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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남대문로 한옥카페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한옥상가?!

by 이경민
정체불명의 건물

이 건물을 발견한 건 2년 전 쯤, 2016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때와 다름 없이 남대문시장 일대를 걷다가 길 건너편을 바라 봤는데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붕은 전통 한옥식 기와 지붕인데 몸체는 시멘트 건물이고 창문도 길쭉 허니 주택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모양새였다. 게다가 바로 뒤에는 고층으로 지어진 호텔이 위치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주변을 둘러 봐도 어느 하나 물어 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중요한 의미가 담긴 건물일지도 모를거라는 생각에 혼자서 한 동안 지켜 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가림막이 설치되었고 공사가 진행되었다. 진짜 건물 대신에 건물을 축소해 놓은 듯한 모형이 바로 옆에 설치 되었고 모형 앞쪽에는 건물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 적혀 있었지만 그 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건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이다

건물의 모형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임시로 설치 되었다.

공사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일정 때문에 이 건물은 나의 머리속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 사이, 나는 도서<건축왕,경성을 만들다>에 푹 빠져 있었다. 종로에 있는 익선동이라는 동네가 뜨면서 알게 된 정세권이라는 사람, 그는 조선의 건축왕이라 불리는 도시개발업자였다. 그 당시의 도시개발업자는 지금의 도시개발업자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서울이 아닌 경성이라 불리던 일제강점기로 돌아가보자.

일제강점기 경성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초창기 주요 활동지역은 조선의 사대문 밖인 남산일대(*예장동), 명동 일대(*충무로1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많은 일본인들이 경성에 유입이 되면서 그들이 활동지역에서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가 되자 사대문 안, 즉 북촌으로 경계를 넓히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영역을 지키려는 조선인들과 그 영역에 들어오려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발생하게 되고, 정책적 차원에서도 총독부등의 정부기관을 조선의 국공유지에 입지시키고 주변에 관사를 건설함으로서 정부기관 종사자들의 거주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주거지 뿐만 아니라 상가도 예외 없이 일본인들이 사 들이면서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남산일대, 예장동
명동 일대 , 충무로1가

"최근에 이르러 그들은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긴 시일이 가까워지매 대경성의 미관을 위한다는 이유로 종로 일대의 큰 거리를 개수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제 종로통 도로개수에 따라 양쪽의 조선인 상점과 가옥들이 간혹 도로의 폭을 넗힘으로 인하여 헐리어 버리는 곳이 십수개 소나 되는(. . . . ) 헐린 집터에는 도시미관을 위하여 단층 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우도록 하였다. 경제력이 부실한 조선사람이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울만한 자력이 있을지가(. . . .) 일본인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인을 감언이설로 충동하여 전부 지가의 수중에 넣고자 암중비약을 한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p35


위 내용은 그 당시 종로 인근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도시미관을 이유로 조선인의 상점과 가옥들이 헐려 나가고, 반드시 2층 이상의 집을 짓게 하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자신의 집을 버리거나 팔고 만주로 떠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때문에 경성에 남아 있는 조선인들 중 아주 돈이 많은 부자는 극소수였고 대부분 가난한 이들이었다. 종로 지역이 이런 상황인데 일본인들의 주 활동지역 인근인 남대문로는 오죽 했으랴.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은 19세기 후반으로, 그들의 거주 지역은 일본공사관이 위치했던 진고개 일대(현재 예장동에서 충무로1가에 이르는 지역)였다. . . (중략)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당시 경성 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던 중국인 상권을 몰아내면서, 일본인들의 공간적 점유는 진고개를 넘어 남대문로 일대로 확장된다. 그리고 1896년 일본영사관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이전하면서, 경성 남부 지역에서 일본인 세력은 더욱 공고해진다. . .(중략) 1910년 중반(1917년)에 이르러서는 본정(충무로), 대화정(필동)뿐 아니라 남대문로 1,2,3,4가까지 대부분의 필지가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도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p25-p26

한옥상가에서 한옥카페로
공사 당시 설치된 조형물은 공사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었다.
한옥카페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오랜만에 남대문로를 찾은 날, 공사 중이던 그 건물이 궁금해 다시 그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치도 못하게 가림막에 가려져 있던 건물은 자세히 들여다 보니 카페로 운영 중이었다.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 보니 건물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사진과 도면이 액자에 담겨 벽면에 걸려 있었다. 건물 앞쪽에는 설명이 기재된 입간판도 설치 되어 있었다.


"한옥상가를 언제 건립했는지 알 수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숭례문 주변의 옛사진 자료와 관련 사료들로 미루어 191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중략) 상가 1층에는 가게를 두고 2층은 창고나 주거로 사용하는 점포주택 또는 주상복합 용도로 지어졌는데, 2층 외벽에 수직창을 두어 전체적으로 수직성을 강조하고 창문 위와 아래에는 화강암 창대석을 두어 안정감을 더하였다...(중략)"

2016년 복원공사 전 모습과 2017년 복원공사 후의 비교 사진
1910년대 남대문로 전경
1920년대 남대문로 주변 전경
1970년대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 모습

아마도 글을 읽어 내려 가면서 정체불명의 이 건물과 조선의 개발업자 정세권이 무슨 관계이며, 시대적 상황과도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했을 거다. 그 의문 속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1910년에 찍힌 남대문로의 전경 사진을 잘 살펴 보면 해당 건물이 찍혀 있다. 한국은행 앞 광장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식민자본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절에도 한인이 상권을 잃지 않았던 곳이 남대문로라고 한다. 1910년에 세워진 한옥상가로서 100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서 지키며 남대문로의 변화상을 오롯히 다 지켜본 셈이다.1970년대 남대문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해당 건물 바로 옆쪽에 비슷하게 생긴 건물 두 개가 더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철거 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상권을 장악하려는 일본상인들 틈에서도 끝까지 조선인이 소유했으며, 현재까지 원 위치를 지키고 있는 최후의 2층 한옥 상가가 됐다.

처음 발견 했을 때 건물은 회색빛이어서 당연히 내부도 회색빛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빨간 적벽돌에 지붕은 목조로 되어 있었고, 벽면에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곳곳에 보이는 나무목재의 흔적을 없애지 않고 남겨둔 모습에 혼자 감격해 괜히 한번 만져 보기도 했다.

천장의 내부는 목재로 되어 있었다.
벽면을 잘 살펴보면 색깔이 변색된 것을 알 수 있다.
벽에 나무가 박혀 있다. 뭔가 있었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가운데 중앙 홀쪽은 찍지 못했다. 현재 이 건물의 소유주는 (주)흥국생명보험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2층 한옥상가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자비를 들여 원형을 복원하였고, 등록문화재 신청을 통해 마침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등록이 완료되었다. 복원공사를 통해 건물은 좀 더 안정& 안전할 수 있었고,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싸늘했던 공간이 어느 새 남녀노소, 나이 불문하고 수다를 떨다 가는 편안한 공간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게 어디있을까 싶다. 바로 옆에 있었던 두 채의 건물도 철거 하지 않고 이렇게 복원했으면 좋았을련만 아쉬움이 남는다. 100년은 이미 지났으니 200년, 300년.. 오랫동안 남아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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