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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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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Mar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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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가지에 감사합니다


3년 전 정읍에서 마음에 다짐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곳이든 6개월 이상 거주하게 되면 무언가 하겠다고요.

이곳에 상주한 지 1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그 다짐이 기억났습니다.


시작은 2018년 12월, 파인텍 고공농성장에 밥을 해갔던 비 오는 날 저녁이었지요.

농성장에서 함께 밥을 먹고 숙대 입구까지 모셔다 드렸던 수녀님께서 알려주신 것이었습니다.

떠도는 동안은 엄두를 못 냈었고, 월초에 등록하고 교재를 받고도 들춰볼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문득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동네 그 지점을 찾아갔습니다.

오랜만에 사람이 너무 많아 힘이 들었습니다.

혼자 고요히 살다보니 이젠 불특정다수가 있는 장소만으로도 불편합니다.

게다가 가장 경계하던 지나친 관심과 친절.


가고 싶었던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지난해 초 도보순례 때 방문했던 곳이었죠.

하지만 원하는 대로,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게 인생이죠.

일단 하늘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현재 거주지 근처에서 시작했습니다.


오늘이 마침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라 '성지가지'라는 것을 가져가라더군요.

그 옛날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군중들이 흔들었던 종려나뭇가지.

그리고 며칠 후 그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죠.

간사하고 무지한 군중들이 흔들었던 성지가지.

어쩌면 민족 해방을 간절히 원했던 식민지 백성의 당연했을 염원의 환호.

그날의 행태를 비슷하게 연출하며 저 또한 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어느 사람과 다름없음을 인식해 봅니다.


성지가지를 십자가 뒤에 꽂아 놓으라는데 벽에 걸어놓은 십자가가 없습니다.

등록하고 싶던 성당에서 사 온 탁상용 십자가 뒤에 누여 놓았습니다.

작년 초 그 십자가를 쥐고 성지까지 도보순례했었죠.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시면 기절초풍하실 일이지만 개신교 모태신앙인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길 위에서 만났던 괜찮은 사람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중 한 친구의 장례식을 벌써부터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습니다. 콜텍 농성장에서 만났던 수녀님은 어디나 위로 올라가면 다 똑같다고 하셨지만, 저 역시 이 종교에 허물이 없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나약한 인간이 아편 같은 종교를 만든 건지, 신이 인간을 불러 종교를 만들게 하신 건지 규명해보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다른 종교에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려주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역사가 만들어준 권위가 살아있다면 적어도 노골적으로 물질 위주의 기복신앙을 교육하지는 않겠죠.


책에 있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대자연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더는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치 좋은 자연 속을 걸어다니는 게 제 주된 일이고, 양심은 과도한 자책이 문제니까요. 그리고 걸으며 항상 질문하는 게 기도니까요.

 

두 사람을 맺어 주는 것이 인격적인 신뢰이듯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깊은 신뢰 속에서 인격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한 사람도 하느님과 신뢰와 인격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런 인간이 싫어 신에게 더욱 다가가려고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숱하게 울며 돌아갔던 신의 사랑에 기대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신은 딱 부러지게 약속하지도 장담하지도 더구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 모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을 뿐입니다. 부족한 인간 탓, 탐욕스러운 인간 탓, 연약한 인간 탓.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신께 나아가봅니다.

길지 않은 6개월. 딱 그만큼만 꾸준히 공부해 보겠습니다.  


2017년 산티아고 순례 이후 7년 만입니다.

오늘 그곳에선 산티아고 성당에서 흔들어주던 향을 성전 안에 채워주시더군요.

그 향을 몸에 쐰 제 죄가 사해졌을까요?

아직도 분노와 화가 가득한 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까요?

어려운 첫 발걸음과 손에 쥐고 와 일 년 동안 두고 볼 성지가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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