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엄마와 쫄면

1986년 고 3이었을 때, 토요일까지도 학교 자율학습이 있었고 점심 도시락은 집에서 가져다 주는 걸 먹었다. 아침에 들고 나와도 됐을텐데 엄마는 동생 시켜서 도시락을 들려 보냈고 나의 도시락은 특별했다.

걸어서 학교까지 삼십분이었고 교문까지는 언덕길이어서 3년을 다니면 다리가 굵어진다는 여고였지만 바로 아래 순둥이 여동생은 토요일 오후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들고 항상 교실 앞에서 주고 갔다.

그런 도시락을 먹어 놓어놓고 학력고사 점수는 밥 값만도 못 하게 봤다. 퉤퉤퉤!!!


주중에 엄마가 싸던 도시락도 우리 형제가 다섯이라 갯수가 만만치 않았는데 큰집 오빠가 우리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엄마의 도시락 갯수는 확 늘어버렸다.


시골에 살 던 큰 엄마가  동네 사람들이랑 제주도 여행 다녀오는 동안만, 큰 집 막내 오빠를 우리집에서 학교 다니게 해주라는 부탁을 했고 엄마는 형님 말씀 거스를 수 없어서 "알겠어요. 형님" 하고 받아 준 큰 집 막내 오빠는 큰 엄마가 제주도 여행을 다녀 온 사흘 뒤에도 우리집에 계속 있었고 엄마 인생에 지금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는 사건이 되었다.


"큰엄마의 제주도 여행으로 인한 큰 집 막내 오빠의 우리집 눌러앉음 사건"은 엄마가 아침마다 싸야 되는 도시락의 갯수가 더 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엄마가 아침마다 싸던 도시락은  밑에서부터 쌓아 올리면 30센티쯤 되었을거다.


내 친구네는 다방을 했는데 그 애의 반찬은 계란 흰자로 만든 달걀말이 반찬이 거의 빠짐없이 반찬통에 들어 있었다. 노른자는 쌍화차에 동동 띄우고 남은 흰 자로는 도시락 반찬해서 주는 거라며 투덜거렸지만 흰자만 가지고 만든 계란말이래도 그 애 반찬이 훨씬 내 거보다 나았고 1980년대 중 반에 군산에 살던 여학생들이 입지 못 해 안달이 났던 페페로네 티셔츠와 그린 에이지 블라우스를 다방 집 딸내미 내 친구는 입고 다녔다.


다방 집 딸내미 내 친구는 형제가 많지 않았고 딸린 사촌 오빠도 없었으니, 그 애와 나의 도시락 반찬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나마 페페로네 여름 티셔츠와 프로 스펙스 가방 정도를 가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허세에 묻어 간 덕택이지만 그린에이지 블라우스는 그 시절 넘사벽이었다.

학교에서 어깨에 뽕깨나 잡던 애들이라면 다들 입고 있었던 그린에이지 블라우스와 체크 치마

그린에이지 씨엠송도 생각난다.

비틀즈도 베토벤도 모두 좋지만 언제나 푸른 꿈이 피어 나는 교실 그린에이지

어떻게든 엄마를 정신못차리게 졸라서  그린에이지까지는 들어갔지만 블라우스 한 장에 만 구천원이라는 소리에 너무 비싸다며 엄마가 소리를 지르고 나갈 때 죽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다.

다행이다.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고 월급이 별게 없었으니 도시락 여섯개에 오뎅 반찬 넣어주는 일도 엄마는 큰 맘 먹어야 되는 일이었을것이다. 평일 도시락 반찬에 기대치가 있을 수가 없었지만 음식 솜씨가 있는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른지 엄마는 돈까스도 직접 고기 사다 두드려서 만들어 주셨고 맛 없는 복숭아는 설탕 넣고 끓여서 냉장고에 차갑게 두고 먹을 수 있게 해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먹는 귀신들이었으므로 엄마의 의도와 다르게 스텐 밥그릇에 막 끓인 뜨거운 복숭아를 경쟁하듯이 먹었다. 차갑게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내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풍철에는 소풍 가는 사람만 김밥 도시락이고 나머지는 엄마가 단무지까지 잘게 썰어서 볶음밥을 만들어 주셨다. 단무지가 씹히던 엄마의 김밥 짜투리 볶음밥은 맛있었고 계란 흰자 계란말이에 결코 밀리지 않는맛과 비주얼이었지만 소풍은 일 년에 두 번이고 엄마의 반찬은 늘 거기서 거기, 돌려 막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고 3이 되고 토요일 날 점심으로 받는 도시락은 정말 특별했다. 엄마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싸서 보내준 도시락이었고 평일 도시락과 다른 메뉴들이었다. 한 개만 싸도 되는 도시락이어서 그랬을까, 진주 소세지도 가끔 들어가 있었고 당당하게 펼쳐놓고 먹을 수 있는 도시락 반찬들이었는데 어느 날 정말 특별한 도시락을 엄마가 직접 들고 왔다.


바로 쫄면이었다. 그무렵 1980년대 중반에 우리 또래 핫한 음식은 쫄면이었다. 군산이 고향이지만 그 당시 우리들은 이성당보다 쫄면에 미쳐 있었다. 엄마, 무슨 면이 아주 질긴데 그게 그렇게 맛있어, 나는 엄마한테 딱 한마디했을 뿐이고 지금처럼 식재료가 흔하게 슈퍼에서 팔 던 시절이 아니었던 때 엄마는 쫄면 다발을 시장도 아니고 도매상 같은 가정집에서 사 오셨다.


그리고 그걸 엄마는 내가 말하는 맛대로 만들어냈고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태풍이 불어도 우산 한 번 갖다 주지 않았던 엄마가 토요일 오후 동생 대신 쫄면이 가득 담긴 스텐 양푼을 보자기에 싸서 학교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어지간하면 학교에 안 오는 엄마, 그런 우리 엄마가 도시락을 들고 3학년 6반 교실 앞에서 나를 불렀다.

그것만해도 놀랄 일인데 엄마의 도시락은 쫄면이었다.

엄마가 쫄면이라고 말을 하지 않고 건네서 그냥 도시락인줄 알고 보자기를 풀렀는데 세상에 쫄면이 한찬합 가득 비벼져서 있는 거였다.


찬합 뚜껑을 열고 "와 쫄면이다" 하자 젓가락을 들고 개떼처럼 우리반 애들이 달려들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돌아가던 엄마는 나는 먹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애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쫄면 다발을 봤을 뿐이다. 그리고 놀래셨다.


아직도 가끔 이야기하신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광경은 처음 보셨다고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젓가락으로 마구 퍼가던 쫄면  대 환장 파티. 나는 젓가락도 먹고 엄마의 쫄면은 사라졌다.


끝내 그린에이지 블라우스는 못 입어 보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엄마가 그린에이지 블라우스를 사주지 않아서 섭섭했고 비 오는 날 우산 한 번 들고 오지 않아 서운했어도 1986년 고 3이었을 때 쫄면 한 찬합 들고 학교까지 온 걸 생각하면 그럭저럭 서운함도 풀린다.

하지만 그런 도시락을 먹었어도 학력고사 점수는 밥 값만도 못 하게 봤다니 퉤퉤퉤!!!


작가의 이전글 엄마와 오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