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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콜렉터 Mar 17. 2021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은 추억이 될 수 없다.



장장 사흘간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다시 부산에서 서울로의 이동을 반복했다. 피아노는 우리가 부산을 떠난 다음 날 오전에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이 낡디 낡은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 조율사 1명과 피아노 전문 이동 인력 2명이 붙었다.


서울에서 피아노를 기다리던 내게 그녀가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그건 그저 낡은 피아노에 불과해.

내가 대답했다.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옮기는 게 그저 피아노뿐만은 아닐 거야.


사진 ⓒ 2020. (Seoul Collector) all rights reserved.



일주일 전, 나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피아노를 옮겨 줄 전문 인력을 온종일 찾았다.

피아노를 옮기려고 합니다.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입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산에서 서울요? 쉽지 않을 텐데요.

나는 일주일 내내 피아노를 옮겨줄 사람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던 중 한 조율사와 연락이 닿았다.

부산에서 서울요? 제가 마침 울산에서 서울로 옮기는 피아노가 한 대 있어요. 피아노를 여려 대 실을 수 있도록 개조한 전문 차량으로 이동할 예정이니, 함께 이동 가능할 거 같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옮겨주실 기사님에게 이야기해둘게요. 이틀 뒤 시간 괜찮으세요?

전화를 끊은 뒤, 나와 그녀는 그날 저녁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에 급히 몸을 실었다. 그녀의 부산 집에서 서울로, 오래된 피아노 하나를 옮기기 위해서.




피아노가 목적지인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종 종착지는 마포구 연남동의 어느 주택 2층. 내려가 보니 주택 앞에는 두 명의 피아노 기사가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이가 많았고 다른 한 사람은 젊었다.

나이 많은 기사가 주택의 2층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한참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같이 온 친구에게 일을 가르쳐주기도 할 겸, 전통적인 방법으로 피아노를 올려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차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끈과 아주 오래전엔 피아노였을 고급 원목 판재를 꺼냈다. 나이 든 기사는 낡은 끈으로 피아노와 원목 판재를 서로 매듭지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피아노를 실은 나룻배와 같았다. 이어 기사는 나룻배의 선수에 긴 매듭을 지었다. 위에서 나이 든 기사가 리듬감 있게 배의 선수에 매단 끈을 퉁겼고, 아래에서 함께 온 젊은 기사가 배의 바닥 널 부분을 앞뒤로 흔들었다.

나는 어쩐지 저 둘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을 전수하는 것일까?' 

순간, 위에서 나이 든 기사가 피아노를 힘차게 당겼다. 아래서는 젊은 기사가 흔들대던 널의 반동으로 피아노를 위로 올려주었다. 둘의 호흡이 중요한 작업이었다. 피아노를 실은 나룻배가 순식간에 거친 풍랑을 지나 잠잠한 수면 위에 도착했다.

나이 든 기사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희 역할은 여기까지이고요. 내일 오전 일전에 통화하신 조율사가 방문할 거예요. 제 소견으로는 피아노를 오랫동안 조율하지 않았다면, 아마 두세 번 정도의 조율이 필요할 겁니다. 한 번에 조율하는 것은 오래된 피아노에 좋지 않아요. 시간이 흐른 만큼, 아주 천천히 음을 올려주다 보면 이전과 같은 음색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화음 연주도 충분히 가능하고요.

나는 답하였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진 ⓒ 2020. (Seoul Collector) all rights reserved.



얼마 만에 맞는 고요인가. 피아노를 옮기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나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온몸으로 폭풍을 맞은 몰골이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기뻐야 한다. 하지만 나는 몸보다 마음 한편이 더 무거웠다. 아까 계단 위로 피아노를 올리던 장면을 구경하던 이웃 중 한 사람이 내게 던진 말 때문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낡은 피아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제가 고급 독일제 피아노를 하나 처리했는데요. 피아노를 구하시는 줄 알았더라면 그걸 드릴 걸 그랬어요. 피아노를 버릴 때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그가 나에게 베푼 것은 호의였겠지만, 그 말이 나에게는 참 무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내게 던진 말 한마디가 나를 계속 짓눌렀다. 

'지난 사흘간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을 위한 일이었을까?  그자의 말대로 그저 오래되고 낡은 피아노에 불과할 뿐인데.'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각자 집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 순간, 어느 작은 점포 안에서 흐르는 음악이 길가에 울려 퍼졌다. 


자네 여기서 뭐 하는 겐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라네. 원랜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오. 내가 젊을 적까진 말일세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


토요일 밤 아홉 시
단골손님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한 노인이 내 곁에 앉았네 진토닉을 홀짝이면서
그가 말하길, "자네 나를 위해 추억을 연주해 주지 않겠나.
잘 기억은 나지 않네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라네.
원랜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오. 내가 젊을 적까진 말일세"

술집의 존은 내 친구라네
내게 술을 사 주곤 하지.
농담도 잘하고 재빨리 담뱃불 붙여줄 눈치도 있는 친구지만
항상 그리워하는 곳이 있다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하지. "빌, 죽을 것 같아."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채
"정말, 톱스타라도 될 수 있을 걸 이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토요일에 걸맞은 손님들이 오셨군
주인장이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네
다들 날 보러 오는 거란 걸 알고 있거든 
잠시나마 인생의 시름을 잊기 위해서

피아노로 말할 것 같으면, 한바탕의 축제 같다네.
마이크에선 맥주의 내음이 나고 
다들 바에 앉아 내 앞의 유리병에 빵을 던져 주네.
그리곤 말하길, "청년 자네는 여기서 뭐 하는 겐가?" 

오늘 밤 노래를 불러 주오.
다 함께 선율에 잠기고픈 기분이니.



우연히도 길가에 울려 퍼진 음악은 마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건넨 대화같이 느껴졌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난 사흘간 우리가 한 일은 피아노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진 ⓒ 2020. (〈마지막 (아닌) 퍼포먼스〉) all rights reserved.
사진 ⓒ 2020. (〈마지막 (아닌) 퍼포먼스〉) all rights reserved.



우리는 분명, 이 피아노가 '멈추어진 무언가'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만의 방식으로 할아버지를 위해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는 것. 아마도 지난 사흘간 우리가 한 일은 피아노를 매개로 하여, 할아버지의 시간을 우리의 시간으로 옮긴 것이 아닐까?

이제서야 완벽한 하루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의 피아노 연주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은 추억이 될 수 없다. 




- 2020년 2월 18일, 서울콜렉터에서 조. 

   (다음 글에서, '할아버지와 피아노'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음악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gxEPV4kol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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