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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27. 2019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남편이 아니었다

[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 12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노력들 

 어느 책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넓은 세상을 경험한 후로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2018년의 마지막 날. 우리 가족은 밴쿠버의 집을 전부 비웠다. 한국으로 보내고 남은 짐들을 자동차에 실었다. 캐나다에서의 마지막 보름은 그렇게 차 한 대에 몸을 싣고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둘러보면서 마무리했다. 남편과 나는 여행 중 새해 카드를 주고받으면서 다짐했다. 이곳에서 배운 것들, 그러니까 생명과 다양성 존중, 그리고 평등한 관계를 위해 시도했던 것들을 한국에 가서도 계속 이어 가자고. 그런 마음으로 아쉬움과 설렘을 모두 안고 올해 1월 17일 다시 한국의 땅을 밟았다. 


 변화의 걸림돌

     

 대구에서 우리가 살던 집은 이것저것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다시 입주하기 전에 손을 보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귀국하자마자 우리 집이 아닌 대전의 시가로 향했다.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보름 정도 시가에 머물며 한국에서의 일상을 준비했다. 


 밴쿠버에서 남편과의 관계에서 ‘평등’을 추구해왔던 내게 귀국 후 곧바로 시가로 가야 하는 일은 묘한 긴장감을 유발했다. 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시가에서도 며느리로서만 행동하지 말고 내가 나 스스로를 존중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가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며느리’로서의 정체감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시차 적응 때문에 피곤한데도, 주방에서 소리만 나면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고, “들어가서 쉬어라”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에도 “괜찮아요”만 연발하며 시가의 일들을 거들었다. 


 반면, 남편은 시가에서 ‘아들’ 모드가 발동됐다. 시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 세탁, 이부자리 서비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이런 남편을 지켜보며 ‘자신의 본가에서 남편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한 다리 건넌 내가 먼저 시가의 일에 나서지 말자’고 다짐을 하곤 방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노력을 해봤다. 하지만, 시가의 주인인 시아버지를 비롯해 아무도 거들지 않는 집안일을 혼자 감당하시는 시어머니를 지켜보는 것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시어머니와 함께 앞치마를 두르곤 했다. 


 동시에 남편의 회식이 재개됐다. 시가는 대전이었고, 남편의 직장은 대구에 있었지만, 귀국 보고가 들어가자마자 남편의 직장에서는 ‘귀국 환영회’를 연이어 열어줬다. 남편은 시차에 적응하기도 전에 거의 매일 오후 대전에서 대구까지 회식을 하러 갔고, 술에 취해 대전 시가로 돌아왔다. 업무복귀는 2월 중순이었지만, 그보다도 먼저 회식에 복귀한 셈이었다. 반면 나는 시가에서 지내느라 친구와 동료, 지인들에게 귀국했다는 전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느리, 아내, 엄마. 가정에서의 역할로만 내가 평가된다고 느낄 때. 나만의 작은 공간은 오롯한 나를 만나고 회복하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unsplash

     

나만의 공간 만들기 

     

 나는 위협을 느꼈다. 캐나다에서 애써서 일궈온 ‘나답다’는 느낌이 시가에 있는 동안엔 전혀 들지 않았다. 시가에서 나는 여전히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회식이 업무만큼 중요한 남편의 직장문화도 우리가 캐나다에서 일궈온 ‘함께 하는’ 일상에 흠집을 낼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한국의 문화 속에서 ‘나다움’을 유지할 무엇인가가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대구의 우리 집을 정비하면서 작은 방 하나를 오롯한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책상과 책장을 넣고, 편한 자세로 책을 읽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작은 소파와 테이블을 배치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책장을 채우고, 작은 소파엔 포근한 무릎담요 하나도 가져다 두었다. 내 공간을 꾸미면서 나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내방을 가졌을 때처럼 설렜다. 결혼 후 13년 만에 처음 가져보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귀국 후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한 이웃들은 이 방을 보고선 당연한 듯 이렇게 물었다. “여긴 남편 서 재지?”. 내가 “아니요 제 방이에요”라고 대답하면 ‘뜨악한’ 표정들을 지었다. 많은 집에서 서재는 ‘남편’ 혹은 ‘아빠’의 공간이다. 설령 남편이 종일 밖에서 일하고 집에선 TV를 보거나 잠만 잔다 할지라도, 남편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엄마가 집안에 자신의 공간을 마련한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웃들의 당황한 표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엄마의 공간’은 없는 관행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어쨌든 이 방은 지금까지 내게 글을 쓰고, 상담사례를 정리하는 일터이자, 공부를 하고 책을 보며, 바쁜 일상에서 ‘온전한 나’를 만나는 공간이 되어 주고 있다. 비록, 바로 옆 주방의 설거지 감과 세탁실의 세탁기 소리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긴장감 늦추지 않기

     

 나만의 공간을 만든 후, 나는 끊긴 경력을 잇기 위해 여기저기 원서를 넣었다. 다행히 3월부터 한 대학의 학생상담센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었다. 글쓰기와 상담을 병행했고, 사례연구와 대학원 공부까지, 엄마, 아내, 그리고 상담사와 심리학도로서의 다중역할을 수행하는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캐나다에서 그토록 애써서 실천했던 가치들에 조금씩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큰 원인은 남편의 직장문화였다. 회식이 업무의 연장인 직장문화 속에서 남편에게 집은 숙소가 되어갔다. 캐나다에서 아이의 방과 후 스케줄에 함께 했던 남편은 저녁에 돌아와 아이가 없으면 “오늘은 우리 아들 어디 가는 날이야?”를 연신 물어댔다. 귀가가 늦거나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많아진 남편은 다시 예전처럼 아무 곳에나 옷을 던져 놓기 일쑤였다. 

'업무의 연장선'으로 이해되는 한국의 회식문화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다. @unsplash

 나 역시 다시 시작한 일들로 바빴지만, 남편이 가사와 육아에 함께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모든 집안일과 육아는 오롯이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캐나다보다 훨씬 가부장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 동안 잠자코 있었던 ‘내 안의 가부장’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아무 데나 벗어놓은 남편의 옷을 치우라고, 새벽에 좀 더 일찍 일어나 식구들의 옷가지도 챙기고, 식사 준비도 끝내 놓으라고 명령했다. 집에서 일하는 네가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밖에서 일하는 남편은 집에선 쉬게 내버려 두라고 자꾸만 요구했다.  


 오랫동안 내면화되어 있던 ‘내 안의 가부장’의 요구를 따르기 시작한다면, 지난 2년 간 실천해왔던 평등한 관계를 위한 노력들은 한순간이 무너질 터였다. 나는 다시금 바싹 긴장했다. 집이 좀 지저분해도, 옷을 정리하거나,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것 같은 남편과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엔 손을 대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낮 시간에도 불필요하게 주방에 있지 않고 나의 공간인 서재에서 일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게 집은 글을 쓰고 상담사례들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는 일터임을 명심했다. 이럴 때마다 내 안의 가부장은 끊임없이 내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유발했지만, 나는 이건 ‘정당한 죄책감이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되새겼다. 


 다행히도 우리 가족은 아직까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캐나다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남편의 가사참여는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아이 역시 스스로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학회나 집단상담을 위해 주말에 종일 집을 비워도, 남편과 아이는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밥도 해 먹고 집안 청소도 하며 제 몫을 잘 해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의 가부장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말에 집을 비우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그리고 이웃들은 내게 말한다. “당신 남편은 정말 대단해. 자긴 복 받은 거야”라고. 


 이럴 때마다 나는 내 안의 가부장에게 이렇게 속삭여준다.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건 절대 미안한 일일 수 없다”라고. 그리고 남편을 추켜세우는 세상에겐 속으로 이렇게 대꾸한다. “대단한 게 아니라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넓은 세상을 경험한 후로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어느 책의 구절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넓은 세상과 다른 예전 같은 환경에서 새롭게 알게 된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결코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아마도 내 마음속에 미안함이 사라지고, 가사를 함께 하는 나의 남편이 ‘평범한 남편’으로 인식될 때까지 나는 이 긴장감을 늦추지 못할 듯하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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