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시간을 기록하다
역시 여행의 기록은 상공에서 내려다본 구름 사진으로 시작해야 제 맛이다. 굳이 말로 드러내 표현하지 않더라도 비행기 안에서 찍은 상공샷이라는 걸 티 내기 위해 비행기 날개나 프로팰러를 걸쳐서 찍어주는 센스를 발휘해주면 더할 나위 없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둥실 떠다니는 구름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세상 전부인 것 같았던 일상과 현실의 상황들이 작고 작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 작은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던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도 새삼 느낀다.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여행은 나와 세상을 다르게, 다시 보기 위해 마련된 장이다. 일상이라는 틀에 갇힌 나를 다른 위치로 초청하고, 낡은 시선에 다른 각도를 선물하는 일이다.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늦은 오후, 런던 시내에 도착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부는 한국에 비하면 한결 따뜻한 기온이지만 제법 춥다. 아직은 겨울이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으로 피곤한 탓에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창문 밖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런던의 지하철인 튜브(tube)의 개찰구에서 며칠 묵을 숙소의 직원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니 벽에 포스터가 하나 붙어 있다.
Right into the heart of the country
이제야 런던에 온 것이 실감 난다.
십 년 전 영국에 처음 와 보았다. 그 이후로 이런저런 일들로 몇 번 다녀 갔었는데 이렇게 혼자 다시 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매 번 우연한 계기로 영국에 오게 되었고, 다녀갈 때마다 삶의 중요한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크고 작은 인생의 분기점마다 다녀가는 곳이 됐다.
이번엔 과연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설령, 아무 일이 없다 해도 그것대로 괜찮다. 이번엔 오롯이 휴식하기 위해 떠나온 여정이니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데 집중하기만 해도 잘한 일이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런던은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한 해가 다르게 변하는 서울의 리듬과는 사뭇 다른 런던 한복판의 낡은 풍경이 무척이나 반갑다. 변하지 않은 과거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 익숙함이 안심을 주는 도시. 같은 곳을 몇 번이고 자꾸 찾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 그렇다.
언젠가 불현듯 예전의 모습 그대로 같은 자리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생각에 목이 메었던 기억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들, 변함없이 한결같은 사람들 덕분에 언제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는 감상에 한참 젖어 있었다. 어쩌면 그냥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201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