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문학웹진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등단한 작가가 심사를 해주는 곳이었는데 내 글을 보고 이런 건 문학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문학이 될 수 있고 문학이 될 수 없는지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런 자격증 따위 어디에도 없다. 누가 문학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든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문제는 그렇게까지 단순하지 않다. 나는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대학을 마저 다녔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잡지사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여러가지 일을 전전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에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글은 써지지 않고 오직 잠만 찾아왔다. 나는 하루 종일 자고 그 다음날도 자고 그 다음날의 다음 날도 잤다.
그러다가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이 찾아왔다. 새벽이 되면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커피가 필요해. 스타벅스의 오늘의 커피. 숏사이즈로.
하지만 스타벅스는 9시 이후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나는 한국의 서울에서 그런 스타벅스를 찾아내지 못했다. 버거킹은 스물네시간 영업을 한다. 맥도날드도 그렇고. 패스트푸드의 노동자들은 스타벅스의 노동자들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각설하고. 나는 인권 운동가나 노동 운동가가 아니니까.
우연히 안마업소에 들어가게 됐고 그곳이 보통 안마업소가 아니란 건 주인이 입고 있는 홀복을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나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일자리가 필요해요. 밤에 할 수 있는.
여주인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내일부터 일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안마업소에서 일하게 됐다. 그곳은 성매매를 하는 변종 업소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콘돔과 섹스의 흔적 같은 것을 지우는 일이었다. 물청소를 지겹게 했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목욕탕 침상 같은 곳에 누워 안마를 받다가 어쩌구 저쩌구. 구체적인 이야기는 당신도 집 주변의 안마 업소를 가보면 돈내고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학을 쓰는 사람이니 저열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어쩌면 창녀도 문학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건 지혜라는 업소 이름을 가진 꼬맹이가 업소에 들어온 뒤부터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지혜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이전에는 집창촌에서 일해보는 등 하드한 경험을 많이 했다. 아가씨들은 보통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방에 들어가는데 그 전에는 밖에 다닐 수가 없으므로 온갖 담배 심부름, 술 심부름을 해야 했다. 지혜는
오빠. 디스로 갖다줘.
라고 말하며 항상 1만원을 건넸다. 거스름돈은 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겨우 한달에 200만원도 벌지 못하지만 이 아이는 하루에 100만원씩 버니까.
나는 그녀에게 룸살롱에 가는 건 어떤지, 2차를 나가지 않는 노래방은 어떤지 떠봤지만 지혜는 아무래도 안마방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매번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지혜가 방 구석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손님이 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는 사실 맞는 걸 좋아했다. 손님의 플레이에 우는 것은 그것까지가 플레이의 일부이기 때문이지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지혜는 맞으면 맞을수록 흥분했고 그녀의 등은 누렇게 멍이 든 상태로 사진이 찍혀서 트위터에 올라가곤 했다.
그녀를 창녀라고 부르는 건 너무나 심각한 모욕일지도 모른다. 그냥 아가씨라고 부르면 그만이다. 아가씨는 중립적인 표현이었지만 업소가 너무 많아진 나머지, 업소에 드나드는 아저씨들이 너무 많아진 나머지 술집 아가씨, 안마방 아가씨, 오피 아가씨, 키스방 아가씨, 와이셔츠방 아가씨, 룸살롱 아가씨들로 변종이 퍼져 나갔고 이제는 창녀의 다른 이름이 아가씨였다. 아가씨가 아니라고 해서 창녀 일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은 모두 아가씨라고 부른다.
지혜는 개 한마리를 키웠다. 아가씨들은 항상 개나 고양이를 키웠고 결국에는 버리고 도망갔다. 지혜는 스마트폰 게임에 한주에 1000만원씩 쏟아부었고 그렇게 돈을 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던 그녀에게 그것만이 구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방을 치우고 나면 스마트폰을 잡고 이런저런 소설을 써봤지만 어느 것 하나 신통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지혜가 손님에게 얻어맞던 어느날 나는 그녀의 비명 소리가 진짜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 확인해보니 손님은 이미 도망간 후였다. 지혜의 얼굴을 보니 푸르고 혀가 내밀어져 있고 눈이 뒤집혀져 있었다. 그리고 119를 불러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죽고 나는 안마방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다시 집에서 소설을 쓰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녀는 문학이 될 수 있었을까.
문학은 아마도 고귀한 여성들의 순결한 직업 정도로 놔두는 게 좋을 것이다. 함부로 섹스가 나와서도 안되고 맞으면서 흥분하는 창녀 따위 문학이 될 수 없겠지.
그렇다면 나도 더이상 문학을 쓰지 않겠다. 작가가 되지 않겠다. 글을 쓰지 않는 나는 영락없는 실업자의 몰골이 되었다. 어느날 3일 내내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병원을 갔고 죽고 싶다고 말하자 의사가 약을 줬다.
그 약을 먹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커트 보네거트는 모든 잘못은 뇌의 화학물질이 잘못되서 벌어진다고 썼다. 그렇다. 약을 먹으면 뇌의 호르몬이 멀쩡하게 분비되고 나는 정상인이 될 수 있다. 과거는 모두 잊고 다시 일자리를 찾아 사는 것이다.
크리피넛츠의 오토노케를 들으면서 단다단을 봤다. 정말 노잼인 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