




이야기의 시작 <2>

선명해지는 세상과 글을 쓰게 된 이야기




진짜 검도는 대련이었어요. 상상 속의 상대를 후리는 기본기와는 너무나도 달랐죠. 상대와 나의 수 싸움이었고, 기세와 경험이 중요했어요. 첫 경기 참가라 큰 기대는 없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기에, 실점 한 번에 마음이 크게 요동쳤어요.


내 감정이 눈빛을 타고 상대에게 전해지는지.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상대가 나를 압박을 했습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었어요. “숨이 너무 차서 머리가 어지러웠어요”


경기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많아요. '상대의 키', '눈빛', '검의 움직임', '발의 움직임', 어깨를 으쓱 이는 습관들이 지금도 생생해요. "첫 키스의 순간처럼 강렬하고 짜릿했어요. 그리고 짧게 느껴졌어요"


검도 경기에 참여하고 나니, 저의 올해의 버킷 리스트 하나가 채워졌어요. 이로써, 검도에 대한 집착이 끝낼 수 있었어요. 좀 더 여유롭게 검도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따금, 영화나 전시회를 보려 외출하는 등, 집에만 박혀있지 않게 되었다.


‘이별에 대한 상처’


이별에 대한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된 거 같아요. 사실 마지막 연애에서 큰 상처를 받았거든요.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이 아팠어요. 그녀는 좀 달랐어요.


그녀는 승선하는 나를 꼭 기다려 줄 것이라고 말했었어요. 부산의 밤, 그 여름날에 했던 약속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그 말을 믿었고, 이 사람이라면 먼 미래를 함께 드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그래서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떠나갔어요. 당연하게도 떠나갔어요. 

그런 사람이 떠났으니, 사랑을 다시 꿈꾸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런 상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히 회복했어요. 사랑할 다른 것들을 찾았고, 다시 열정을 가지고, 미래를 그릴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랑했어요. 그 후로, 지인에게 소개팅도 받고, 썸 비슷한 것도 가져봤지만, 이제 연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보다는 삶의 부수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특히, 사람 보는 눈이 전과는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게 달랐어요. 그럼에도, 연애는 시작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어요.


피곤한 성격을 가진 나는 그저 미워하면 될 그 사람을 이해해요. 내가 오히려 상처를 준 거 같아서, 다시는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생겨도 주저해요. 


그럴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를 괴롭혔어요.


‘피곤한 성격’


제 성격이 피곤하다고 생각한 일화가 있어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특이한 점을 찾았어요. 제가 읽는 책들에 꼭 유대인이 얼굴을 비췄어요. 스쳐 지나가듯이 인사를 건넵니다. 한때 주로 읽는 책들의 저자들이 꼭 한 번씩 유대인을 언급했거든요. 오랜 세월을 땅 없이 살았지만, 먼 훗날, 국가를 건립한 단단한 유대감, 그들의 윤리, 도덕관, 학습에 대한 열정. 내가 보는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는 이러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유대인’을 동경하게 되었어요.


이 특이점을 찾은 후에, 저는 이 호기심을 채우고 싶었어요. 그렇게 유대인에 대한 도서 5권을 구입한 후에  읽었어요. 그 후에 자연스럽게 유대의 역사와 가치관을 배웠고, 감정이 이입되었어요. 나름 종교에 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야 교회를 갈 수 있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무교라고 주장하고 다녔지만, 모태신앙이었기에 교회를 가끔 갔어요. 하지만 학업을 핑계로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찾으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죠. 하지만, 이제는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유대교를 알기 위해서 주일에 교회를 간다" 이 말이면, 그래도 마음 편히 갈 수 있었어요.


만약 누군가, “갑자기 왜 교회를 다녀?”라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변할 생각이었어요.


"나는 절대자가 필요하다. 추구해야 하는 도덕적 절대자. 평화를 지향하고, 너무 자주 간섭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신이 있다면, 유일신 하나만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종교활동 하면서 읽을거리가 많았으면 좋겠다. 나와 그 종교는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서 교회를 다닌다."


아무도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거 같아요. 하지만, 이러한 이유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나의 굳어진 오랜 습관이에요. 이 정도 타당한 이유는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피곤한 성격이에요. 그래서, 다시는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생겨도 주저해요. 스스로를 아직 설득하지 못했거든요.


저는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이 쉬지 않고 질문합니다.


이러한 습관이 제가 ‘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인 거 같아요.



‘글쓰기의 시작’


시작은 사소했어요. 저는 혼자 생각을 많이 해요.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는 사건들...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게 선한 것인가...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고민이 많아요. 그런 정리되지 않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정리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런 일들은 꼭 잠들기 전에 일어나죠. 그래서 저의 밤잠을 늦췄어요. 

그래서 안심하고 잠을 자기 위해 메모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메모를 하다 보니 글이 점점 쌓이고, 분량이 5페이지, 10페이지가 되더니, 이렇게 긴 글이 되어버렸어요.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나만 간직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적었고, 그걸 가까운 사람들에게 공유하기 시작했어요. 반응이 괜찮아서 조금씩 재미를 붙였어요. 자주 제 글을 봐주던 후배가 책을 쓰라고 권한 일도 한몫을 했어요.


책을 많이 읽다 보니, 글쓰기 자체는 어렵지 않았어요. 뭔가 저와 비슷한 필체를 많이 읽어서 그런 거 같아요.

하지만, 나의 경험을 솔직하게 술술 불어버리는, 저만의 필체를 가진 계기는 따로 있어요. 아버지였어요.



'처음으로 쓴 장문'


이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아버지 영향이에요. 저는 나름 도전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남들이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했다고 자부해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헌신 덕분이에요. 그런 아버지는 내게 아낌이 없는 지원을 해주었어요. 다만, 저의 경험을 꼭 이야기해 달라 하였어요. 계약 아닌 계약인 것이죠. 그래서 대학시절, 오랜만에 집에 오면, 아버지와 술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웠어요.


하지만 최근, 제가 오랜 기간 집에 머물게 되었어요. 졸업 이후 승선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버지와 단둘이 많은 시간을 보내었어요. 우리는 단둘이 점심을 먹거나, 카페를 가곤 했죠. 아버지에게 저의 경험을 대부분 공유하고 나서야, 우리는 말없이 식사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제는 같은 것을 보고 이야기를 나눠요.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나에 대해서 버릇처럼 자주 하는 말이 생겼어요. "왜 이렇게 헤매냐"


저는 자연스럽게 왜 이렇게 헤매냐 라는, 이 '자주 듣는 말'을 곱씹게 되었어요.


자각하지 못했지만, 저는 방황하며 헤매고 있었어요. 마치, 육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지평선에서 표류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또렷해졌어요. 이따금 강가를 찾아 산책하고, 물을 보며 바다를 그리워하는 그 이유를 알게 되게 같았죠. 그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이 책의 초고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바다 사나이, 육지에서 표류기'라는 이야기가 완성되었어요.



이제, 나의 꿈은 ‘작가’이다.


저는 책을 특별하다고 느끼고 많은 영향을 받아왔어요.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누군가가 들려주는 경험'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책을 다 읽고 나면 창작을 한 이에게 감사하기에 늘 책 나지막 페이지에는 편지를 남겨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읽어줄 거라는 기대를 안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있어요. 하나의 사건을 다각도로 볼 수 있게 되고, 그 생각을 심지여 정리할 수 있다니!


그럼에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는 행위는 고통스럽지만 무척 즐거워요. 오늘도 글을 쓰느라 뜬 눈으로 밤을 새워버렸어요. 처음 독서에 재미를 붙였던 그 공간, 그 시간에 한층 여유롭게 저의 수명을 줄입니다.


작가를 꿈꾸며, 이별의 아픔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어느 날, 또 다른 작가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를 짝사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