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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성 Nov 02. 2024

골목에서 시작된 우정. 그 시절 너와 참 즐거웠나봐

[그 시절 추억의 조각이 깊이 박혔나 보다.]

아홉 살이나 열 살 즈음의 일이에요.


어느 날부터 내 또래 남자애가 보였죠. 흰 피부와 잘 다듬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언제나 카라가 있는 단정한 옷차림까지. 딱 봐도 잘 사는 집 아들이 근처로 이사 왔구나 싶었어요. 당시 연립과 빌라가 밀집된 동네라 놀이터 하나 제대로 없어서 아이들은 동네 골목에서 놀곤 했죠. 그런데 그 친구는 우리랑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멀리서 우리가 노는 걸 잠깐 보다가 다시 집으로 가곤 했어요.

<남자아이들이 골목에서 놀고 있는 모습>

그 친구와 처음 어떻게 말을 걸고, 친구가 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단짝이 됐어요. 그 후 지금까지 거의 30년을 친구로 지내요.  우린 각자 대학도 가고, 군대도 갔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고요.


서로의 삶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특히 20대 초중반을 가깝게 지내지 못해서 그런지 조금 거리가 생긴 것 같아요. 얼마 전 그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연락을 했는데 회신이 없네요. 저보다 가까운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아픔을 공유하겠죠. 그 대상이 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아쉽지만 그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제가 봤거든요. 저를 각별하게 생각하지만 지금 상황이 편하게 만나기 어려워서 여유가 없구나 생각할래요.


오늘 3살 아들과 놀다가 그 친구가 문득 떠올랐어요. 그래서 몇 가지 기억을 메모해 뒀다가 지금 이렇게 적는 거예요.


우리 집 꼬맹이는 아빠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고 해요. 레슬링도 하고, 책도 읽어주고, 자동차 여러 대로 역할극을 하면서 노는데, 아이가 감정이입을 잘해서 저도 신이 나서 나름 메쏘드 연기를 하거든요. 그 작은 얼굴에 행복하고 슬픈 표정이 다 나와요.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서 제가 어릴 적 그 친구를 바라보던 모습이 상상됐어요. 그 친구와 놀 때의 내 모습이지 이러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왜 아이와 놀던 그 순간에 그 친구와 놀던 시절이 떠올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는 그 친구를 참 좋아했나 봐요.


그 친구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어요. 흙놀이를 하면 누구보다 깊게 파서 멋진 구조물을 만들었어요. 손재주가 없던 저는 옆에서 감탄하며 더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가장 재미있었던 건 그 친구가 흰 공책에 지도를 그리며 전투하는 '그림 전투 게임'이었어요.


한 턴마다 병사와 전투 장비를 하나씩 그려서 전쟁을 벌이는 게임이에요. 반 친구들 여럿이 그 친구의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하면 정말 즐거웠어요. 거기엔 전술, 심리전, 동맹과 배신까지 다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게임이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했어요. 언제가 게임이 끝나고 나서 저는 그 친구의 노트를 빌려서 집에서 혼자 그려보기도 했는데, 역시 그림체 퀄리티가 후져서였을까요. 그 박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친구는 그 게임에서 흥미를 잃었어요. 저는 여전히 그 게임을 좋아했죠. 몇 번 졸라서 같이 하자고 했지만 마음이 떠난 녀석을 붙잡고 해 봐야 금세 끝을 내더라고요.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요.  빨리 그간의 공백을 허심탄회하게 채울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줬던 그 친구처럼, 저도 그 친구 이야기를 들어줬어야 했는데. 언젠가 제 속에 저로만 가득했던 시절에, 제 이야기만 하고 그 친구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던 게 후회로 남아있어요.


아직 기회가 있겠죠.


거의 30년이 흘러 서로 다른 곳을 떠돌다가 가정을 꾸리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살면서도 연락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있네요.

<좋은 날,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

"헤이 준, 너의 동의 없이 이렇게 우리의 추억을 끄적여서 미안해. 곧 얼굴 보며 그간 못한 이야기 나누자. 그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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