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더위가 가시지 않아 지칠 때쯤 고대웅 작가로부터 문득, 초대장이 왔다.
노르웨이 건축가 그룹 DRMA와 도시건축정류소 건축사무소 이재원 소장, 그리고 고대웅 작가가 함께 작당모의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건축가와 예술가가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것은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종종 봤어서 그리 새롭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목적이 무엇이고,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하느냐'는 지점에서는 궁금해졌다. 초대장을 건네준 고대웅 작가는 지난 몇 년 동안 을지로를 기반으로 작가로서, 사업을 진행하는 PM으로서, 여러 사업을 구상하는 기획자로서 역할을 하며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해왔다. (자세한 것은 고대웅 작가의 브런치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번 작당모의 또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을지로에서 그동안 해왔던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진행되는 듯했다.
현재 을지로는 (혹은 을지로일대는) 수십 년 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재개발사업이 시차를 두고 진행되고 있다. 이미 주상복합 아파트와 호텔이 들어선 곳도 있고 한창 공사 중인 건물도 있고 앞으로 공사가 예정된 곳도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예술공간과 철공소가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이를 이어주던 인적 네트워크, 즉 관계망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대웅 작가는 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관계망을 <건축가:예술가 1:1> 워크숍을 통해 연결하고 아직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을지로에서 지역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가고자 이 자리를 마련한 듯 보였다.
도시 관련 프로젝트에서 네트워크를 활용해 커뮤니티를 만들고 다양한 활동을 해내가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 작당모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어떤 차별점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나의 경우 특히나 도시에서 예술가는 타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라 독립성이 강한 개별적 존재라는 생각이 강했다. 물론 예술가의 성향, 작업방식에 따라 협력방식이 다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또 무엇보다 내가 예술가 집단에 속해있거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없어서 가지는 편견 혹은 고정관념 일수도 있다. 예술가를 향한 일방적 시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술가들이 연결되어 무언가를 같이 해내간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동시에 여러 질문들도 솟아났다. 도시를 작동하게 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도 예술가 커뮤니티를 통해 답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이 있는 것일까? 건축가와 함께 어떻게 접점을 만들까? 한국문화에 익숙지 않은 노르웨이 건축가라니?! 무엇보다 워크숍 제목이자 콘셉트인 예술가와 건축가의 1:1 매칭 방식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재개발구역을 돌아보면서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 중 물리적 공간만큼이나 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과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존재와 행위, 그리고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몸소 깨쳐 왔다. 어느 하나만 만족해서는 도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아야 제 기능을 하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워크숍은 의구심이 들면서도 기획의도나 의미가 공감되었기에 고대웅 작가의 초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워크숍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나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도움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기도 하고 도움을 기대하고 초대한 건 아니니까 혼자 김칫국을 마신 것 같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을 이왕 알게 된 이상 도움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착한 모임 장소에서 워크숍에 초대된 사람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주된 내용은 "을지로의 생태계, 장소적 속성, 건축적 요소와 예술가의 창의적인 활동이 만나 가치를 높여보고자 한다. 예술가는 다양한 산업, 사람(주민), F&B와 같은 요소와도 연결되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커뮤니티를 통해 을지로의 내일을 그려볼 계획이다."였다. 워크숍이 진행되는 내내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활동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재개발이 진행되려는 과정에서 다른 활동가, 기획가, 예술가들이 이런 활동을 안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당 워크숍에서 전달되는 내용들이 이전에 다른 분들이 하던 활동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는 '예술가가 도시에 주는 영향을 증명하는 것’ 보다는 변해가는 과정에서 소멸하는 것(예를 들면 도심산업생태계) 들을 새롭게 생겨나는 공간에서 어떻게 계속 이어갈 것인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은 그 생태계가 어떻게 유지하게끔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뭔가를 새롭게 하기보다 그동안 해온 것들을 잘 점검하고 다져가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염려되었다. 이러한 우려와 걱정으로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오가는 와중에 어느새 워크숍이 끝이 나버렸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찜찜했다. 혼자서 끙끙 고민하다가 고대웅 작가(청두)에게 “이번 워크숍을 통해서 예술가와 건축가가 만나서 하고자 하는 바는 예술이 가진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것인가요? 아니면 예술을 통해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의견을 묻고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연이어 이어진 질문과 답변 속에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가가 도시에 전하는 영향을 증명하는 것이 숙제여서 본 워크숍이 그것을 확인하는 창이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워크숍은 예술가 커뮤니티를 통해 도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술가가 만든 공간과 작품이 사유물에 그치지 않고 시민들에게 직, 간접적으로 소비되거나 유통되고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어 주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 커뮤니티와 함께 을지로의 내일을 그려보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의 특성상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다양한 형태로 활동하기 때문에 경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맞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만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을지로에 애정이 있거나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더라고요. 을지로에서 공간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분일 수록 그 강도가 더 강했습니다. 또 소공인들 모두와 관계를 맺을 순 없지만 산업을 활용해 창작활동을 하는 분들은 끈끈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요. 장르와 작품 형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을지로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그 감사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경계가 있으면서도 없는 부분들이 있고, 그곳을 통해서는 많은 것이 오고 갑니다.
워크숍에서는 전하지 못한 말이지만, 재개발이 계속 진행된다면 우리는 새롭게 생겨나는 공간에서 어떻게 지난 가치를 이어가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해볼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기부채납을 받은 공간에 어떤 것들이 있고, 어떤 기준들로, 어떤 사람들에게 운영되어야 기존의 가치를 이어갈 수 있을까? 공공은 어떤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할까? 이후 입법은 어떤 것들을 보완해줘야 할까? 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편의상 고대웅작가님-> 고대웅작가로 언급하였습니다.
**포스터 이미지는 고대웅작가님이 제공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