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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Aug 08. 2018

책 <역사의 역사>와 <역사가들>

시간을 돌아보고시대를 이해하다

여름휴가 시즌이 다가오면 소설책이 쏟아진다. 그에 못지않게 은근히 많이 출간되는 게 역사책이다. 물론 주목도는 소설책이 높다. 안 그래도 너무 더워 혀 빼물고 있는 판에 역사책이라니. 그런데 올여름, 여느 때보다 역사책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작가’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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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유시민 지음, 돌베개

<역사의 역사>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 때 기획된 책이다. 6월 말 출간 이후 역사책으로는 이례적으로 각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원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데다 tvN <알쓸신잡>, JTBC <썰전> 같은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발군의 입담 덕으로 보인다. 


보폭이 넓은 책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서 시작해 중국의 사마천, 이슬람의 이븐 할둔, 유럽의 랑케를 거쳐 제래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에 이르기까지 16명의 역사가와 그들이 쓴 18권의 역사책 이야기를 담았다. 역사 서술의 시초에서부터 

동·서양 역사가도 다루고, 인공지능(AI)으로 초래될 인류의 미래까지 언급한 셈이다. 다름 아닌 ‘유시민’이, 다름 아닌 ‘역사책’을 다뤄준 건 일단 고맙다. 


미안하지만 미담은 여기까지. 전반적으로 곱씹어 먹을 건더기가 부족하다. 가령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내는 코드는 ‘분노의 문학적 승화’다. 유 작가도 이 틀을 따라가지만, 뒷받침해주는 상세한 논리와 설명이 부족해 글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특히나 유 작가는 이 분노를 ‘우아하다’고 표현했는데, 글쟁이의 분노는 치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사학자를 다룬 자체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자신은 판단할 수 없다고 한 발 빼면서도 신채호에 대한 ‘국뽕적 해석’에 기우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건 아쉽다. 한국 최초의 사회경제사가로 꼽히지만 월북으로 잊힌 백남운을 다시 불러낸 것도 반갑다. 허나 도식적인 마르크스주의 때문에 역사 해석에 무리수를 뒀다는 비판은 옅게 깔려 있을 뿐이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것과 지금 다시 ‘평가’하고 ‘인정’한다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때론 명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7장에서 E. H. 카를 다루고 8장 슈펭글러·토인비·헌팅턴, 9장 제래드 다이아몬드·유발 하라리로 직행한 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좀 심하다. <역사의 역사> 자체가 아무래도 지명도 있는 인물을 다루기 때문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 해도 20세기에 등장한 다양한 역사학을 통째로 건너뛴 건 무리한 진행으로 보인다. E. H. 카 이후엔 우울한 문명사가, 운칠기삼의 지구사가, 글발 좋은 파국론자 같은 이들밖에 없단 말인가. 한편에서 <역사의 역사>에 대한 혹평이 나오는 이유다.




12명의 역사가 이야기

<역사가들>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지음, 역사비평사

원래 지면의 취지와는 결이 다르지만, <역사의 역사>의 대척점에 선 책보다 보완해줄 만한 책을 소개하고 싶다. 역사비평사가 2010년에 내놓은 <역사가들>이다. 역사학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민족, 국가 등 특정 집단을 암암리에 전제한다. 그 때문에 역사학이 집단 간 투쟁의 무기나 도구로 쓰인다는 염증, 혹은 비판이 점증했다. 거대 정치사에서 벗어난 사회사, 신문화사, 미시사, 일상사, 기업사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온 배경이다. <역사가들>은 20세기 역사학계의 이런 움직임, 그러니까 <역사의 역사>가 통째로 빼먹은 이 이야기들을 12명의 역사가에 대한 이야기로 압축해 전달한다. 


두 책에서 겹치는 역사가는 딱 한 명, E. H. 카뿐인데, 그마저도 포인트가 다르다. 유시민을 비롯, 수많은 작가들이 마르고 닳도록 언급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대신 33년 동안 14권으로 집대성한 <소련사>가 서술 대상이다. 역사학자로서 카가 집중 연구한 대상은 ‘역사철학’ 혹은 ‘사학사’가 아니라 ‘소련사’다. 그 덕에 스탈린 체제의 옹호자라 공격받고 학계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E. H. 카의 울분에 찬 모습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역사란 무엇인가>가 금서로 지정된 걸 두고 군부 정권이 무식한 증거라고 하는데, 군부 정권은 생각보다 똑똑하고 철저했다. 


‘기업사’를 만든 알프레드 챈들러도 흥미롭다. 회장님의 결단과 사원들의 땀방울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우리가 번영했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사보형 기업사가 아니다. 기업의 규모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추적한 끝에 챈들러는 ‘보이는 손’을 제시했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대기업 전문 경영진의 보이는 손에 의해 움직인다는 통찰이다. 


또 분단 시기 서독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동독의 역사뿐 아니라 동·서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역사까지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크리스토프 클레스만에 대한 소개도 흥미롭다. 20세기 대한민국사 또한 그렇게 쓰여야 하지 않을까. 유럽을 개별 국가의 역사가 아니라 ‘반파시스트 연합’이라는 관점 아래 유럽 통합사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 발터 립겐스의 방식도 ‘이제는 동아시아 시대’라고 외치는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하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파시즘을 구술사로 분쇄한 루이자 파세리니, 대영제국의 작동 방식을 귀족들의 심성과 행위 방식으로 다시 풀어낸 데이비드 캐너다인, 서구중심주의 타파를 내건 안드레 군더 프랑크와 케네스 포머란츠 등 눈길을 끄는 이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역사가들>은 <역사의 역사>를 보충하고도 남는다.





 조태성 한국일보 기자

사진 제공 돌베개,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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