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수프16
슬기로운 공간(空間) 생활
1. 사람은 공간에 갇혀 삽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한 영원한 수인(囚人)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감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수인생활을 슬기롭게 하는 이도 있고 평생을 불편하게 살다 가는 이도 있습니다. 늘 동료들과 불화하고 수시로 탈옥을 감행합니다. 많은 이들이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위한 조언을 늘어놓습니다. 아예 감방이 없다고 생각해라라고 가르치는 이도 있고 감방의 위계를 존중해서 예의바르게 살라고 권고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번 감방에서 말 잘 듣고 착하게 살면 다음에는 훨씬 더 좋은 감방으로 갈 수 있다고 약속하는 이도 있습니다. 감방생활이 인간을 ‘사고하는 동물’이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인간의 부류는 둘로 나뉩니다. 공간과 관련해서 그렇습니다. 공간에 민감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로 나뉩니다. 항상 자기 방을 깔끔하게 정돈해 놓고 지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한껏 어질러 놓아야 마음이 편한 이가 있습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소설가 중에는 배경 묘사에 유독 공을 들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배경 따위는 아예 무시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한국현대소설의 두 거장 김동리와 황순원의 소설을 보면 그런 ‘공간에 대한 작가의 취향’을 일별(一瞥)할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김동리는 전자, 황순원은 후자에 속합니다. 김동리는 경주, 황순원은 평양(대동군) 쪽이 고향입니다. 「무녀도」나 「황토기」의 서두에 나오는 장황한 공간묘사는 작품 속에서 무거운 비중을 갖습니다. 작품의 주제를 포괄적으로 암시합니다. 공간에게 특권적인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황순원의 「별」이나 「소나기」에서는 공간의 그런 특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회성이나 역사성, 신화성 같은 것을 전혀 내포하지 않습니다. 공간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아마 황순원 소설이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어떤 ‘내면 공간(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있는 것과도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소설에서의 공간 묘사는 이야기 속에 어떤 리듬을 창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독자의 시선을 주위 환경 쪽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긴장의 이완을 도모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에 이야기(시간)를 정지시킴으로써 서스펜스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또 공간 묘사는 음악에 있어서의 서곡처럼 작품의 행동과 어조를 예고하는 역할도 하는데, 김동리의 「무녀도」에 등장하는 모화의 집터 묘사는 바로 그러한 예에 해당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간 묘사는 서술적인 조망을 확대하고 상징의 출현을 돕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한동안 공간에 대해서 무심하게 지냈습니다. 젊어서 한 때는 주변 환경에 꽤나 민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색깔이나 모양에 유독 집착하고, 수시로 크고 작은 ‘공간 조정’을 행했습니다. 이사도 자주 다녔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어쩌면 황순원 소설의 그것처럼, 사회성, 역사성, 신화성을 지닌 공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지금 다시 젊어서처럼 공간에 대한 욕심이 다시 듭니다. 특히 신화적인 공간에 마음이 쏠립니다. 어느 한적한 시골에 혼자 머물며 젊을 때 읽은 ‘바슐라르의 몽상’을 흉내내고 싶습니다. 생각만 해도 황홀합니다. 그 공간의 유혹이.
2. “야마부시들은 티벳 고유의 탄트라 이론과 인도의 요가 체계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힘과 의지를 주어진 시간에 전력을 다해 집중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이는 손가락으로 복잡한 형태를 표현하는 결인법(結印法)을 도입시켜 창시한 구자법(九子法)이라는 것이었다. 구자법은 임(臨), 병(兵), 투(鬪), 자(者), 개(皆), 진(陣), 렬(烈), 재(在), 전(專) 등 아홉 가지의 결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하홉 개의 손 모양은 모두 81개의 형태로 분화된다.” (피터루이스, 김일현 옮김, 『닌자 이야기』, 황금가지, 2003, 28쪽)
닌자들은 적진에 숨어드는 특별한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공간의 제약을 최대한 무력화 시켜야 했습니다. 공간을 주무르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신체가 유연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체능력을 극대화 하는 자기 최면이 필요했고요. 구자법이라는 것은 심박 수를 줄이거나 혈압을 낮춘다거나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한다거나 호흡을 장시간 멈춘다거나 고도의 지각력을 발휘토록 하거나 하는 데 필요한 수련법이었습니다. 그것과 함께, 그들의 밀교적 정신 수련은 공간을 뛰어넘어 정탐과 암살 등 필요한 임무 수행에 필요한 물리적, 심리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신비적 공포를 느끼고 있던 일반인들의 경외감이 그것입니다. 그것도 결국 공간에 대한 닌자들의 태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간은 닌자들의 큰 무기였습니다. 자신들은 언제나 감방의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공간 이동’을 그들은 해냅니다. 그것을 일반인들이 두려워한다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이미 그들은 싸우기 전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사회성, 역사성, 신화성을 자신들의 공간에 심어둘 수가 있었습니다.
“교수들은 친구를 만드는 일에 무능하다.” 어제 장례 미사에 참례하고 온 아내가 제게 한 말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교수 출신이었고, 아마 말년에는 은둔자적인 생활을 꽤 오래 해 오셨던 모양입니다. 문상객들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옆 자리에 앉았던 나이 드신 한 자매님의 말씀이라고 전했습니다만, 결국은 제 장례식에 손님 적게 올 것을 걱정하는 말이었습니다(좀 심했나?). 저를 ‘생활의 닌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려서 좀 섭섭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제 공간이 좀 불편하던 중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평소에 잘 만나지 않던 분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루걸러 한 번씩 그런 자리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잘 먹지 못하던 진수성찬이기도 했지만 불편한 자리 탓에 계속 소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식사하는 내내 ‘결인법’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내 공간에 타인을 들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순간순간 ‘닌자의 본능’이 솟구칩니다. 아무튼 언젠가는 저에게 ‘닌자의 본분’를 강요하는 이 감방 생활도 끝날 것이니 그 날만 기다리며 은인자중할 따름입니다.
3. 봉건 사회에서는 유독 백성들에게 공간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지배층들의 공간은 넓었고 백성들의 공간은 항상 비좁았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 분할을 통해서 권력의 횡포가 독사처럼 파고들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권력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스리는 권력은 다스리는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정교해지고 공고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탐심(貪心)에 물든 권력의 하수꾼들이 백성들의 땀과 피를 착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이 바로 백성의 원수(怨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신문고보다 더 직접적인 ‘민중의 소리’였습니다. 최고 권력자가 중간 권력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신문고는 중앙관원을 반드시 거쳐야 두드릴 수 있었지만 격쟁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징, 북, 장구, 꽹과리 등을 쳐서 왕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갖는 민중 본위의 제도였습니다. 흑산도 주민 김이수(1756~1805)가 1791년 엄동설한에 격쟁으로 왕의 어가를 가로 막은 일은 꽤나 유명합니다. ‘민중의 소리’가 권력에 제동을 건 좋은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서남 해역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인 닥나무가 흑산도와 안면도에만 유일하게 분포했다. 그래서 섬 주민들은 누대로 종이를 만들어 중앙관부에 상납해 왔다. 그런데 종이 상납은 절해고도 섬 주민들에게 결코 가벼운 부역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섬 주민들은 닥나무를 채취할 수는 있었지만, 이것을 이용해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이 제작은 영암의 도갑사 승려들을 섬으로 초대해서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는 섬 주민과 승려의 분업으로 만들어졌지만, 소요되는 경비는 모두 흑산도 주민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흑산도에 닥나무가 절종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섬 주민은 닥나무를 구하러 육지로 나와야 했고, 현지에서 종이를 만들어 중앙에 상납했기 때문에 체류비 또한 덤이었다. 그 결과 섬 주민의 종이세 부담은 날로 늘어났다. 이런 사정을 섬 주민들은 흑산도진에 정소했고 그 다음에 상급관부인 우수영, 나주목, 전라감영에 민원을 제기했다. 마침내 전라감사가 중앙관부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급기야 섬 주민 김이수가 한양 천리 길을 달려가서 정조에게 격쟁을 올린 것이다. [김경옥, 「섬 주민 김이수, 한양 한복판에서 正祖의 어가를 가로막다」(교수신문 2012. 7. 2)]
김이수가 꽹과리를 쳐서 현릉원(사도세자의 능) 행차에서 돌아오는 정조의 어가를 멈추게 한 것은 그의 나이 35세였습니다. 한창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더 그랬을 겁니다. 한 몫 하는 한 집안과 마을의 든든한 기둥이었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꽹과리를 지고 뭍에 오르던 그의 심사는 무척 비장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한양으로 향하던 엄동설한의 천리 길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먼 길을 걸어내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을 겁니다. 그런 고역은 차치하고서라도 정작 어려운 일은 권력에 맞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른 소리라 해도 권력의 잘못을 질타하는 일은 예나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디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금수(禽獸)와 같아서 백성들 보기를 한갓 먹잇감으로밖에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르면 먹잇감을 앞에 두고 어르고 놀다가 배가 고파지면 냉큼 잡아먹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래서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서 민원이 제기되고 정식으로 각하된 사안이었습니다. 그것을 한 민초의 요구로 왕이 다시 살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었습니다. 만약 사리에 어긋난 무모한 도발이었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 그 후에 닥칠 엄청난 후폭풍을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외길 행보였습니다. 잘 되면 향토의 영웅이 되겠지만 못되면 혼자서 다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다 겪어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김이수의 격쟁’이었습니다. 그런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에 그는 수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겪었어야 했을 겁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습니다. 정조 임금은 좌의정 체제공에게 명해서 진상을 살펴보라고 했고, 체제공은 4개월여의 현장 조사를 통해 흑산도 주민들에게 부과된 사리에 어긋난 종이 세 부역을 철폐토록 하였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더 큰 감동은 그 후 흑산도 주민들이 김이수에게 행한 보은의 의리행사입니다.
...이로서 흑산도 주민의 종이세가 혁파되었다. 이에 섬 주민들은 격쟁을 올린 김이수에게 흑산도 인근 해상의 중죽도 어장을 포상으로 지급했다. 또 김이수가 세상을 떠나자, 주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김이수에 대한 섬 주민의 신의가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18세기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섬사람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정조를 만났다. 평범한 백성이 단지 쇠를 쳐서 어가 행렬을 멈춰 세운 것이다. 이 사건은 역사상 왕과 백성의 가장 극적인 만남으로 기억된다.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천리 길을 달려간 섬 주민,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격쟁을 허용한 정조의 여론정치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김경옥, 위의 글]
김이수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문득 언젠가 본 『혈의 누』(김대승, 2005)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의 배경이 흑산도 주민들의 종이 부역과 매우 흡사합니다. 영화는 외딴 섬 동화도에서 일어나는, 제지소를 둘러싼 원인 모를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그 사건의 범인과 수사관 사이에는 선대부터 맺어진 악연이 존재합니다). 그 영화에서는 주민들에게 성심껏 은사를 베푼 한 서민 영웅(제지소의 원주인이었던 강도주)에게 ‘몸과 마음의 빚 부담’에서 벗어나고픈 섬 주민들의 ‘집단 배신’이 마치 원죄처럼 강렬하게 부각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지가 찢겨져 죽는 서민 영웅 강도주를 섬사람들은 쉬쉬하며 외면합니다. 누구도 그를 위해 증언을 하거나 ‘격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이용하는 권력의 교활함도 중요한 스토리라인을 형성합니다. 제지소를 약탈하려는 자와 빚을 탕감 받으려는 자들의 야비하고 비굴한 야합이 이루어집니다. 그 서민 영웅이 죽고 하늘에서는 혈우(血雨)가 내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미쳐갑니다. 서로를 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