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없는 여행자: 숙소편
여행이란, 낯선 방에서 잠드는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낯선 천장에 떠나왔음을 실감한다. 20대에는 숙소는 눈감으면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조건 싼 곳에서만 묵었다. 돈은 없고, 여행은 하고 싶었던 대학생의 자기합리화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첫 배낭여행은 스무 살,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작되었다. 첫 숙소조차 예약하지 않는 용감함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가려고 생각해 둔 숙소는 있었다. 그래서 공항의 호객꾼들을 물리치고 버스를 탔다. 저렴하고 위치가 좋다고 가이드북에 소개되어 있던 숙소에 도착해서 가장 싼 방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한 뼘 간격으로 침대가 놓여있는 방에 내 침대 옆에는 수염 난 아랍 아저씨가 누워있었다. 여행초보자였던 나에게 너무 높은 난이도의 방이었다. (그 후로 많은 도미토리에서 묵었지만 가드도 없는 침대가 그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결국 나는 도미토리에서 자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더 비싼 싱글룸을 잡았다. 비록 첫 도미토리 도전은 실패였지만 나는 곧 싸구려 방에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해지다 못해 그 방들을 사랑했다. 몇천 원으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숙소를 전전하다 침대 벼룩에 물리고 나서, 나도 드디어 진짜 배낭여행자가 되었다고 뿌듯해하기까지 했었으니깐.
나의 도미토리 사랑에 위기도 있었다. 이집트 후르가다의 어느 일요일, 모든 환전소가 문을 닫아 힐튼호텔로 환전을 하러 갔다. 커다란 통유리 창 너머로 펼쳐진 프라이빗 비치를 바라보며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눈부시게 밝았던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삐걱거리는 2층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나와 같은 도시에 있었지만 다른 곳을 여행 중이었다. 다른 여행에 대한 궁금증 혹은 로망도 생겼지만 바로 숙소를 옮기지는 못했다. 여행은 길었지만 예산은 충분하지 않았기에 저렴한 잠자리를 찾는 능력치만 높아져 갔다.
회사원이 된 직후, 친구들과 떠난 홍콩여행에서 내가 자랑스럽게 예약한 숙소는 청킹맨션이었다. 청킹맨션은 영화 <중경삼림>의 촬영지였지만 1994년 작품인 영화 속에서도 이미 낡은 건물이었다. 위치는 좋았지만 번화가 속 슬램 같은 느낌이랄까? 홍콩에 가본 적이 있다면 구룡반도의 화려한 거리에서 흑인들이 짝퉁 시계를 주렁주렁 걸고 한국어로 “시계?”하고 묻다가 숨어드는 그 쓰려져가는 건물이 바로 청킹맨션이다. 건물 앞에 도착해서 “우리 숙소 다왔다”라고 말하는 나에게 친구는 진지하게 “장난치지마”라고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장난이 아니었고, 우리는 그 건물에서 며칠을 묵었다. (최근에 이 청킹맨션은 tvN <짠내투어>에서 징벌방으로 나오기도 했다. 내 친구들은 나를 친구로 둔 죄로 징벌방에 묵었던 것이다.)
싼 숙소를 찾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나였지만 엄마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면서 차마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환갑이 다 된 엄마를 혼숙 도미토리에서 모르는 남자와 잠들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트윈룸 중에서 제일 싼 숙소를 고르던 중에 스위스 리기산 온천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매번 저렴한 숙소만 이용하던 나였지만 엄마의 오십견을 핑계로 온천 호텔을 예약했다.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탄 후, 다시 산악 열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그 호텔은 알프스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며 노천 온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같이 간 엄마는 어깨에 온천물을 맞으며 즐거워했고, 새벽부터 일출을 보겠다고 나를 끌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산에 있는 호텔을 만끽했다. 눈감으면 모든 숙소가 똑같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 호텔은 눈뜨고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호텔에 매력에 눈떴지만 도미토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특히 혼자 떠난 여행이라면 더 그렇다. 2층 침대에서 벗어나 공용공간에 앉아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어디서 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서로 묻다가 누군가는 트럼프 카드를 가져오고, 비슷하지만 다른 룰로 진행되는 전 세계의 카드 게임을 배우다 보면 혼자 하는 여행도 심심할 틈이 없다. 이제 호텔의 즐거움도 안다. 베개 메뉴판까지 구비된 호텔에서 항상 이런 곳에 왔던 것처럼 럭셔리한 기분을 즐긴다. 조식 레스토랑에서 오래 머물며 크루아상에 커피로 한 번, 오믈렛에 팬케이크로 한 번, 마지막으로 국수에 만두까지 섭렵하고 나면 하루 종일 걸어도 든든하다. 도미토리와 호텔의 즐거움 중 하나만 고르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여행에도 싼 숙소와 비싼 숙소를 섞는다. 애매한 금액의 숙소에 머무르기보다 도미토리와 특급호텔을 오가며 극명한 차이가 주는 즐거움을 극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