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주는 사람들이 늘 곁에 있다는 게 행복하다. 서로의 집의 개수까지 알 정도로 친한 친구들이 넷이다. 자식 얘기부터 시작해 남편 얘기, 서로의 고민 등 등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놀랍게도 ‘소아과 친구들’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소아과에서 만난 인연들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 몰랐다. 그중 둘은 중학교 동창이다. 동네에 사소한 일들을 함께할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
선물을 받았습니다. 김장김치입니다. 겨울을 이겨낼 아삭아삭 배추김치입니다. 따끈한 고구마에도 얹어먹고 하얀 쌀밥에도 함께 먹는 올겨울 이겨낼 훈훈한 선물입니다. 순남이 언니가 시골에서 만들어왔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식당을 했었지만, 덤으로 손맛도 얻었답니다.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아봤습니다. ‘사랑의 편지’ 게재를 축하한 딸의 꽃선물, 생일날 받은 달달한 과일 생크림 케이크를 준 예비사위의 사랑,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둘째 딸아이가 용돈모아 선물한 원목 독서받침대. 모두 다 기억에 남습니다.
‘좋은 선물은 어떤 선물일까’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주고 싶은 선물이 아니라 상대방이 받고 싶은 선물을 주는 것이랍니다.
나에게 좋은 선물은 별일 아닌 날에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받는 것입니다. 생일도 아닌 날에, 각별한 정을 나눈 사이도 아닌, 목적 없는 순수한 선물에 온정을 느낍니다.
순남이 언니의 김치 선물 덕분에 올 겨울도 따뜻하게 보냅니다. (여비 브런치 “겨울 선물” 중 발췌)
얼마 전 원래 계시던 목사님이 은퇴하며 교회를 옮겼다.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만난 권사님과는 아침저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사소하게 안부를 물을 수 있어 좋다.
최근에는 큰딸의 결혼 소식이 가장 행복했다. 처음에는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못내 아쉬워만 하던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남자를 데려왔다. 요즘은 예비 사위와 식사를 함께하기도 한다. 서로의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면 딸이 어느새 다 커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는 게 대견스럽기도 하다.
<<<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나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한강변을 걷다 뛰다 하는 것을 좋아한다. 촉촉한 향기가 물 냄새를 머금고 내 볼과 코 끝에 스치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창조주의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이슬 먹은 풀을 밟는 것을 좋아한다. 발 끝에 닿는 땅의 기운은 내가 살아 움직이며 생산성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 같아 두 다리에 힘이 주어진다.
나는 햇빛의 반사되어 색색의 태양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강변에 찰싹거리는 너울 빛이 이쪽저쪽으로 흩어지면 나의 두 눈은 빛을 쫓아 이리저리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한다
나는 쪽빛의 가을 하늘을 좋아한다. 하늘 위에 잿빛구름들이 흰 구름들 곁에 어우러져있고 흰 구름은 마치 제왕처럼 몸을 늘이고 앉아있다.
나는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제길을 아는 양 일정하게 흘러가는 순리가 우리네 사는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결국엔 죽음으로 간다는 것 같은 명제이다. 잔잔하게 소리 없이 정지된 것 같지만 고요 속에 행동이 있어 물결을 이루니 율동적이라 좋다.
식구들의 먹을 것을 장만하는 내 두 손을 좋아한다. 도마질 소리가 신나게 날 것이다. 식구의 입 속에 움직임이 사랑이다. 식구가 나를 힘나게 해 주어 일상의 고단함을 뛰어넘을 수 있어 더욱 좋다.
내 손으로 장만한 집이 좋다. 1층엔 음향기기를 배경으로 청음실이 어우러진 갤러리이다. 2층엔 나만을 위한 서재가 너무 크지도 않게 책동산을 만들었다. 나를 부르는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 부엌에서의 가사를 멈추는 방, 고요 속으로 몰입하고 침잠할 수 있는 방,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방, 그리고 “쓰기”로 생각을 풀어내는 방이다. 돌아보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추억 속에서 되새겨보기, 아픈 상처, 분노, 슬픔, 상실의 쓰다듬기, 그 놀이터에 모두 풀어버리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다. 마당가에 조롱한 화초들이 웃고 손바닥만 한 텃밭엔 서너 장의 깻잎과 두서너 포기의 상추가 자라나는 나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