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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째야 되나,

튀어나오는 등장 인물들, 다시 덮겠습니다.

네, 네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덮기로 했습니다. 시아버지에게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시어머니 시리즈로 넘어 간 주제는 결혼 생활로 이어지더니,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렇게 많이 튀어 나올 일인가 싶습니다. 


남편은 어떻게 어떻게 고쳐서 살았습니다. 남편이 변하게 된 첫번째 계기는 타 지역으로의 발령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 단위를 벗어나서 시댁의 영향권을 벗어난 지역으로의 이사는 새 공기를 마시는 것 처럼 신선했고 점점 시댁으로부터 더 머얼리 발령이 나서 결국 제주도까지 발령이 났던 남편의 직장은 제게는 감사 또 감사 그 자체였습니다.


어디로 이사를 가나 이사하는 날 솥단지를 끌어 안고 따라가시고자 하셨던 시어머니는 제주도 이사는 함께 하지 못하셨습니다. 

빌런이라 생각했던 시누이가 '엄마, 제주도까지 뭐하러 따라갈려고 그래' 말려준 덕분에 한 때는 호흡곤란의 원인제공자였던 시누가 제주도 이사편에서는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어서 그나마 시누 덕분에 어머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이사를 함께 가는 상황은 되지 않았고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다리가 없었으니 자동차로 다닐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은 특별한 자유와 행복을 주었습니다.

 왜 큰 며느리들이 이민을 가고 싶어하는지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일본도 고부갈등이나 시댁과의 관계가 편한 나라는 아닙니다. 

일본 뉴스에서 오봉(おぼん [御盆]) 우리나라 추석 쯤에 해당되는 일본 명절)등에 신칸센이나 비행기로 부모님 댁에 다녀 오는 귀성객들의 뉴스는 항상 나오는 고정 뉴스입니다.


2018년 빵집 아줌마들이 오봉에 명절 보내러 가느라 빵집 일손 대란이 일어났을 때 나와 키타무라 상은 오봉 연휴동안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오봉 기간동안 알바 쉬프트를 짜는 데 키타무라가 자기는 계속 나올 수 있다길래 내가 물었습니다.

나 : "키타무라, 오봉에 시댁 안가요?"

키타무라 : "리꼰 시마시따" - 이혼했습니다. 

그리하여 2018년 교토 보로니아 빵집 오봉 기간 동안 전국으로 보내졌던 식빵은 키타무라와 내가 다 했을겁니다. 라쿠텐에서 팔렸던 보로니아의 빵들은 오키나와부터 홋카이도까지 전국으로 팔려 나갔고 홋카이도의 어느 집에서는 나와 키타무라가 썰고 포장했던 빵들을 먹었을겁니다.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요?

이 식빵이 한국에서 혼자 와 있던 아줌마와 오봉 기간 동안 시댁에 가지 않았도 되는 일본 아줌마 둘의 작품이었던다는것을요.


오봉이 끝나고 맥도날드 사거리에 있던 중앙 상호 신용 금고에서 월급이 들어 오는 말일 아침, 통장 정리를 끝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본 일본 급여 통장에 엔의 앞자리가 달라져 있어서 학교 가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사서 들고 가던 사치를 부리던 교토의 아침 등굣길이 생각납니다.



큰 아이 세 살 때 남편은 첫 직장에서 첫 발령이 났고 나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살고 있던 지역의 도 단위를 벗어난 지역이었습니다. 분양남의 자부심을 주었던 새 아파트를 저는 과감히 팔아 버렸습니다.

분양은 남편이 받고 팔기는 제가 팔아 버렸으니 어지간해서는 다시 돌아 오고 싶지 않았던가 봅니다.


"차가 막히니 일찍 올라갈게요" 소리, 나도 한 번 해보자 했으나 차가 막힌다는 표현을 쓰는 것 까지는 양심상 꺼려지는 거리였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도가 달라지는 이사였으니 30년 넘게 부모 옆에서 착실한 장남으로 살았던 남편에게는 그때의 이사가 탯줄을 끊어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으로도 출생으로도 끊어내지 못 했던 탯줄을 제 식구 데리고 도를 넘어 이사 한 번 하는 걸로 남편은 끊어냈습니다. 자식이 하나 둘 태어나면서 셋까지 낳았을 때는 과감하게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기까지 했으니

휴가 때 함께 놀러 가게 일찍 일어나서 시댁에 오라는 어머님의 말씀에 "우리 애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일찍 가기 힘드니 함께 못 가겠어요" 반역의 깃발을 들기도 했으니 그 무렵 남편은 어머니가 5년동안 통근도 했으니 아침에 가라고 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잡혀있던 볼모같은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서서히 남의 편에서 내 편으로 돌아 온 남편은 육아에 헌신적이었으며 내가 힘들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물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글에는 쓰질 못했으나 처음부터 빌런이었으나 막장처럼 본색을 드러냈던 인물도 있었고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었을만큼 힘들었던 사건도 있었지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이만하면 괜찮은거아닌가 싶은 평화의 길을 걷고 있는 중입니다.


시댁 가족들과 사는 게 아니라 남편이랑 살 날이 훨씬 더 많으니 번호표 뽑고 튀어 나오려고 하는 대기자들을 상자 안으로 밀어 넣어야겠습니다.

네, 네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덮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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