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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lip Feb 05. 2021

관계 다이어트

관계를 정리하는 중입니다 (1)


 한국에서 홀로 지낸 지 넉 달이 흘렀다. 별일 없이 산다. 아니, 그보다는 살아진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코로나가 만연하자 쫓기듯 한국에 들어와 어찌어찌 일자릴 찾고, 잠시 부모님의 집에 기거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만 다섯 달 만에 집을 나왔다. 어쩌다 보니 온몸으로 코로나를 맞아내는 처지가 되었고, 몸도 마음도 바닥을 향해 갈 때쯤 더한 나락으로 나를 끌어내리는 이들이 내 지척에 존재함에 크나큰 절망을 하였으며, 한편으론 끝까지 내 손을 붙들고 나를 위해 함께 난간에 올라서 준 이들 덕분에 이미 시한을 넘어 선 삶에 아주 약간의 시간을 더 부여받아 감사한 하루하루를 이어 나가고 있다. 위태한 와중에 아와 아등의 세계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만약 삶의 시한이 가늠한 이상으로 멀리 있어 나 자신에게 솔직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까운 미래에 손을 꼬옥 잡아끌고 싶은 이도 생겼다.



(1) 부모, 가족이란 이름의 허울


 내 아버지는 구치소에 구금되었던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해, 그는 만취해 의경을 때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상고심에서 겨우 풀려나기는 했으나 회사에선 정직당하고, 벌금과 합의금으로 지출한, 당시로썬 매우 큰 1100만 원이란 돈을 빛으로 떠안게 되었다. 하릴없이 동네 공장을 전전하며 일품을 팔다 연줄 좋은 셋째 외삼촌의 덕으로 겨우 해고를 면하고 회사로 돌아간 그는 주기적으로 주폭의 성향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그전부터 꽤나 저열하고 난폭했던 인간이 사회적으로 도태됨을 계기로 근처의 사람들에게 본인의 폭력성을 여과 없이, 보다 극렬히 분출하게 된 것이리라.


 그의 행동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었다. 욕이야 평소에도 입에 달고 살던 인간이었고 귀가 트이고서부턴 늘쌍 폭언을 듣고 살았기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부분이었다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턴 별것 아닌 말에 본인이 부정당하였다며 길길이 날뛰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대거리를 하였다. 분이 안 풀리면 어머니, 혹은 내게 남은 감정을 들이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본인이 듣고 자랐던 부모 없는 새끼-라고 직접 그를 갉아내린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집안엔 서열 상 자기보다 아래인 나와 어머니밖에 없었기에 -라 자기를 밑 보냐며 패악질을 해댔다. 당연히 술이 트리거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술을 마시면 평소에 행하던 행위의 정도가 심해지곤 하였다. 우선 훈육을 이유로 손에 잡히는 것들로 나를 체벌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대가 되는 물건이 부러지도록 때리는 경우가 흔하였고, 때로는 목이나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기도 하였다. 체벌 중 울음을 터트리면 울었다는 이유로 추가적인 체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흉기가 될만한 집기들을 집어던지는 일도 꽤나 잦았다. 


 최악이었던 행동은 구금 후 풀려났던 당해에 일어났다. 만취하여 들어와서는 어머니와 어떤 연유로 비시가 붙어 내게 물이 펄펄 끓던 주전자를 집어던지고 그대로 칼을 들어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며 칼부림을 하기 시작했다. 대략 상황은 40분 정도 이어졌다. 그가 자신의 무릎을 찔러 자해를 시작하였고, 피가 낭자하는 것을 본 나는 지척에 살던 큰집으로 달려가 큰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보내곤 사촌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그날 밤을 버텼다.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내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혹은 속임으로써 감정의 기복을 억제해 버릇하였던 게. 이로 인한 생채기는 꽤나 시간이 흘러 성년을 훌쩍 넘긴 어느 날 찢기고 터져 묵은 고름을 뿜어내었다. 이후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어릴 때부터 이 인간은 참 사이코패스 같은 구석이 있다 생각을 하였다. 어린 나와 단 한 번도 시간을 같이 보낸 적 없는 그는 꼭 병원을 갈 때마다 나를 데리고 다녔다. 십자인대를 아슬아슬 빗겨나간 자상으로 그는 두어 달 계산동 어귀에 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나는 같이 진료실에 들어가 상처가 꿰매어진 환부가 아물어 가는 정도를 기록했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도 기력이 쇄하며 성정이 잦아들긴 하였다. 그러나 50대에 접어들어서도 일 년에 한두 번 크게 패악질을 해대었고, 역시나 그 대상은 주로 가족들이었다. 만취하여 온갖 집기를 집어던지고 유리창을 깨부수다 급기야는 본인의 손을 크게 다쳐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게 한다던지, 핸드폰을 집어던져 깨부수곤 다음날 어떻게 하면 핸드폰을 싸게 살 수 있냐며 전화가 온다던지, 제사에서 만취하여 돌아오는 길에 운전을 하던 내게 주먹질을 한다던지 그는 그 이후에도 꽤나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근 10년을 외국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혹 우리 가족이 평범해질 수 있는 여지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다. 아버지가 항공사에 근무하였기에 외국의 내 거처를 그들은 꽤나 자주 찾곤 하였다. 나는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름 성공적인 40대를 보내며 삶에 여유가 생겼기에 나의 아버지란 존재도  올바른 성정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얼마 안 되는 인내로 언행을 억누르고 있을 뿐 그의 자아는 보다 지저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미화된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완전한 존재다. 언제나 옳고 바른 행동을 하는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회사에서는 조금 운이 없어 역량에 비하여 저평가를 받았다. 자식을 하나만 낳아 아낌없이 관심과 돈을 쏟았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모자람 없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가끔 본인이 실수를 하긴 하였으나 그 부분에 대해선 타고난 성질이 이런데 어쩌라고- 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가 이런 언사를 흘릴 때마다 화가 나거나 좌절을 느끼지는 않았다. 냉정히 그와 어머니라는 존재,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재단해 보았다. 곱씹어 보아도 천륜이라는 이유로 마냥 합리화하여 주기엔 당신의 기억이 당신 피붙이의 기억과는 너무나도 괴리가 컸기에.


 요 또래 젊은 이들이 빠져 사는 수저론 같은 이야기에 나는 쉽게 끼지를 못한다. 내 고민은 여전히 보다 원초적이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마냥 공감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자의적으로 삶은 중단될 수 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에겐 하루하루 삶을 지속함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언제나 최우선의 과제이기에 삶의 깊이가 얕아진다 느낄 때면 이내 내재된 스위치를 누르고픈 충동을 느낀다.


 나의 아버지는 이렇게 내 삶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삶을 놓고 보면 과거에 겪었던 일들보다 근래에 그가 내비치는 언행으로 더 큰 상처를 입고 있다. 폭력적이거나, 지적 수준이 낮거나, 혹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시야가 어그러져 있거나 하는 부분들은 그래도 아직까지 내 감내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면, 너무도 쉽게 과거를 부정하고 본인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었던 마냥 과거를 미화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홀연히 길을 나섰다. 내가 가진 이성과 냉정을 잃기 전에, 보다 온전히 나를 지닌 체 얼마간의 시간이라도 살아내야 한다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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