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푸에르자 부르타 웨이라 인 서울
공연을 보러 티켓을 예매하고 공연장에 들어가 앉으면 꼭 한 번씩 듣게 되는 안내사항이다.
이제는 이 안내사항이 안 들리면 오히려 내가 불안하다. "이쯤이면 해줘야 하는데?" 하고 말이다.
그러나 잠심 운동장 어느 한 공연장에서는 이런 멘트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멘트를 남긴다.
그렇다. 21세기 들어 수년간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푸에르자 부르타'가 돌아온 것이다.
2022 푸에르자 부르타 인 서울
3년 만에 돌아온 2022년의 <푸에르자 부르타>는 예술인 사이에서 꼭 봐야만 하는 공연이라 칭해지고, 공연장 FB 씨어터는 빼놓을 수 없는 핫플레이스 포토존이 되어버렸으며, N차 관람의 좋은 예시로 거듭난 공연이 되었다. 수백 개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21세기 공연예술계 <푸에르자 부르타>는 기존 공연과 무엇이 다르길래 이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까.
<푸에르자 부르타>는 '잔혹한 힘'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감정을 언어나 서사가 아닌 넘버별 퍼포먼스로 표현한 공연이다. 무대도 관객석도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인터랙티브 퍼포먼스' 형태로 배우의 무대와 관객의 객석이 경계 없이 모두 무대로 펼쳐지고, 벽과 천장까지 모든 공간을 무대로 활용하게 된다.
관객들은 앉을자리가 없고, 배우들은 어디서든 공연을 한다. 심지어는 배우와 스태프의 경계 역시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관객들은 공연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소리에 집중하고 조명에 눈을 돌린다.
즉, 이러한 공연 형태는 관객에게 몰입을 극대화로 제공한다. 관객은 집중하게 되고, 작품의 한 요소로 같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환호를 하는 등 어떠한 형태로든 능동적인 참여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푸에르자 부르타> 공연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공연을 하고 온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인터랙티브 퍼포먼스
공연은 관객들이 공연장으로 들어와 암흑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머리 쓰게 하지 않는다. 아니 머리를 쓰게 두지 않는다. 직관적인 형태로 쉴 틈 없이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공연을 보러 공연장 객석에 앉아 약 60분가량의 내용을 빼놓지 않고 이해하려 관객들은 머리를 굴린다. "아까 팜플렛에서 본 두 번째 줄 내용을 표현하는 건가?" 혹은 "저 상자를 놔두고 가는 게 복선인 건가? 결말의 떡밥일까? 실수일까?" 매번 관객은 내용에 관해서 무대 위 예술가들과 씨름을 한다.
그러나 <푸에르자 부르타>는 앞서 언급한 경계 없는 공연 형태로 이미 관객을 몰입시켜 놓은 상태에서 70분 내내 이해하기보단 함께하길 원한다. 그저 같이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고, 그저 같이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환호하길 원하고 있다. 어쩌면 관객들이 머리 쓰게 하지 않는다보다 머리 쓸 시간을 두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 수 있겠다.
애초에 공연의 형태가 넘버별 퍼포먼스이기에 서사를 찾고 대사를 주의 깊게 듣는 게 아니라 하나의 무대 무대마다 관객은 집중하고 온전히 함께하면 된다. 관객이 온전히 공연을 즐길 수 있게 <푸에르자 부르타> 연출가 '디키 제임스'는 관객참여라는 요소를 끊임없이 물고 늘어져 오늘날의 공연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극한직업'처럼 영화관에서 2시간을 웃고 즐기는 영화가 있노라면 '인셉션'처럼 두고두고 회상하며 생각하면서 봐야 하는 영화도 있다. 공연도 마찬가지이다. 공연 시간 내내 내용을 파헤치면서 이해하는 공연이 있노라면 그저 배우와 함께 그 시간을 즐기면 되는 공연도 있다. <푸에르자 부르타>는 머리를 쓰지 않고 온전히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연의 좋은 예시라고 볼 수 있다.
<푸에르자 부르타> '잔혹한 힘'이란 뜻으로 주로 현대인들의 스트레스를 무대에서 주제 삼는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춤추며 마치 축제를 보는 듯한 '무르가', 대형 수조를 뛰고, 헤엄치며,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강렬함을 남긴 마일라, 공중의 커튼을 밟으며 뛰어다닌 꼬레도라스 그리고 <푸에르자 부르타> 대표 씬 중 하나인 꼬레도르 씬까지 공연이 주는 희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중 꼬레도르는 대형 트레드밀 위에서 벌어지는 현대사회 속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배우가 이따금 장애물에 밀려나기도 하고 가까스로 피해 돌아서면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보는 이들은 벌써 공감한다. 그렇게 공감대를 쌓으며 트레드밀 위 배우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러다 배우가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벽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술 땐 관객은 엄청난 환호를 보낸다.
공연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생각한다.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스토리와 서사없이도 배우는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어느덧 친구가 되어 공연을 함께한다. 그렇기에 이 공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이 아닐까? 코로나19라는 큰 위기를 힘겹게 이겨낸 2022년 <푸에르자 부르타>가 공연으로 주었던 힘은 가뭄 끝에 단비 같은 달콤함이었다.
<푸에르자 부르타> 공연은 모든 면이 훌륭했다. 그러나 공연장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는 나에게는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 남았다. 이번 공연은 촬영도 음료도 불빛도 공연장 내에서 가능했다. 촬영을 허용한다는 이유로 공연 전 찾아본 공연 영상은 인터넷에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공연장 현장에서도 관객들은 당장에라도 촬영할 수 있도록 각자의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70분 내내 각자의 핸드폰은 꺼지지 않았으며, 공연을 즐기기보단 공연을 기록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공연이 끝나갈 때쯤 조금은 하나의 의문 점이 들었다.
공연장 내 촬영을 허가하지 않았다면
더욱 관객들은 온전히 공연을 즐기지 않았을까?
우리는 기록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길거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핸드폰의 카메라부터 켜고 본다. 기록의 시대가 진해지면 진해질수록 황당한 일도 사회풍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우린 기록에 익숙해져 있다. 정확히 2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 2022년 <푸에르자 부르타> 공연을 했다고 하면 어떨까? 2000년도는 기록의 시대가 아니니 관객들은 스마트폰을 모를 것이고 온전히 공연만을 위해 집중할 것이다. 무대에서 주는 그 '잔혹한 힘'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즐길 것이다.
그러나 2022년 기록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나는 관객들이 온몸으로 받아내지 못한 것 같다. 화끈한 음악과 배우들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에도 관객들은 스마트폰을 꺼내들 뿐이었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푸에르자 부르타> 관객들은 스마트폰이란 기록 때문에 공연이 주는 잔혹한 힘이란 분위기에 취하지 못했고, 그 기록하는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공연의 유일한 방해 요소로 각인되었다.
<푸에르자 부르타>는 스페셜 게스트가 존재한다. 슈퍼주니어 은혁, 배우 최여진 이들이 출연하는 회차는 더욱이 기록에 가려진 공연을 관람해야 했을 것이다. 잔혹한 힘이란 분위기에 취했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덜했다. 조금의 리액션과 이따금씩 나오는 환호는 내게 조금의 확신을 주었다.
공연을 만드는 것은 예술가들의 몫이지만, 공연장에서 공연이 시작되는 시간부터는 관객의 몫이다.
공연을 만들고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지만, 공연을 완성시키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관객 요소가 다분한 <푸에르자 부르타> 공연에선 더욱이 말이다. 공연 중 기록을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은 이들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금의 주관적인 아쉬움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푸에르자 부르타>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에너지를 보여주고 불어넣어 주었다.
공연을 통해 활기를 찾은 사람도 스트레스를 깨버린 사람도 공연을 사랑하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역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의 힘으로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하나의 질문을 남기자면 당신의 힘은 어디서 생겨나고 어떠한 힘인가?
<푸에르자 부르타>가 '잔혹한 힘' 이듯 우리 각자의 힘들도 하나씩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