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쓰기 3] 2025.07.02. 국제신문 김민경 당근정신건강의원원장
얼마 전 부산에 많은 비가 내렸다. 벌써 장마인가 생각에 잠기며 내리는 비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퇴근길 버스에 올랐다. 운행 후 조금 지났을까? 중년여성 몇분이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일부러 버스 정차 후 앞문을 열어 그들에게 어디를 가시냐고 물으셨다. 원하는 목적지를 가려면 길 건너에서 타야 하는데 잘못 승차하는 분이 많아서라고 한다. 제법 세찬 비가 쏟아지는 길을 그들은 멀리 있는 건널목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기사님이 다시 문을 여신다. "비가 오는데 걸어가긴 좀 멀지요? 그냥 타세요. 요금 내지 말고" 감동한 듯 그분들은 얼른 버스에 오르고 고마움에 가지고 있던 간식을 건네신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연결되고 버스 안에서 때 아닌 사랑방 대화가 펼쳐졌다. 요즘 같이 삭막하고 팍팍한 세상에 참으로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서로를 신뢰하기보다는 경계해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 삶을 지탱하기에도 버거운 현실에서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고 공감하고 그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땠을까를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베푼 선의가 때로는 씁쓸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소액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한 데다 그 계기로 연락마저 뜸해진 일이라든지,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가 내 뒤에서 험담했다는 걸 알게 된 일들 말이다. 누군가의 선의를 악용해서 실리를 취하려는 나쁜 사람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두 명의 용의자가 체포돼 따로 심문받는 상황에서 이들이 어떻게 자백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두 명 중 한 명이 배신해서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즉시 풀려나고 나머지는 10년 형을 받는다. 둘 다 자백하면 모두 5년 형을 받는다. 하지만 둘다 모두 침묵하면 6개월씩 형을 산다. 개인적으로 가장 유리한 결과는 본인만 자백하고 상대는 침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방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최선을 함께 침묵해서 최소한의 기간만 복역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는데 무척 유용한 전략이다. 우리는 호의나 선의를 베풀 때 나도 모르게 기대하게 된다. '이 사람이 고마워하겠지, 나를 좋게 봐주겠지' 이렇게 기대했다가 선의를 베풀었는데도 상대가 하찮게 여기거나 당연하게 생각하면 실망하고 속상해한다. 그럴 때 이 전략을 쓰면 좋다.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선의를 베푼다. 단, 상대가 그것을 나에게 그대로 돌려주거나 고마워할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베풀었는데 돌아온다면 고마워하자. 당신의 선의가 누군가의 마음을 녹였다는 증거니까. 그런데 돌아오지 않는다면 깨끗이 잊자. 그리고 상대방에게 비슷한 정도로 거리를 두자.
필자도 따뜻한 선의를 경험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오래전 병원 당직 근무를 마치고 걸어가던 중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졌다. 하필 큰 대로변이라 비를 피할 건물조차 마땅치 않았다. 큰 나무 아래 비가 그치길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는데, 지나가던 승용차가 창문이 열리더니 큰 장우산이 빠져나온다. 운자분이 조수석 창문으로 장우산을 건네주시는게 아닌가. "비 오는데 어서 빨리 쓰세요."
길 가다 우산을 주고 가셨으니 돌려받을 수도 없다. 수십년이 지난 기억이지만 그 따뜻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버스는 어느 덧 정류장에 도착하고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 건널목만 건너서 반대편 버스 타시면 됩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분의 선의가 단비처럼 삭막함 세상을 깜싸 안는다. 아직은 꽤 살만한 세상이다.
김민경 당근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