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개인적인 문장이 일반 독자의 관심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
"어느 저녁,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내 눈앞에서 그 고양이가 소나무 위로 스륵스륵 올라갔다. 마치 자신의 용감함, 기민함을 내게 자랑하는 것처럼, 새끼 고양이는 놀라우리만큼 가볍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 저 높은 꼭대기 가지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새끼 고양이가 도움을 청하듯 가녀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기는 했지만, 무서워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다. 고양이는 나무를 오르기는 잘하지만 내려오기는 잘 못 한다. 그런데 새끼 고양이는 그걸 모른다. 열심히 올라가기는 했는데, 자신이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를 알고는 겁이 나서 오금이 저렸으리라."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90쪽)
그 후에 새끼 고양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는 모른다고 썼다.
나도 비슷한 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나무 오르기를 잘하던 새끼 고양이. 어미 잃은 그 새끼 고양이를 며칠간 지켜만 보다가 그만 정이 들어서 큰맘 먹고 집에서 키우려 했었다. 처음으로 내 마음의 문을 연 고양이였다. 다시 찾아갔던 날, 그 새끼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름이 나리였다. 나 역시 그 후 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위 발췌문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조그만 책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내가 어쩌다 이 책을 읽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 그저 우연이었다. 워낙 너무도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이런 식으로 읽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말 그대로 조그만 책이다. 바랜 듯한 파란 색감이 돋보이는 리넨으로 표지를 감싼 책, 책등에는 ‘고양이를 버리다’ 제목과 함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제가 반짝이는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이 보였다. 순전히 그 이름 때문에 이 책을 고르게 된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왜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이름만으로도 읽을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언젠가는 그의 책을 한 번은 꼭 읽어봐야지 했는데, (사실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어느 작가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그 작가는 이미 작가를 초월했다고 본다. 그런 사람의 글이라면 이미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치 않을까) 그 자리에서 바로 완독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호흡이 길지 않은 글과 저자가 말했듯 어딘지 모르게 묘한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림,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양이가 내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고양이를 버리다니! 그런데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라니? 대체 그 둘이 어떻게 매치가 되는 걸까? 게다가 하루키라니! 당연히도 호기심이 왕창 생겨 버렸다. 원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하루키를 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독 후 나의 소감을 간단히 말하자면, 하루키가 왜 그의 이름만으로도 읽히는지 이해가 간다는 거다. 이 짧은 에세이지도 소설이지도 못하는 책에서 솔직히 깊은 영감을 받았다. 특히 하루키 스스로 이렇게 개인적인 문장이 일반 독자의 관심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 자문하는 모습이 그랬다. 이런 거장도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서 의심하고 의문을 가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지금, 내 글이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과 겹치기 때문이리라.
천하의 하루키도 자신의 글을 의심하는데 하물며 나라고? 이제 겨우 글을 쓴 지 2년이 되었고 내 이름으로 출간한 한 권의 책도 없는, 어쩌면 아무 효용 없는 글을 쓰고 있는, 무명작가라고 하기에도 어딘가 부족한 것 같은 내가 내 글의 가치를 따지고 의심하고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역시나 너무도 지당하다는 결론에 크나큰 위안을 얻은 셈이다.
결국 하루키는 역사에서 이 글의 의미를 찾는다.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한 아주 미소한 일부지만 그래도 한 조각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임을 통해서. 그렇다고 그것을 하나의 메시지로 쓰고 싶지는 않다는 바람과 함께.
“전쟁이 한 인간- 아주 평범한 이름도 없는 한 시민이다-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크고 깊게 바꿔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이렇게 여기에 있다. 아버지의 운명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경로를 밟았다면, 나라는 인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라는 건 그런 것이다 - 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
(같은 책, 작가 후기 「역사의 작은 한 조각」 97쪽)
그렇게 이 책이 태어났고 지금 내게 와 있다. 이 또한 그가 말하는 역사적 의미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읽힌다면 말이다. 읽히지 않는다고 해도 개인에게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자신의 역사가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세상에 아주 아주 아주 미소한 일부 그중에서도 정말 작은 한 조각이 될 것이다.
하루키는 아버지와 고양이의 추억으로 이 글을 열었고 또 다른 고양이의 추억으로 글을 닫았다. 고양이가 글의 시작과 끝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양이가 두 부자간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고양이에 관한 추억을 공유함으로써) 나 역시 나의 고양이를 생각하며 이 책을 집어 들었으니 나의 고양이가 나를 하루키에게 인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책을 시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 그동안 많은 글을 썼고 쓰면서도 늘 자신의 글을 자문하며 그 의미와 가치를 찾았을 그의 글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것을 먼저 읽어야 할지 영 가늠조차 잡을 수 없다. 거장답게 유명한 책이 너무도 많아서다. 나는 도서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을 모아둔 서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일지도 단번에 어느 한 책을 골라 집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간에 이 글을 마무리 짓고 그가 있는 서가를 찾아갈 작정이다. 왠지 모를 설렘이 나를 들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