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락내리락 인생길
강원도 정선군 민둥산에 억새가 만발했다. 높고 푸른 하늘 쾌청한 바람에 은빛 억새꽃이 춤을 춘다
증산초교를 출발해 민둥산을 향해 걷는다. 산 입구에서 대장이 우리에게 물었다.
“왼쪽은 흙길인데 경사가 아주 급해요. 오른쪽은 완만한데 시멘트 포장 임도입니다. 어느 쪽 길을 걸으시겠어요?”
경사가 완만한 흙길이라면 딱 좋을 텐데 우리가 원하는 그런 길은 없었다. 완만한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걷기 시작하자마자부터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아이고, 시작부터 고바위길이네.”
우리가 선택해서 걷는 길이었지만 여기저기서 헉헉거리는 숨 가쁜 소리가 들려왔다.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오르막길이 끝나갈 무렵 조금씩 내리막길도 나왔다. 우리는 귤을 까먹고, 사과를 나눠 먹으며 잠시 쉬었다. 경숙 샘이 나뭇가지 하나를 가리키며 작은 꽃눈을 보여 주었다. 내년 봄에 싹 틔울 생강나무 꽃눈이란다. 연약한 꽃눈으로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디려고 벌써 나왔는지 기특하면서도 걱정되었다. 꽃눈처럼 우리도 힘을 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세다. 누군가 바람의 언덕이라 했다. 정상을 앞두고 억새밭 사이에 나무 계단이 보였다. 마지막 경사는 더 가팔라져서 숨이 깔딱 넘어간다고 깔딱 고개란다. 있는 힘을 다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걸으니 앞사람의 엉덩이와 발뒤꿈치만 보였다. 다 왔다고 이제 조금만 가면 정상이라고 바람이 등을 밀어주었다. 돌리네에 도착하자 제주도 한라산과 백록담, 오름과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다.
1,119m 민둥산의 이름은 산에 나무가 없고 밋밋해서 민둥산이란다. 오래전 주민들은 산나물을 많이 따기 위해 해마다 산에 불을 놓았단다. 그래서 민둥산에는 큰 나무가 없고 억새가 많이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억새는 9월 중순에서 11월 초순까지 하얀 억새꽃을 아름답게 피워낸다. 민둥산의 돌리네에 터를 잡은 억새들은 다행히 큰 나무 밑을 피해 따뜻한 햇볕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 대신 강한 바람은 피할 수 없었다. 억새는 강한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바람 따라 더 멋진 춤을 추었다.
돌리네 밑으로 내려가 호수를 보았다. 동그랗고 예쁜 호수는 파란 하늘과 하얀 뭉개 구름을 품에 안고 있었다. 호수가 무척 예뻐 인공 호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으로 땅속의 석회암이 물에 녹아 만들어진 자연 호수라 했다. 돌리네를 한 바퀴 돌아 민둥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표지석 앞에 섰을 때는 숨 가쁘게 올라온 과정이 생각나 감격스러웠다. 힘든 길을 포기하지 않고 정상까지 올라온 나를 칭찬해 주었다. 여기까지 힘들게 걸어온 등반도 내 삶도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2025년 11월 13일은 2026년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다.
오래전 큰딸의 입시 때가 생각났다. 큰딸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알아서 하는 자기 주도형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입학하자마자 학생회 간부를 맡았고, 행사 때마다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며 학교생활을 맘껏 즐겼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다니러 올 때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며 우리를 기쁘게 했다. 수능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을 만나 원서를 쓰면서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사실에 깜짝 놀랐다. 딸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고백했다. 집안은 냉랭한 찬바람이 쌩쌩 불었고, 동생들도 덩달아 눈치만 보며 침묵 속에 빠졌다. 남편은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탈모가 생겼고, 딸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재수를 권했지만 딸은 낮춰서 그냥 가겠다고 했다. 나는 가운데서 누구 편도 들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딸의 뜻대로 재수하지 않고 진학했다. 다행히 딸은 대학을 잘 다니고 졸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취업하는데 또 의견 차이가 생겼다. 우리는 딸의 뛰어난 언어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쪽의 전문직 시험을 권했다. 하지만 딸은 전공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각지도 못한 패션 쪽에서 일하고 싶다 했다. 우리는 안타까웠지만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패션 업계의 밑바닥에서 출발한 딸은 10여 년이 지난 현재 연봉 협상을 계속해 가며 몸값을 올렸고, 유명 기업에서 일을 즐기며 근무하고 있다. 당시에는 세상이 끝난 듯 큰 사건이었고 앞으로 헤쳐 나오기 힘들 만큼 어려운 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부모의 욕심이었고 아이는 자기 삶을 뜻대로 묵묵히 살아왔을 뿐이었다.
어렵게 올라온 민둥산 정상 표지석 앞에서 꼭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런데 표지석 앞에는 긴 줄이 있었고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포기하고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올라올 때 힘들게 했던 가파른 오르막길들이 내려갈 때는 급경사로 변해 또 힘들게 했다.
산속에는 보이지 않는 오르막 내리막길이 많이 있다. 오르막길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내리막길이 계속되지도 않는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모두가 평범하고 무난한 삶만 산다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힘들고 어려운 오르막길을 올라 봐야 맑은 호수와 은빛 억새의 아름다운 춤도 볼 수 있다. 어려움을 겪어봐야 가족과 인간관계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관계도 더 돈독해진다. 오르락내리락 실패와 성공을 경험해 본 삶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고 소중한 인생이지 않을까?
오늘도 강원도 정선 민둥산 돌리네에는 억새꽃들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다. 억새는 바람 따라 춤을 추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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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고원길 걷기는 비시즌입니다. 현재는 우리나라 10 대강 발원지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2026년 고원길 시작은 2월 말쯤입니다.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하여 시즌 시작 전 소식을 알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