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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의 고독력] #10. 디지털과 도시화

단절의 시대, 연결을 묻다.

by 이시형박사

이 칼럼 시리즈는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 외로움, 관계의 단절, 독립의 역설을 성찰합니다. 과거의 체험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연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색하며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질문을 던집니다.





현대인의 디지털과 도시화 속 고독은 과거의 고독과 성질이 다르다. 예전의 고독이 물리적 거리에 의한 단절이었다면, 지금의 고독은 연결 속에서 생기는 단절이다. 디지털 기기와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접촉’의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지만, 그 접촉은 깊이가 얕고 지속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관계의 질이 떨어지면서 마음의 허기가 커진다. 중국 대학생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SNS 사용 시간이 길수록 외로움 수준이 높아졌으며, 특히 ‘관계 유지’를 목적으로 접속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낀다는 결과가 나왔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과 심리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시화는 또 다른 형태의 고독을 만든다.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심 거주자들이 이웃과 단절되는 ‘군중 속의 고독’이다. 한 국제 비교 연구는 고층 아파트 밀집 지역에 사는 사람이 단독주택 지역 거주자보다 외로움 위험이 14%, 사회적 고립 위험이 30% 높다고 분석했다. 도심에서는 공간이 가까워도 마음의 거리는 멀다. 런던 지역의 한 조사에서도 18~24세 젊은층은 동네 소속감이 낮고 타인에 대한 신뢰 수준이 다른 연령층보다 크게 떨어졌다. 이들은 수백 명의 온라인 친구를 갖고 있지만, 실제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한다.


이런 고독은 심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고독을 흡연이나 비만과 비슷한 수준의 건강 위험 요인으로 보고 있다. 지속적인 사회적 고립은 심혈관 질환, 우울증, 인지 기능 저하의 위험을 높이고, 심지어 조기 사망률을 26%나 증가시킨다는 보고도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외로움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문제를 방치하다가 갑작스럽게 심리적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디지털과 도시가 만든 고독에도 해법은 있다. 최근 여러 연구는 자연환경이 고독 완화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보고한다. 호주에서 진행된 대규모 연구에서는 집 주변 녹지 비율이 30% 이상일 경우 고독 위험이 평균보다 26% 낮아졌다. 혼자 사는 경우에는 그 효과가 52%로 더 컸다. 주 1~2시간만 자연에 노출돼도 고독감이 유의미하게 감소한다는 결과도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반복 확인되고 있다. 자연 속에서 걷거나 햇볕을 받는 단순한 활동이 뇌의 스트레스 반응을 완화시키고, 정서적 안정과 타인과의 교류 의지를 높여준다는 것이다.


한국 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의 1인 가구 비율은 전체의 40%에 육박하고, 65세 이상 고령 1인 가구도 빠르게 늘고 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일부 지자체에서는 ‘마음 편의점’, ‘혼밥 식당 커뮤니티석’ 등 소규모 대면 접촉 공간을 운영한다. 이곳에서는 조용한 사교 활동, 취미 모임, 간단한 상담 등이 이뤄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런 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생활 습관 변화와 더불어 도시 설계, 직장 문화, 디지털 사용 패턴까지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과 도시화가 만든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이는 구조적·환경적 요인 속에서 인간관계의 질이 갉아먹히며 나타나는 복합 문제다. 해결을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뿐 아니라 공동체 차원의 설계가 필요하다. 도시의 녹지 공간 확대,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 건물 설계에서의 교류 공간 확보, 그리고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을 줄이는 실천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스스로도 작은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하루 일정에서 ‘비접속 시간’을 만들고, 얼굴을 보고 대화할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취미 모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질은 달라진다. 스마트폰 화면 속 수백 명의 ‘관계’보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단 몇 명의 사람과의 관계가 고독을 줄이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결국 디지털 시대의 고독은 우리가 선택하는 생활 방식에 따라 병리적인 고독으로 굳어질 수도 있고, 성찰과 성장을 이끄는 건설적인 고독으로 변할 수도 있다. 경쟁과 속도의 도시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접점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그리고 환경을 설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도시와 디지털 환경이 사람을 잊지 않고, 사람을 회복시키는 공간이 될 때 고독은 비로소 인간이 더 단단해지는 발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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