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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외선생 홍언니 Sep 26. 2019

학생에서 선생으로 가는 길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주변에서 간혹,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되고자 했는지 내게 묻곤 한다. 항상 대답은 얼버무리며 끝났지만, 속으로는 웃곤 했다. 나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학생에게 득이 될까, 실이 될까. 한 편으론 괜한 부담을 줄까 걱정되기도 하며, 나 스스로를 밝힌다는 것이 아직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사실 선생님이라는 목표를 갖게 된 건 우발적인 동기에서였다. 지금도 현직 교사 생활을 하고 있을 담임이 자기 분을 못이겨 친구들을 때리는 일, 그리고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무기력함.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발버둥에 불과했다. 담임은 그저, 소위 공부 잘 하는 우수한 학생들에 신경 쓸 뿐. 어중간한 중하위권인 내게 신경 쓸 겨를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인터넷을 통한 발버둥이었다. 별 거 아니었다. 단순히, 대학입시를 앞둔 평범한 고3학생이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으랴. 그 때에는 레퍼런스가 뭔지, 어떤게 올바른 정보인지도 모른채, 수만휘, 오르비 등등 다양한 커뮤니티를 탐색하곤 했다. 사실 그들에게 받고 싶었던 대답은, 너는 우수하니까 합격할 수 있을거야 라는 답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카페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입사대였나. 당시 입학사정관제로 불렸고, 현재에는 학생부종합으로 불리는 그 전형을 준비하던 과정 중 유독 거기에서 열심히 활동하곤 했다. 운이 좋았는지, 당시 멘토 분들이 멘티들의 양해를 구하고 나를 추가로 받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표현을 하고 싶다. 더불어, 그 활동으로 얻은 많은 친구들, 물론 지금은 연락 한 번 하기 쉽지만 그 때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이다.


온라인으로 알게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커뮤니티라는 것 자체에 소극적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멘토들이 자기소개서를 첨삭해주겠다고, 오라는 이야기는 굉장히 큰 매력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도 안해주던 그 자기소개서 첨삭들을 합격한 대학생들이 해준다니!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물론 내가 지원하고자 하는 학과 멘토는 없었지만 충분히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부푼 꿈에 처음으로 혼자 서울로 올라갔다. 강남역 토즈였나. 정확한 스터디카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멘토와 멘티가 1:1정도로 참석했던 열댓명 아니 거의 스무명에 가까웠나. 그정도가 모인 꽤 큰 모임이었다.


첨삭은 사실 큰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다만, 같이 준비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점들을 배울 수 있었다. 저렇게도 글을 쓸 수 있는구나 싶기도 하고, 제각각 자신의 꿈을 아름답게 설명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 친구들을 계속 알고 싶었고, 함께하고 싶었다. 후에 여담이지만, 스터디카페의 비용과 간단한 저녁 역시 멘토분들이 계산해 주셨는데 대학생이 되고서야 그런 배려가 얼마나 큰 마음가짐인지 깨달았다. 스터디 카페가 절대 저렴한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학생부종합을 준비하며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친구들과 교류하며 준비하는 과정 중, 담임은 여전히 나를 아니꼽게 보았다. 내 내신대로 인서울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나를 싫어했다. 딱 싫어했다는 표현이 맞았을 것이다. 더불어, 담임과 상관 없는 활동으로 다른 선생님들이 더 챙겨주니까 내가 기고만장해졌다고 생각한게 아닐까.


담임은 내 고등학교 생활 중 연속으로 2년을 지켜 본 사람이었다. 사실 한 번도 아름다운 관계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뭐.. 뒤에서 들리는 말들도 있었고,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아슬아슬했던 관계가 크게 틀어진 적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포트폴리오 원본대조필 도장을 받기 위해 교무실에 갔었다. 아마 그 때 작성하던 학교가 마지막 학교였다. 담임은 내게 잔소리를 하더니 그날따라 기분이 안좋았는지, 너를 추천할 수 없다며 내 서류를 내 눈앞에서 찢었다. 갈기갈기.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담임이 자기 말을 거스를 때 친구들을 때린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 친구랑 이야기 할 때에도 그 때 왜 뺨을 맞았는지 모른다고 할 정도니까. 그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과를 하며 먼저 굽혀갔던 내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아직도 어이가 없긴 하다.


여하튼, 그런 상황을 맞게 되니 이게 선생인가 싶었다. 제대로 된 대화와 진학 지도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감정을 못이겨 저런식으로 행동하는게 그 때 당시에는 당혹스러웠고, 지금은 어이없다고 느낀다. 담임은 내가 굽히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아니면 포기하던가. 딱 둘 중에 하나고, 학생이 급하니까 굽히고 들어오겠지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다른 선생님께 다시 서류를 받고, 추천서를 부탁드리고, 그리고 그 서류는 스캔해서 서울의 친구에게 제출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담임은 날 우체국에 보내지 않을 거거든. 아직도 그 서류를 대신 내 준 친구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물론 그 대학은 떨어졌다.


이 때 부터 담임에 대한 회의감이 크게 들었다. 교육봉사를 고교 내내 진행했던 내게 교직은 또 하나의 선택지였는데 과연 내가 저런 모습이 될까봐 두려웠다. 폭력 아래에서 자란 아이는 폭력을 그대로 세습한다는 말이 있듯,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


결국 담임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론 지금과도 사이가 좋지는 않다. 아직도 너따위가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젊은 꼰대인 담임을 보면  참 웃기기도 하고 그렇다. 뭐 대학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내가 원했고, 내가 희망했던 대학들이었으니까.


그 해 겨울. 수능이 끝나고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 추가합격을 축하한다며 천안으로 내려왔다. 일산에서, 수원에서 정말 제일 먼 위치에 있는 천안으로 오기에는 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기분 좋게 빕스에서 만난 우리는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우린, 우리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신기하게 모두가 똑같이. 우리가 받았던 것처럼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멘토링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의 음료수 잔에 담겨 있었던 사이다. 그 것이 그대로 우리의 첫 멘토링 단체 '사이다'의 출범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멘토링에 대한 시작으로 나는, 낮은 학력이었지만 선생님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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