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존중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난 여름. 반려견 은이와 대구의 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흙으로 조성된 생태 친화적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놀이기구 주변 냄새를 맡는 은이에게 나는 언제나처럼 주의를 주었다. “아이들 노는 곳에선 쉬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은이는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려다 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은이가 걷고 있는 그 길에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비도 오지 않았고, 근처에 수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다 싶었다. 나는 주변을 살펴봤다.
물줄기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아이들은 개미굴을 파헤쳐놓고는 그 안에 물을 붓고 있었다. 아마도 이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뛰어놀다 우연히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했을 것이고 재미 삼아 구멍을 파다가 물을 넣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있을 개미들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개미들 다 죽여 버릴까?”라며 키득거리는 한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것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놀이로 생각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담소를 즐기는 부모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짓을 보고 있는 은이에게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이와 함께 하면서 불편해진 일
사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예민한 건 아니었다. 예전엔 나도 이런 것들을 아주 자연스런 아이들의 놀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은이와 함께하게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와 완전히 다른 종인 은이와의 교감은 다른 모습의 생명체들도 은이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주장하며 안전을 추구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살아있는 유기체라면 본능적으로 ‘생명’을 갈구할 것이 틀림없었다.
때로는 은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궁금하기도 했다. 사람과 달리 흑백으로만 보인다는 은이의 눈엔 어떻게 세상이 보일지 궁금했고, 거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은이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궁금해 은이 옆에 나란히 누워보기도 했다. 다른 생명들도 궁금해졌다.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새들은 어떻게 세상을 느낄지, 비 오는 날 땅으로 나와 꿈틀거리는 지렁이는 어떤 기분일지 자꾸만 마음이 갔다.
그러자 불편해지는 것들이 많아졌다. 아이가 바닷가에서 작은 게를 잡아 와 키우기 시작했다는 이웃의 블로그 글, 실내 동물체험공간에서 먹이를 주는 모습을 담은 SNS 속 사진, 산에서 잡아 온 곤충을 키우다 죽었다고 슬퍼하는 아이에 대해 고민했던 한 친구, 나는 이제 이런 이웃과 친구들에게 공감해주기가 힘들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으로 생명을 대하고 관찰하는 이들의 모습은 자꾸만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인간 중심’ 교육이 낳은 생명경시 풍조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른 생명들을 이처럼 ‘인간 중심적’으로 다루게 된 걸까? 아이들은 어쩌다 다른 생명체를 놀잇감으로 여기게 된 걸까? 나는 이런 것들이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유아기 때부터 아이들은 동물을 도구로 대하는 법을 배운다. 코로나19 전까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단골 현장학습 코스 중 하나는 동물체험 시설 견학이었다. 아이들은 야생동물을 가둬놓고 만지고 먹이를 주는 것을 ‘동물 사랑’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동물의 입장에서 이는 고유의 삶의 방식을 박탈당한 학대에 해당한다. 동물 체험은 교감과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호기심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사육하는 것을 생태교육이라 여기는 곳도 여전히 많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 이웃은 얼마 전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과제로 개구리를 키워야 했다. 유치원에서는 생명교육이라며 아이들에게 올챙이 몇 마리를 컵에 담아 나누어주었고, 집에서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하는 과정을 관찰해오라고 했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된 후, 그 이웃은 그 개구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나는 그 이웃보다 개구리가 더 황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의 연못에서 살아야 할 개구리가 작은 어항에 갇혀 실내에서 살아야 한다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일까. 그 개구리는 이웃이 어떻게 하기도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런 교육과정이 아이들에게 생명존중이 아닌 생명경시를 가르치는 시작이 된다고 생각한다. 원래 살아가야 할 공간에서 동물을 데려와 인간이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생명체만의 방식을 무시하고 인간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 아니겠는가. 숲에서 발견한 달팽이를 집에서 키우다 죽었다고 슬퍼하는 아이를 안타까워하기 전에 애초부터 숲에서 달팽이를 함부로 데려와서는 안된다는 걸 먼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생명경시’ 교육은 초등학교 이후에도 계속된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동네 과학학원들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게도 홍보 문자들을 보내왔다. 그런데 이들이 자랑하는 커리큘럼엔 ‘동물 해부’가 버젓이 들어있었다. 소눈, 개구리, 돼지 폐 등을 해부한다는 학원들의 홍보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2018년에 개정되어 2020년 3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동물보호법에서는 미성년자의 동물 해부(사체 포함)를 금지하고 있다. 다양한 예외조항 때문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미성년자가 동물 해부를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법에 취지이므로 사설학원에서도 이를 따르는 것이 옳다. 세계적으로도 동물 해부는 생명을 도구화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에게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으로 인정돼 교육과정에서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그럼에도 버젓이 해부 특강은 버젓이 열렸고, 나의 이웃들은 SNS에 흰 가운을 입고 해부 특강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랑스레 찍어 올리기도 했다.
달라진 일상, 연결되고 확장되는 기쁨
은이와 함께하면서 우리 가족은 동물을 도구화하는 이런 풍조들이 점점 더 불편하게 느껴졌고 때로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이런 불편감은 우리 가족의 일상을 바꿨다. 동물원과 수족관은 우리 가족의 나들이 코스 목록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어릴 적 동물원의 맹수들을 사랑하고, 수족관에서 고래나 상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좋아했던 아이는 이제 그 일들을 부끄럽다 여긴다. “우리가 자꾸 가면 동물들이 자연 속에서 뛰어 놀지도 못하고 작은 공간에 사람을 위해 갇혀 살게 된다”고 말할 줄 알게 됐다.
집에 곤충이 들어와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대신 나무젓가락 등에 조심스레 올려 아파트 밖으로 내보내 준다. 혹여라도 잡아서 내보내야 할 때는 반드시 장갑을 사용하는데 곤충들의 체온은 사람의 체온보다 낮아서 사람의 손이 닿으면 심한 화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산에 갔다 모자나 신발에 애벌레가 붙어와도 나무젓가락에 올려 아파트 밖이나 화단에 내보내 준다. 곤충들이 살아야 할 곳은 사람의 집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는 과학학원엔 가지 않기로 했다. 아이는 하얀 가운을 입고 동물을 해부하는 대신 집에서 운동복 차림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하지만, 아이가 과학 수업을 따라가는 데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더 불편해진 것 아니냐고 말이다. 수족관이나 동물원에도 마음대로 못 가고, 곤충이 들어올 때마다 귀찮게 밖에다 데려다줘야 한다니 많은 제약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동물의 삶을 존중해주려 애쓰면서 오히려 우리의 삶이 ‘확장’되어 감을 느낀다. 다른 동물의 삶을 존중하려 노력하는 것은 다른 존재와 우리를 연결시켜준다. 이런 연결감은 인간 중심의 좁은 시야를 확장시켜준다. 일상의 불편들 속에서 나는 내가 조금 더 좋은 ‘생명체’가 되어 가는 기쁨을 느낀다.
사실, 아이는 생태중심 교육을 하는 유치원을 나왔다. 매주 한 번 산에 방문해 종일 뛰어놀았던 그 유치원에서는 ‘인간 중심’이 아닌 ‘상생’을 가르쳤었다. 아이들은 산 입구에서 “내가 들어가도 되겠니?” 하고 자연에게 묻도록 배웠고, 산에서 관찰한 모든 것들은 해치지 말고 그 자리에 두라고 배웠다. 하지만, 학교에 가니 너무나 각박해졌다. 아이는 개미를 잡고, 곤충을 가둬 키우는 걸 돌봄이라 착각하는 친구들과 교육과정에 익숙해져 갔다. 나는 아이가 ‘상생’을 잊을까 봐 은근 걱정이 됐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는 아직 ‘생명감수성’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이것이 반려견 은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은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다른 종에게도 관심이 확대되고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 또다시 은이에게 고마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다짐해본다. ‘좋은 사람이기 전에 좋은 생명체가 되겠다’고. 이것이야말로 말로 무한한 사랑을 주는 반려동물과 마음을 확장시켜 주는 다른 동물들에게 보답하는 길 아니겠는가. 삶의 기반을 닦는 교육에서도 ‘좋은 사람’이기 이전에 ‘좋은 생명체’로 사는 법을 먼저 가르쳐준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