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찬양하고 뿌리를 의심해 온 철학

by JuPD

오랫동안 철학은 이성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능력으로 칭송해 왔다.


이성은 빛이었고, 질서였으며,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 표식이었다.

반면 욕망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통제해야 할 충동, 도덕을 위협하는 그림자, 이성을 흐리는 안개.

이성은 하늘을 향했고,
욕망은 땅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꽃은 스스로 피는가?
뿌리를 잘라내고도 꽃이 온전할 수 있는가?



욕망을 제거하지 말고, 이해하라


스피노자는 이 오래된 구도를 뒤집었다.

그는 욕망을 억제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로 보았다.


그가 말한 ‘코나투스(conatus)’는 존재가 스스로를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근원적 노력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기 이전에,
살아 있으려는 힘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지속하려는 신호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욕망을 이해하라고 말했다.


이성은 욕망을 억누르는 채찍이 아니라,
욕망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구조다.



수동적 인간과 능동적 인간


욕망을 억압하면 인간은 고결해지는가?
아니면 더 취약해지는가?


욕망을 외면한 채 도덕을 외치면
우리는 오히려 외부 자극에 쉽게 흔들리는 존재가 된다.
분노, 질투, 공포, 인정욕구.
이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름만 바꾼 채 우리를 지배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수동적 인간과 능동적 인간.


수동적 인간은 욕망에 끌려다닌다.
능동적 인간은 욕망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 힘을 자기 삶의 방향으로 조직한다.


이성은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변환한다.


맹목적 충동을
자기 이해로 바꾸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다.



꽃과 뿌리의 윤리


이성은 꽃이다.
그러나 꽃은 뿌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욕망은 뿌리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지탱한다.


우리는 그동안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뿌리를 의심해 왔다.
욕망을 숨기고, 부끄러워하고, 도려내려 했다.


하지만 뿌리를 잘라내면
꽃도 함께 시든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이성과 욕망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는 통합한다.


욕망을 인정하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
그 힘을 조직하는 것.


그 위에서 피는 이성은
훨씬 단단하고, 훨씬 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욕망을 부정하는 언어 속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비와 경쟁, 인정과 비교의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받는다.


억압과 과잉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방향을 잃는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욕망을 없애는 도덕이 아니라
욕망을 이해하는 철학인지도 모른다.


욕망은 적이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다.


이성은 그것을 부정하는 힘이 아니라,
방향을 부여하는 힘이다.


꽃을 더 아름답게 피우고 싶다면
먼저 뿌리를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뿌리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