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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Nov 29. 2023

관람객의 공간 2 - "유근택: 반영" 리뷰 (2)

전시 안에서 나만의 공간 구축하기

<분수 Fountain>(2023) (출처: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유근택:반영" 리뷰 1에서 계속]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다시 공기가 달라진다. “분수 Fountain”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작품들로부터 선선한 바람과 볼이며 팔, 다리로 튀어오르는 잔물방울이 느껴진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화면을 가르며 수직으로 상승하는 흰 선과 물보라 뒤로 어렴풋 보이는 초록의 배경뿐이지만, 해가 좋은 날 공원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웃음 소리나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시 눈을 붙인 사람들의 실루엣이 액자밖으로 넘실거린다. 극장의 관객이 스크린이나 무대밖의 공간을 상상으로 구성하듯 나는 분수가 있는 공원의 나머지 면적을 자유롭게 꾸민다.

<분수 Fountain>(2023) (김우진 촬영)

  한낮의 분수가 준 기분 좋은 감각은 작가의 어두운 방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따뜻한 해의 기운, 잔바람에 버석거리는 이파리들의 부딪힘 같은 간지러운 감각이 분수와 함께 방 안에 재현된다. 하루종일 방방이를 타고 온 날 밤, 하늘로 날아오르던 순간을 다리가 여전히 기억하는 것처럼 분수는 공원을 벗어나서도 선명한 감각으로서 방 안에 솟아오른다. 동시에 이전에 내가 경험하고 감각한 분수에 대한 기억도 전시 공간 안에 솟구친다. 작품 속 분수가 있는 공원은 나의 경험을 경유해 감각 가능한 공간이 된다.

<반영 Reflection>(2023) (출처: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그렇게 분수의 감각에 흠뻑 젖은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지막 전시 공간인 2층으로 향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그 사이 잊고 있던 표제작 <반영 Reflection>이 관람객을 환하게 맞이한다. 선명한 노란색은 봄 같기도 하고 달 같기도 하다. 건물 외벽에서 해당 작품이 담긴 홍보물을 발견했을 때 그랬듯 노란 색감이 발산하는 강렬한 에너지는 단숨에 나를 사로잡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며 잠시 현실로 복귀했던 나는 덕분에 다시 완전한 몰입의 상태로 빠져 든다.

<반영 Refliction>(2023) 일부 (김우진 촬영)

  작품을 천천히 바라보면 가운데 선 인물과 그에게서 발생한 두 가지 형태의 ‘반영’이 눈에 들어온다. 반영은 두 방향으로 일렁인다. 우선 나무가 거꾸로 자라는 노란 호수 위로 하얀 반영이 뻗어 나간다. 원본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하얀 반영에게서는 분명한 운동성이 느껴진다. 하얀 반영은 원본의 크기를 뛰어넘어 화면 하단으로 계속해서 자라난다. 이에 반해 현실의 나무 쪽으로 몸을 돌린 검은 반영은 소극적이다. 거침 없는 하얀 반영의 행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서로 다른 형태의 두 반영은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도 보인다. 그렇게 두 가지 반영이 생성되는 시간의 흐름 한 가운데에 선 인물의 얼굴은 텅 비어있다. 수면 위 반사된 실루엣이나 그림자에게도 당연히 얼굴은 없다. 인물은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림 속으로 들어갈 듯 한껏 몸을 내밀어 작품을 보던 나는 잠시 텅 빈 얼굴을 내 얼굴로 대체해 본다. 커다란 치즈 같은 노란 호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작가의 자기 반영이었을 <반영>은 이제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나의 ‘반영’이 된다.

<세상의 시작Spring - Beginning of the World>(2023) (출처: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2층의 전시 공간은 1층과 지하1층에 비해 다채롭다. 다양한 색감과 형태가 슬슬 피로해지는 관람 과정에 생기를 북돋는다. <세상의 시작Spring - Beginning of the World>(2023)이라는 제목의 세 작품은 숨은 그림 찾기와 틀린 그림 찾기가 모두 가능한 숨 고르기 포인트이다. 무정형의 사물들은 질서 없이 제멋대로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이들이 형성하는 나선 모양을 따라 시선을 회오리치면서 정지된 무질서 안에서 내 나름의 움직이는 질서를 만들어 보는 일도 재미있다. 가만히 있는 사물들로부터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용돌이의 움직임을 상상하면 평면의 그림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잠재한 역동으로 변화한다. 그러고 보면 제목의 ‘Spring’은 새로운 시작점인 ‘봄’이면서 동시에 용수철이나 태엽 모양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순환과 나아감을 모두 내포한 형태로서 나선형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Spring’은 이 작품의 제목으로 그야말로 손색이 없다.

<반영 Reflection> (김우진 촬영)

  이어지는 <말하는 정원 Speaking Garden>(2019-2020)의 세 작품이나 계절에 따라 변하는 공원이라는 공간과 그 변화 속에 선 ‘나’의 반영을 보여주는 <반영 Reflection>의 네 작품도 역시 인상적이다. "저의 그림이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면 좋겠어요. 그것이 어떤 하나의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그 공간 안에서 전혀 다른 체험을 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가 그려낸 공간들은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감각을 전달하고 화면 밖으로 공간을 확장한다. (갤러리 현대에서 진행 중인 “유근택: 반영” 전시는 오는 12월 3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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