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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이성이냐 VS 원초적 욕망이냐, 날카로운 심리전

연극 <에쿠우스> 후기

by 김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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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좋아하거나, 향후 공연계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는 학생들(연기자, 기획자, 스태프 포함)이 공연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이 작품을 종종 추천하곤 했다. 꽤나 어려운 작품이고, 국내 연극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다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묘사가 담겨 있어 허들이 높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심층적으로 잘 그려낸 데다, 배우의 기량과 연기력이 독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라 늘 추천 목록에 있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엄청난 수의 관객을 동원하고, 배우가 스타로 등극하는 산실이 된 것만 봐도 충분한 설명이 된다 하겠다. 특히 알런 역을 맡은 남자 배우들 중에는 현재 톱배우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꽤 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캐릭터라, 더더욱 관심과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원작자인 피터 쉐퍼는 석탄 광부로, 서점 점원으로 일하다 희곡 <다섯 손가락 연습>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 후 <에쿠우스>, <아마데우스> 등은 브로드웨이에서 1,000회 이상 장기 공연되며 관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뉴욕 비평가상, 토니상 등을 석권하면서 평단의 인정까지 석권해 버린다.

<에쿠우스>는 실화를 토대로 한 작품이다. 스물여섯 마리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는 마구간 소년의 엽기적인 범죄 사건을 친구에게 전해 들은 피터 쉐퍼는 창작열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2년 6개월의 시간을 공들여 완성한 작품은 피터 쉐퍼가 창조해 낸 허구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실제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피터 쉐퍼는 진실을 속속들이 파헤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해 낸 셈이다.


숭배할 것이냐, 불신할 것이냐
첨예한 종교 갈등의 이면 속에서
소년이 만들어낸 새로운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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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런이 저지른 엽기적인 행각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 극은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와 알런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사건의 단초가 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알런의 어린 시절과 부모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구체적인 추론이 가능해진다. 알런이 기형적인 사고를 갖게 된 데는 부모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드러난다.


교사 출신 어머니는 광신도에 가까운 기독교 신자이며, 인쇄공 아버지는 무신론자 사회주의자였다. 신을 숭배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불신하고 부정할 것이냐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알런은 성장했다.

알런은 기존 구세주의 형상을 그대로 신봉하지도 못하나, 온전히 부정하지도 못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말'을 자신만의 신으로 받아들이고 비밀스럽게 숭배해 나간다. 그것만이 부모에게 억압당하던 그가 자신의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말과 자신이 합일되는 순간, 모든 억압의 봉인이 해제된다. 말과 하나가 되어 미친듯한 광기와 열정을 표출하는 알런의 모습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현실에서는 가질 수 없는 자신만의 이상 세계였다. 경외감과 동시에 자신과 완벽하게 합치되었다고 느꼈던 말이 사납게 동요하는 것을 본 알런은 이제 자신과 말이 하나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분명히 나와 하나여야 할 말이 자신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댔다고 느끼는 순간, 그 스스로도 나름의 심판이 필요해진 것이다. 말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을 배척하는 말의 행위에 단죄를 하려 한다.

이는 곧 삐뚤어진 욕망을 갖게 한 부모님에 대한 불만, 그리고 보이기에만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절제된 이성과 원초적 욕망의 발현,
날카로운 심리전

다이사트 박사는 알런과의 상담 과정에서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고 이성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알런의 심리를 치유하는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사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다이사트는 과연 알런의 욕망을 거세하고, 자신처럼 절제된 이성인으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옳은가를 두고 고뇌한다.

알런의 심리만큼이나 다이사트 박사의 심리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열정 없이 하루하루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알런의 행위는 정당화할 수도, 납득하기도 어렵다. 그만큼 극단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극적 장치를 통해 다이사트의 삶은 완곡한 대치점에 서게 된다.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권위를 가진 정신과 의사지만, 정작 그 자신의 심리를 적절히 치유할 수 있는가를 돌아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모두가 보기에 정상적이라도 할지라도, 그의 삶이 온전히 정상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이사트 박사의 대사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란의 원초적인 욕망에 마음이 기울 정도로, 그의 마음 한편에는 발현하지 못한 욕망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 잔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와 왜곡된 열망에 대해 그려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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