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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어머니 이야기 2

계속 됩니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쓰다보니, 마치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것 처럼 뭐가 튀어 나올 지 나도 모르겠다.

다만 한 번은 쓰고 넘어가야지 내 마음이 정리가 될 것 같고 어머니의 생애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죄로 어머니의 지나간 행적들에 대해서 대리인을 내세울수도 없이 온전히 들어줘야 되는 남편도 이제 그만 놓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 적어도 일타쌍피 정도는 되는 시어머니 이야기는 안 쓰는 것 보다 쓰는 것이 훨씬 이익이다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쓰고 싶은 만큼 쓴 후에 정리할 생각이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어머니.

내가 우리 어머니에 대해서 처음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누가 처음부터 시댁 식구들을 미워할 작정으로 결혼을 하겠는가. 그런 마음이라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지 결혼하면서 새로운 입양가족이 생기는데 받아들일 마음없이 결혼한다는 것은 나도 불행 너도 불행 불행의 급행열차 티켓을 끊은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는 처음부터 어머니에 대해서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쉰 일곱이 되고 보니 결혼하던 내 나이 스물 일곱이면 아직 제대로 누굴 미워할 줄도 모르는 나이이다.

제대로 울 일이 있어 본 적도 없었던 나이에 결혼을 해서 갑자기 넓어진 가족관계와 인간관계에 대해서 혼돈의 카오스가 왔지만 그것도 노력하고 극복하면 되는 건 줄 알았다.

노노, 결혼생활은 절대 그런게 아니라는걸 94년 4월 3일에 결혼하고 두 달도 안돼서 알게 된 것 같다.


남편도 한 몫 하긴 했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고 자랐던 남편에게 자아란 없었다.

자아: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

부모님의 착실한 장남이었으며 아니오 싫어요 소리는 본적이 없었음이 분명한 남편은 직장에 취직하면서 맡겨두었던 통장을 결혼하면서 당연히 찾아와야 되는 것도 어머니가 서운해 있다며 달의 유예기간을 두고 찾아왔으며 어머니가 하는 말에 토를 다는 법이 없었다. 싫어요는 다른 나라 말이었고, 안돼요는 우리말에 없는 단어였다. 적어도 1994년부터 1996년까지는 그랬다.



시어머니는 쉰 여섯에 나를 며느리로 보셨다. 지금 내 나이보다 한 살 어린 나이인데 스물 일곱이었던 나는 그때 시어머니가 굉장히 나이든 할머니인줄 알았다.

딸 처럼 생각할게유는 잊어버리신건지 어머니는 혼수가 들어오는 날부터 톡톡히 시어머니 노릇을 하셨다.

아파트에 혼수가 들어오는 날 어머니는 와 계셨고 파스텔톤이었던 침대 이불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색깔 타령을 하셨고 장롱의 문짝 색깔이 바랜것 같다고도 하셨다.


어머니가 덮고 잘 것도 아닌데 왜 그러셨는지 그때는 묻지도 못했다. 다만 기분만 나빴을 뿐!!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어머니의 마음은 이랬던것같다.

남편은 1994년 결혼하면서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가지고 있었는데 새 아파트에 맞게 혼수를 제대로 채우기를 원했던 우리 어머니의 마음에 내가 해 간 가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것같고 강렬한 색깔을 좋아하는 본인 취향에 파스텔톤 가구며 이불은 색이 바랜 것 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한테만 싫은 소리를 참지 않고 한 것은 아니었다. 대상은 때때로 우리 엄마에게도 향했으니 우리 엄마의 분노게이지가 최대치를 찍었던 것은 집들이 준비하는 날 일어났다.

집에서 준비해서 치렀던 집들이 준비에서 시어머니 친정 엄마 두 분 다 도와주겠다고 오셨으면 두 분 다 공평하게 일을 했으면 되었으나 엄마는 도우미 아줌마처럼 일 하실 때 시어머니는 옆에서 음식 간이나 보면서 앉아 계셨다. 

그리고 열심히 일 하시는 우리 엄마 심심하실까봐 한 말씀 하신다는게 우리 엄마의 분노 게이지에 불을 붙인 것이다.


시어머니 : '사둔 닮아서 딸 낳으면 어쩔까 걱정이되네요'

엄마: ...


나는 두 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들었어도 뭐라고 말도 못 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에게 말대답을 한 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족 묘지를 거부했습니다' 편에서 어머니에게 호기롭게 대들었던 '저는 거기 함께 묻히기 싫어요'라고 했던 당당하고 싸가지없는 모습의 나는 결혼하고 삼십년이 지난 다음에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처음부터 내가 싸가지없는 며느리는 아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둔닮아 딸 낳으면...' 소리는 집들이 준비로 도우미처럼 일하고 친정으로 돌아가는 우리 아버지 낡은 차 '프레스토'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터져서 엄마는 울고 갔다는 이야기를 스물 일곱 새 댁은 집들이 후에 듣게 되었고 우리 어머니가 좀 이상하신 분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던 첫 번 째 사건이 되었고 우리 엄마가 아직도 우리 어머니에 대해서 부들부들 떨면서 이야기 하는 주제 중 넘버 원이 되었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 우리 엄마한테 사과하셔야겠습니다.

이런 것 까지 쓸 줄은 몰랐는데 판도라의 상자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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