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란데를 떠나서...
다시 돌아온 알바니아 해안도시 사란데에서 우리는 다음날 아침 그리스의 코르푸 섬으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 항구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처음 사란데에 와서 머물렸던 집보다는 내부 시설과 장식이 현대적이며 약간은 고급스럽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쏙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집이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단지 현재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사란데의 도심계획이 아주 엉망이며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아파트 역시 앞집과의 거리가 서로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좁아 다리가 긴 사람은 베란다를 통해 쉽게 건너뛸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다는 뜻이다. 또 앞이 탁 막혀 있으니 답답함은 물론 거실이 빤히 다 드러나 보이므로 커튼을 걷어 놓을 수도 없다. 오래 지내기에는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샤워다운 샤워를 하고 나니 비로소 문명의 혜택을 받은 기분이 들어 좋았다. 벽에 매달려 있는 샤워기 덕분에 두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씻을 수 있으므로 특히 머리를 감을 때 매우 편리하다. 이 작은 일상적 편리함이 긴장까지 풀리게 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편리성을 쫓는 인간임을 자인한 격이다. 그럼에도 이해타산에 밝은 오늘날의 일부 숙박업자들을 꼬집어 비난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요즘 들어 샤워기를 벽에 고정시켜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일종에 물낭비를 막기 위한 방어 수단이란다. 다시 말해 물을 마음대로 틀어 놓고 사용치 못하도록 한 조치란다. 간혹 지각없고 방종하게 사용하는 숙박객도 있겠으나 분명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겪는 불편함도 존재한다. 절약이라는 취지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현대기술이라는 것이 인간의 편리성을 따져 진보하는 것이 아니든가. 지나치게 사적인 이익에 초점을 맞춰 한쪽 시각으로만 바라본 실상이 왠지 씁쓸할 뿐이다. 세상인심이 점점 거칠고 야박해지는 불편한 현실이다. 다행히도 이 집주인의 인심은 앞서 임대했던 젊은 거만한 주인과는 다른 양상의 경우다.
아파트를 관리, 청소하는 젊은 여성분과의 짧지만 따뜻했던 접촉은 내 집처럼 느껴져 이 집에 있는 동안 기분 좋게 했다.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한 태도와 순박하고 진실한 표정에서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더 편하게 이해되며 통했다. 감언이설이나 유수한 열 마디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연사보다 더 친절하게 손님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 이 또한 선진화된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사회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인심이다. 흔히 전통적인 삶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그러니까 저개발국가를 여행할 때 느끼는 진미다. 때론 물질적 편리함과 상반되는 이 아름다운 참된 가치와 순수한 영혼을 만났을 때 물질 그 이상의 따뜻한 위안감을 느낀다. 거기서 삶의 동력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불편함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떠나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편리함의 반전! 진보의 역설! 상반된 모순이랄까!
다음날 우리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내고 페리를 타러 항구로 향했다. 국경통행 수속과 검문을 가뿐하게 마치고 시간이 남아 선착장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신 후, 배에 탑승하여 자동적으로 이층 갑판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배는 재빨리 항구를 벗어난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하늘, 눈부신 햇살, 따끔거리는 피부, 거칠고 끈끈하지만 시원한 바람. 펄럭이는 셔츠 속으로 돋아나는 몸소름, 머리카락이 휘장처럼 날리며 자꾸만 뺨에 들어붙는다. 바닷물이 배의 모터에 맞서 요동치며 새하얗게 거품을 뿜어낸다. 역동적이고 시원하다. 그 위에 무심코 꽂혀버린 시선.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거품알갱이들에 몰입된다. 그 열정에 몰아한다.
고개를 드니 확 트인 시야, 그 속에 하얀 뱃길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차츰 사라진다. 눈 녹듯이. 육지와도 점점 멀어져 간다. 아무것에 방해받지 않는다. 이 자유로움. 아름다운 자연. 바로 갑판의 매력이다. 이것이 배를 타는 이유다. 그리고 국경을 넘는 희열에 젖어든다.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이 싹튼다. 또한 알바니아가, 사란데의 모습이 아련해지는 것에, 세상 한 귀퉁이와 분리되는 것에, 가만히,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사란데의 모습도 멀리서 바라보니 아름답기만 하다. 어느 지중해 연안의 도시처럼. 에게해에 있는 그리스의 섬들처럼. 그 못지않게 하얗게 빛나는 도시다.
세상 모든 것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는 걸 다시금 일깨운다.
그리스의 코르푸섬 신항구에 내렸다.
드넓게 펼쳐진 공간과 버스 정류장에 부착된 배차시간표, 제시간에 도착한 시내버스, 질서 있는 탑승,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비로소 문명세계에 닿았음을 느꼈다.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한다. 그만큼 알바니아에서 썩 편치 않았던 것이다. 오랜 시간 폐쇄된 사회주의 국가, 무슬림 종교가 다수인 문화적 차이와 간극, 사회개혁과 변혁에 따른 부작용, 그 변칙과 폐단에서 느껴진 거부감. 특히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태도와 눈빛, 경직된 그들의 인상에서 달갑지 않게 불편한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려 다시 남쪽 코르푸섬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달리는 버스에서 본 풍경은 바다와 해변을 따라 우후죽순으로 늘어선 호텔들. 백사장은 당연지사, 해안가 어디든지 완만한 곳이라면 돌과 자갈을 불문하고, 다닥다닥 붙여 설치된 파라솔. 이 또한 사란데 못지않게 넌더리 나는 광경이다.
사실 코르푸 섬은 그리스의 모든 섬들이 그렇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하다.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와 풍족한 자연, 초록의 숲, 햇살이 풍부하여 유럽인들이 좋아하고 즐겨 찾는 곳이다. 숙박시설도 다양하게 잘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로마 유적들이 혼재하여 볼 것도 많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꽤 가성비가 높은 여행지 중 한 곳이다.
특히 지중해는 어느 바다보다도 여름철 해수욕을 즐기기에 안전하고 쾌적하다. 파도가 거칠지 않으면서도 물이 맑고 깨끗하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아 언제 어디서나 수영이 가능하다. 따라서 언제부턴가 햇볕에 굶주린 북유럽인들이 눈에 띄게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난 모습이다. 그럼에도 설마설마했다. 미코노스나 산토리니 같은 시크라드(Cyclades)에 있는 섬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처럼 산업화된 관광지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 뜻밖의 실상을 보면서 앞으로 갈 곳을 잃은 기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이 무리들 속에 끼어있지 않은 것을 위안 삼으며, 기이한 현상을 보듯이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환상의 벽도 무너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