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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May 16. 2023

영화쓰담: 기록하는 사람들 3

편지쓰는 사람들

편지쓰는 사람들

  가끔은 내 마음을 꺼내서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을 꺼내다 앞에 앉혀 두고 통성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너 이름이 뭐니, 하고. 내 마음이 뭔지나 알아야 내 맘대로 살 거니 말리지 말란 노래 가사도 따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이렇듯 내 마음의 이름도 모르는데 남의 마음에 대해서는 오죽할까. 이제 좀 알겠다 싶으면 이놈의 마음들은 나를 약올리듯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꾼다.

  물론 ‘영원한 마음’ 같은 진부한 수사 따위야 믿지 않은지 오래다. 사랑을 비롯한 모든 마음은 움직이는 거다. 암만 새끼 손가락을 세차게 흔들어봐야 변치 않는 영원한 마음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이라는 건 있다고 믿는다. 산발적인 마음의 입자들이 모이고 모여 단단한 덩어리를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고. 언젠간 다 산산이 흩어지고 전혀 다른 마음의 모양을 이룰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큼 분명한 형태를 갖추는 마음들이 있다고 믿는다.

  정성이 담긴 편지라는 건 그런 진심을 떠낸 탁본 같은 게 아닐까. 아무리 투박한 문체라도 진심이 들여다보이는 편지를 읽을 때면 상대를 호명하는 첫 구절부터 목이 메인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상대의 안녕을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런 진심을 이루기까지 소중한 마음들이 차곡차곡 모이던 추억 속의 과거와 상대의 부재를 절감하며 편지를 쓰는 현재, 그리고 아직 찾아오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기에 편지라는, 누군가의 무거운 진심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만한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 각 문장마다 숨겨진 각주의 자리가 있음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일상적인 말의 이면에 응축된 마음의 에너지가 있음을, 순서대로 쓰인 문장의 흐름 사이로 끊임없이 틈입하는 과거와 미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누군가의 편지를 독해하는 일은 영화를 감상하는 일과 닮았다. 영화라는 것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가닿길 바라며 바다에 띄우는 유리병 속 편지 같은 것이 아닐까.

  ‘편지 쓰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상영회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단편을 대상 작품으로 선정하였다. 김희진 감독의 <교환일기>, 안도영 감독의 <없는 이름>, 그리고 양승욱 감독의 <열쇠의 모든 것>. 우리는 4월 22일 상영회에서 이 세 편을 함께 보며 서로 다른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떠나가는 이와 남은 이가 실천하는 편지쓰기에 주목해 보았다.


[사진 1] 관객과의 대화 현장 사진


위로하는 마음

  모든 글쓰기는 대화의 과정이다. 비밀스러운 노트에 적는 일기도 예외는 없다. 빨간펜으로 코멘트를 달아주는 선생님의 존재를 떠올리거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산타 할아버지 같은 존재를 굳이 가정하지 않더라도 일기는 필연적으로 대화의 과정을 내포한다.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그의 저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비밀스러운 노트 속에 글로 대화를 적어 나가며 누군가의 목소리와 접촉한 일화를 소개한다. 그것은 저자 자신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고, 창작자의 스튜디오에 사는 요정 지니어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일기라는 가장 내밀한 기록조차 대화의 과정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영화 <교환일기> 속 도원과 예림은 더 나아가 아예 서로를 향해 일기를 쓴다. 그럼으로써 내밀한 목소리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자리를 서로에게로 확장한다. 나만의 은신처 안에 기꺼이 누군가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참으로 애틋하다.

[사진 2] <교환일기> / 예림의 일기를 읽는 도원 ⓒ 호우주의보

이들이 교환하는 일기를 잘 들여다보면 그 형식과 내용이 편지와 꼭 닮았다. 이들은 일기장 안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는다. 일기가 나의 마음을 돌보는 일이라면, 교환일기 즉, 편지는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둘은 예림이 키우던 거북이 훈이가 사라진 일과 같은 일상의 크고 작은 상실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예림의 마음을 헤아리고 글로써 그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골똘히 고민하는 도원의 얼굴은 관객으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자아낸다.  

  그렇기에 예림이 떠난 동네의 텅 빈 풍경은 더욱 쓸쓸하다. 예림이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원은 자신의 앞을 거세게 통과하는 기차의 속도를 감각한다. 어떤 관계는 이렇듯 갑작스럽게 떠나간다. 이별은 사후적으로 통보되고 일상이 교환되던 통로는 별안간 폐쇄된다. 도원은 예림에게 답장을 쓸 수도, 전화를 걸 수도 없다. (김희진 감독은 도원에게 걸려온 전화 번호가 공중전화 번호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는데, 도원이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옮겨 적었다고 해도, 애초에 도원 쪽에서는 회신할 수 없는 번호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진 3] <교환일기> / 예림의 편지를 읽고 황망히 기찻길 앞에 선 도원 ⓒ 호우주의보


  다만, 도원은 예림이 남긴 편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예림이 부재하는 동네의 풍경 위로 편지의 추신이 오버랩된다. 예림의 편지는 과거의 시점에서 상실의 아픔을 겪을 미래의 도원을 미리 위로한다. 그리고 도원은 가끔 생각나면 선인장에 물을 주라는 예림의 부탁을 실천하며 답장을 대신한다. 이처럼 영화는 남겨진 도원의 시점에서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그린다. 평생동안 쓰기로 한 일기는 결국 한 권을 미처 다 채우지 못했지만, 아쉬운 빈 칸들 너머 마지막 장에는 서로의 진심이 응축된 편지가 남았다. 나 없이도 잘 지내기를 바라는, 그러나 나를 영영 잊지는 말고 종종 생각해주길 소망하는 예림의 편지에는 그들이 주고받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도원은 예림이 남긴 편지를 곱씹는다. 그리고 때로는 생각지못한 상처를 주기도 하는 선인장에게 가끔 생각나면 물을 준다. 그렇게 상실의 허전함을 메우며 도원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성장한다.

  <없는 이름>의 지원은 아영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를 아영의 어머니, 경애에게 대신 전한다.

편지의 작성자는 지원이지만 마치 지원과 경애 모두 공동의 발신자인 것처럼 편지를 읽는 둘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 자리에 남아 너의 이름을 기억하는 내가 있다고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라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제목의 의미를 부연한다. 아영은 더 이상 이들의 곁에 없지만 이름으로 남아 여전히 편지 안에서 호명된다. 불리워지는 이름 안에서 아영은 이들과 함께 하고 그 함께함으로 이들을 위로한다.

  모든 편지는 답장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지원이 경애를 경유해 아영에게 편지를 전달한 순간, 그리고 경애가 지원의 편지를 빌려 아영에게 말을 거는 순간, 아영으로부터 올 수 있는 답장의 수많은 가능성이 이들 앞에 놓인다. 이들의 안녕을 간절히 바라는 아영의 마음은 단 한 번의 편지로 한정되지 않고 이들의 삶 안에서 수없이 회신될 것이다. 그 가능한 답장의 세계 안에서 경애와 지원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사진 4] <없는 이름> / 도로주행시험을 응시하는 경애 ⓒ 호우주의보


  다른 두 작품에 비해 <열쇠의 모든 것>에서 편지 쓰기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스쳐간 모든 인연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녕의 글은 <교환일기>나 <없는 이름>의 편지를 모두 끌어안는다.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고, 모든 계절에는 끝이 있다는 만고의 진리는 화려한 수사 대신 담담한 문장 속에 담긴다. <없는 이름> 속 지원의 편지는 경애의 목소리를 경유해 전달되며 같은 상실을 경험한 두 사람을 연결하고 둘을 같은 문장 위에 위치시킨다. <열쇠의 모든 것> 속 대녕의 편지 역시 민영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 나이도 성별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경계 위의 존재들로써 둘은 잠시 겹쳐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삶의 궤적을 나선형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애써 앞으로 나아간 만큼 원점으로 복귀하는 것 같지만 순환하며 조금씩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대녕과 민영도 그렇게 빙글빙글 앞으로 나아간다.

  상영회 GV에서 한 관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목하며 ‘창밖의 겨울나무를 오랫동안 천천히 클로즈업하는 엔딩은 쓸쓸하면서도, 어쩐지 반드시 찾아올 봄의 나무를 암시하는 것 같아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는 감상을 전했다. 이에 양승욱 감독은 봄이 되어 벚꽃이 핀 모습으로 마무리를 하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답했다. 한참동안 앙상한 마른 가지의 위로도 벚꽃의 흐드러짐을 발견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사진 5] <열쇠의 모든 것> / 창밖 마른 겨울 나무 가지를 비추는 엔딩 ⓒ 퍼니콘


친애하는 이들에게

  편지의 앞 머리에 곧잘 쓰곤 하는 ‘친애하는’이라는 수식어는 일상에서는 잘 쓰이지 않아서 그런가 어딘지 특별하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이라는 사전의 정의를 봐도 ‘사랑’ 두 단어만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진심 어린 편지는 보통 ‘친애하는’ 이들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 발생하기 때문에 더욱 애틋한 것일지 모른다. 그 필연적인 거리가 때로는 우리를 아득하게 만든다. 곧바로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안녕이라는 것. 그러나 수화기 위로 휘발되어 버리지 않고 영원에 가깝게 남는 누군가의 마음이라는 것. 글의 서두에 말했듯 편지의 이런 속성은 영화의 그것과도 닮았다. 그러므로 영화를 쓰는 일만큼이나 영화를 읽는 일도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편지’를 주제로 영화를 고르면서, <편지>나 <러브레터>, <윤희에게> 같은 검증된 텍스트들에 기대려는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생각지 못한 이가 묻는 안부가 큰 위안이 되듯 이 세 단편이 소중한 토요일 오후 상영회를 찾은 관객들에게 뜻밖의 위로가 되길 바랐다. 올해 남은 상영회와 모임에서도 친애하는 이들과 서로 안부를 묻고 위로의 마음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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