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번째 막내 : 방송작가 박설아

‘너는 노력, 성실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열의인데 그게 없어서 아쉬워’

by 강이슬

첫 번째 막내 간단 프로필

이름 : 박설아 (가명)

나이 : 20대 중반

직업 : 방송작가

막내 경력 : 2년



설아와 우리 집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겨 과자 한 봉지에 소주를 깠다.

막내작가 인터뷰를 하겠다고 후배를 앞에 앉혀놓고는 나 혼자서만 소주를 두 병 정도 마신 참이었다.

설아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맥주 한 캔을 아까부터 홀짝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약간 맛탱이가 가 있었고, 설아는 아주 멀쩡했다.


그래서, 네가 몇 년차라고?

언니, 저 2년 차요.


나랑 알며 지내는 동안 열 번은 더 한 얘기였지만 설아는 처음 말해주었을 때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설아는 정말 최고의 후배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2년 차 막내작가 설아의 1년 차 막내 시절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설아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했다.

본인의 능력으로는 해 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설아를 보며 몰래 안도했다. ‘살아남았구나’

이 가난하고 지독한 세계를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간 여럿의 동기들과 후배들이 머리를 스쳤다.

야 네가 그만두긴 왜 그만둬, 나는 너처럼 일 잘하고 성격 좋은 막내를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조금 취하긴 했지만 나의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혀 끝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런데 그때는 몸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어요.

거의 모든 막내작가들처럼 설아도 출근시간은 있으나 퇴근시간은 없는 생활을 했다.

설아가 그때 혼자서 해야 했던 일은,

촬영 장소 섭외 (촬영 나가기 전 구청 등 여러 기관에서 촬영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이템 정리 (촬영 컨셉, 섭외 연예인 추천 등. 회의에 필요한 자료들을 서치 하거나 머리에서 짜내는 일),

회의록 정리(4,5시간에 걸친 회의 내용을 빠짐없이 정리하는 일),

연예인 자료조사 (해당 회차에 섭외할 연예인의 자료조사로 a4용지로 50 -100장 정도의 분량),

섭외 리스트 정리 및 연예인 번호 수배 (섭외 회의 당시 리스트업 된 연예인의 담당 매니저 연락처를 따는 일)

소품 체크 (촬영 당일 쓰일 소품이 제대로 준비되었는지 확인하는 일),

선배 작가 대본 작업 서포트 (자료 팩트체크, 검색 등 선배가 필요할 때마다 즉각 대답해야 하므로 항시 대기),

대본 오탈자 검수, 출연자 촬영 안내, 회의 자료 오탈자 검수 및 인쇄 등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퇴근도 못 했는데 어느새 출근 시간인 날들의 연속이었다.

막내는 설아 혼자였지만 제작진이 두 팀으로 움직이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설아는 혼자서 두 팀의 서포트를 해야 했다.


A팀의 자료를 준비할 때면 B팀의 선배들은 왜 방금 시킨 일을 빨리 시작하지 않느냐고 닦달했고,

B팀의 자료를 준비할 때면 반대로 A팀 선배들에게 욕을 먹었다.

몸이 녹아나도록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답답하다는 잔소리와 구박뿐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무척 속상하고 어이가 없어서 울컥울컥 욕이 튀어나왔다.


아니 씨발 그걸 너 혼자 어떻게 해! 말이 되냐?

그때는 매일이 멘붕이었어요, 일은 너무 많고, 실수하니까 매일 혼나고.


하필 프로그램의 시청률 성적도 좋지 않았다.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제작진들은 시청률 압박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날카로워져 갔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막내에게 내려왔다.

잘한 일에 대해서 칭찬은 듣지 못했지만 어쩌다 한 실수에 대해선 필요 이상의 모욕적인 꾸지람을 들었다.

나도 겪어봐서 아는 일이었다. 매일매일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출근해 선배들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선배들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커피라도 잘 못 사갔다가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기 일쑤였다.

제 아무리 씩씩한 사람이라도 기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잘 못한 게 없어도 혹여나 잘 못 할까 봐 마음 졸이며 타이트하게 자신을 졸라매도 넘쳐나는 업무에서 한 두 가지 실수는 필연적으로 나왔고, 선배들은 그것을 용납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설아는 취직 전까지 집안에선 효녀, 학교에선 모범생으로 살면서 꾸지람 한 번 들은 적 없었는데

작가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평생 들을 모욕적인 구박은 다 들었다며 푸념했다.


아직도 자신의 작은 실수에 크게 놀라고 필요 이상으로 죄송해하는 그 애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 애의 자신감은 1년 전 그때에 꽁꽁 묶여 아직도 한참 바닥에 메어있는 것 같았다.

그 애의 모습이 짠하고 속상해서 소주 한 잔을 괜히 더 홀짝였다.


너 이렇게 많이 일하고 이렇게 많이 욕먹으면서 그때 얼마 받았니?

주에 30만 원이요.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깊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맞은편에서 설아도 한숨을 쉬었다.


너는 그때 뭐가 제일 힘들었어?

설아는 대답 대신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당시 선배 작가와 일할 때 나누었던 카톡을 보여주었다.

설아는 그 선배 작가가 자신을 정말 싫어했다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설아가 보여준 카톡창을 천천히 내려가며 읽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 선배 작가의 카톡과, 비참하도록 불쌍한 설아의 답장이 오고 가는 카톡창을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작가는 설아의 사소한 실수 (가령 작가들끼리 보는 문서에서 오타가 발견되었다거나 하는) 하나를 꼬투리 잡아 미친 사람처럼 다그쳤다.

그러다가 그 선배 작가가 보낸 한 카톡에 시선이 머물렀다.

설아는 그 카톡을 가리키며, 이 말이 제일 속상했어요. 하고 말했다.


‘너는 노력, 성실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열의인데 그게 없어서 아쉬워’


나는 애꿎은 설아의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아마 더 취했으면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화가 났다. 대관절 어느 정도로 사람이 못 돼 처먹어야지 밤, 낮, 주말 없이 일하는 막내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놈의 열정, 그놈의 열의가 도대체 뭐길래 성실과 노력을 감히 무시할 수 있는 무적의 잣대가 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저는 그리도 열정적이고 열의가 넘쳐서 이렇게 애를 잡았나?

그래 열정적이긴 했다. 타오르는 열정과 열의로 후배를 엿 먹였더라.


무엇보다 나를 화나게 했던 건, 그 선배 작가도 분명히 막내시절을 겪은 기성작가라는 사실이었다.

분명 본인도 가난과 과로 사이에서 샌드위치 되어 힘들었던 적이 있었을 텐데, 어쩜 몇 년 만에 그 사실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건지, 그 작가는 앞장서서 막내 작가의 복지를 지켜주지는 못 할망정 되려 자신이 막내시절 받았던 설움과 스트레스를 설아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제가 퇴사하던 날 그 언니가 했던 말이 잊히질 않아요.

뭐라고 했는데?

언젠가 마주쳐라.

뭐???? 아오 미친년 지가 마주치면 뭐 어쩔 건데!! 뒤로 넘어져도 엉덩이가 찢어져라!


나는 분하고 화가 나서 죽겠는데 설아는 그런 나를 보면서 언니 진정하세요 하면서 웃었다.

순하고 일 잘하는 설아가 이 바닥에서 열심히 버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떠올려보면, 방송계를 떠난 동기 후배들은 하나같이 설아처럼 착실하고 순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착하고 바른 사람들 중 상당수가 또라이들의 등쌀을, 말도 안 되는 과로를, 터무니없는 월급과 그로 인한 비참한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난다. 남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하고 무식하게 버텨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독하고 무식한 선배들을 새로 들어오는 착한 후배들은 견디기 어렵다. 악순환이다.

그러고 보니.. 가만, 동기와 후배들을 떠나보내고 순탄하게 버티고 있는 나는 그렇다면 미친년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안 그러려고 이렇게 팍팍한 막내들의 실태를 글로 쓰고 있다.

나는 미치더라도 정의롭게 미칠 것이다.

미쳐야 살아남는 이 바닥이라면 이왕이면 정의로운 또라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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