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논바이너리
※ 히라이 켄의 <even if>
“지나가다가 봤는데 궁금해서.”
나지막하고 감미로운 목소리. 하지만 지금 한 말은 거짓일 것이다. 상가 건물 2층에 있는 이 칵테일 바는 그 흔한 입간판도 세우지 않았다. 상호도 칙칙하고 가파른 계단을 반쯤 올라왔을 때에야 겨우 알 수 있었다.
“괜찮은데? 촛불도 진짜 촛불이야. 요즘은 전부 LED잖아.”
잡티 하나 없이 싱그러운 목소리. 온기를 확인하려는 모양인지 손가락이 촛불에 가까워졌다. 따스한 빛이 매끄러운 손등을 얇게 덮었다.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노란 빛을 두르고 다른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사람이 준 건데 어때? 나한테 잘 어울리지 않아?”
“뭔가 허전하네. 에칭이 들어가면 더 좋았겠다.”
“그런가.”
질투 섞인 조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길게 펼친 손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엷고 달콤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괜히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뷔스티에 원피스 차림에 긴 생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마스터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버번이랑, 카시스 소다입니다.”
코스터와 글라스가 맞닿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고마워요.” 목소리만 듣는데도 눈매가 부드럽게 휘는 미소가 눈앞에 그려졌다. 남자는 마스터가 술 장식장 뒤편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버번과 카시스 소다의 위치를 바꿨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 사람’에 대한 자랑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읽던 책을 뒤집어 두고 한 모금 남은 탈리스커를 마저 비웠다. 책장 귀퉁이에 적힌 쪽수는 10분이 넘도록 제자리걸음이다.
빈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에 앉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이만하면 충분히 알았다. 나는 듬직한 체구와 근사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질투심을 숨기는 것이 조금 서툰 남자를 속으로 응원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옆 테이블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온 것이라고는 남성복 쇼핑몰 앱의 푸시 알림이 전부였다.
곁눈질로 시계 분침을 확인하며 남들 몰래 퇴근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연우에게서 웹 사이트 링크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갑자기 유지 보수 요청이 들어와서ㅠㅠㅠ 먼저 가 있으면 안 될까?’
밑에는 대충 그린 듯한 고양이 이모티콘이 두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
눈에 익은 상호.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링크를 클릭하자 미간에 슬쩍 힘이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분침은 12를 가리켰고, 일에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던 직원들이 하나둘 일어나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내부 사진이며 리뷰를 보면 볼수록 못마땅했지만 뾰족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연우가 봐 둔 바는 손님의 첫인상을 보고 어울리는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오마카세 칵테일’로 SNS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그만큼 연우를 만족시킬 만한 곳을 몇 분 내로 찾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버릇처럼 글렌캐런 글라스를 기울이다가 빈 잔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도로 내려놓았다. 마침 연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회사 탈출!’ 하지만 바 근처 역에 있는 가족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다 보면 30분은 족히 지날 것이다. 나는 뒤집어 둔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늦어서 미안!”
딸랑 하는 종소리를 휘덮으며 하이힐 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연우는 엉킨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하며 스툴을 당겨 앉았다. 목 끝까지 여민 퍼 재킷만 봤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허벅지를 절반이나 겨우 가리는 플리츠 스커트 밑으로 20데니어 검정 스타킹으로 감싼 다리가 껑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춥겠다.”
“에이, 다리는 괜찮아.”
연우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메뉴판을 홱 열어젖히고는 ‘오마카세 칵테일’이라는 문구를 가리켰다. 밑에는 ‘칵테일로 그리는 캐리커처’라고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오마카세’라는 단어는 유행을 좇아 부리나케 추가한 것 같았다.
다른 테이블을 치우던 마스터가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오마카세 칵테일 두 잔 주세요!”
“네. 두 분 다 잠깐만 제 쪽을 봐 주시겠어요.”
마스터의 다갈색 눈동자가 나와 연우를 찬찬히 훑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가장하려고 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눈길이 슬그머니 돌아갔다. 이렇게 잠깐 훑어보기만 해서 그 사람의 어디까지 알 수 있다는 걸까. 어떤 칵테일이 나올지 궁금한 것은 연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칵테일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마스터가 연우 앞에 온더락 글라스를 내밀었다. ‘깔루아 밀크인가?’ 하지만 평소 마시던 것과 달리 초콜릿 같은 것이 뿌려져 있었다.
“자바칩을 뿌린 깔루아 밀크입니다.”
“와, 자바칩 뿌린 건 처음 봐!”
“이건 김렛입니다.”
내 앞에는 입구가 넓은 마가리타 글라스가 놓였다. 안개 낀 하늘처럼 뿌연 액체에 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 마스터는 가볍게 눈인사하고는 다른 주문을 받으러 갔다.
“흠, 네가 보기에도 나 약간 그런 느낌이야?”
연우가 잘 다듬은 손톱 끝으로 글라스를 톡톡 두드렸다.
“왜? 깔루아 밀크 맛있잖아.”
“너무 무난하잖아.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는 게 나와야 재밌지.”
연우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입문용 칵테일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1, 2순위로 나오는 깔루아 밀크는 재료가 간단해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애주가치고 가장 좋아하는 술로 깔루아 밀크를 꼽는 사람도 본 적 없었다.
“깔루아 밀크 싫어하는 사람 봤어? 못 봤잖아. 어딜 가나 금방 녹아드는 너랑 잘 맞는 거 같은데?”
“진짜?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기분 확 좋아진다.”
연우는 벌게진 두 뺨을 감싸 쥐었다. “나 그거 무슨 맛인지 궁금해.” 연우는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이 내가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잔을 홱 가져갔다.
“상큼하다! 뭔가 톡 쏘는 느낌? 너 예리하잖아.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나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드라이 진과 라임 시럽과 설탕 시럽을 섞은 김렛은 ‘송곳’이라는 의미처럼 날카로운 산미가 특징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신맛을 꺼리는 나로서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술이었다.
연우가 오기 전까지 나는 탈리스커 18년을 마시고 있었다. 피트 향이 강한 싱글 몰트 위스키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유능한 마스터라면 페니실린 같은 칵테일을 내줬을 것이다. 김렛처럼 들척지근하고 시트러스 향이 강한 칵테일은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스터가 나와 3년 넘게 사귀다 반 년 전에 헤어진 사람이라면 더욱 더.
“아, 전화 또 왔어. 내일 처리하면 된댔는데. 나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연우가 울상을 한 채 나를 쳐다봤다. 나는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손바닥만 한 퀼팅백을 멘 연우가 하이힐 굽 소리와 함께 사라지자 마른 헝겊으로 잔을 닦던 마스터, 혜린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남자도 가능한 줄은 몰랐네.”
테이블의 나뭇결만 세던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시선을 들었다.
“반대겠지. 너나 내가 어떤 성향을 지녔든 간에 세간의 기본 값은 내가 남자를 만나는 거니까.”
“둘 다 그 지랄로 입고 있으면서 기본 값은 무슨.”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김렛이 반 넘게 남은 글라스를 내밀었다.
“돈 더 낼 테니까 글렌알라키 12년 샷으로 줘.”
혜린은 글라스를 집어 들더니 씩 웃었다. 그녀는 립밤 자국이 엷게 남은 자리 위에 입술을 맞추고는 김렛을 길게 들이켰다.
“맛있기만 한데.”
하지만 남은 김렛은 개수대로 부어졌다.
“보드카 마티니 주려다가 참았어.”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아무리 첩보 영화가 취향이 아니라고 해도 이 대사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랬으면 쟤 울었어.”
“호르몬 해?”
“아니.”
“그럼 남자잖아.”
“연우야. 홍연우.”
혜린은 콧방귀를 뀌며 빨대를 꽂은 하이볼 글라스를 내밀었다. 스크루드라이버. 한 잔 더 주문하면 아주 데킬라 선라이즈라도 내주겠다. 아니면 코스모폴리탄?
“악귀 퇴치에 오렌지가 좋다더라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색색의 빨대를 입에 물었다. 새콤달콤한 오렌지 주스가 혀끝을 달래는 사이 강렬한 알코올 향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호불호와 별개로 실력만큼은 흠잡을 나위 없다.
“참고로 나 마가리타도 안 좋아해.”
“어쩌라고.”
“아쉽게도 연우는 여기가 마음에 드는 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