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이 긴긴밤을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부모님에게는 2002년의 겨울이 유독 그러했을까. 2002년에 우리 가족은 경기도 부천으로 터전을 옮긴다. 부천에 대한 우리 가족의 첫인상은 “부천은 참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 곳이구나.”였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전까지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광주광역시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엄마는 우리가 ‘할머니를 모시고 산 것’이 아니라 ‘할머니 집에 얹히어 산 것’이라고 했다. 둘 다 틀렸다. 광주광역시 북구의 어느 아파트 101동 102호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 무어라 구분할 것 없이 모두 ‘김길림의 자식들’이었다. 2001년 정월 대보름 새벽, 그런 김길림 씨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가까이에 사는 막내딸과 세 아들들, 그들이 낳은 아이들까지 모두 불러 찰밥을 해먹이고 난 다음날이었다. 나는 여덟 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할머니가 떠난 집에 엄마, 아빠, 나와 동생만 남았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내가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것 중 하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방과 후에 나를 돌봐줄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학원에 가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각자의 상처를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았다. 즐거운 일은 늘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도 늘 함께였다. 우리가 겪어내야 했던 긴긴밤의 시작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집이 없었다. 없는 것은 집뿐만이 아니었다. 집도 없었지만 돈도 없었다. 엄마, 아빠가 일할 곳도 없었다. 완전한 이사도 아니었다. 살 집이 다 지어지지 않은 탓에 복층이 딸린 오피스텔 원룸을 구해 지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불, 세면도구, 네 사람 몫의 식기 정도의 꼭 필요한 것 말고는 살림살이도 별로 갖추지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부천의 센 바람과 밤과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밤과 시간을 우리 가족은 네 장짜리 올드 팝송 시디와 비디오테이프로 채웠다. 때로는 엎드린 채로, 때로는 무릎을 맞댄 채로 네 사람이 모여 앉아 시디에 딸린 가사집을 보며 ‘새드 무비’와 ‘인디안 보호구역’과 ‘에버그린’같은 팝송들을 따라 불렀다. 그러고도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비디오테이프를 틀었다. 되도록이면 짐을 만들지 않으려는 와중에도 엄마, 아빠는 동생과 나를 위해 텔레비전과 비디오는 챙겼던 것이다. <엘도라도>와 <스피릿>, <프리윌리> 시리즈와 <마틸다>, <스튜어트 리틀>, <몬스터 주식회사>를 보고 또 보았다.
물론 낮에도 시간은 많았다. 낮에는 주로 홈플러스 안의 영풍문고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나는 나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앉아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영풍문고 한 켠에는 음료와 아이스크림만 파는 작은 맥도날드가 있었다. 오백원 짜리 소프트콘을 하나씩 손에 들고 할짝거리는 것까지가 낮 동안의 주요 일과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리 밑으로 서늘한 공기가 스미고 창밖은 어둑어둑해 있었다. 나는 아빠 손을 잡고, 동생은 엄마 손을 잡고 오피스텔까지 걸어가는 동안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할머니와 장날마다 뻥튀기 기계 앞에서 귀를 막고 서 있던 내 이야기, 온몸에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려대는 통에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해 죽겠다고 했던 동생 이야기, 과외 수업 들어가기 전에 저녁을 먹고도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거절하지 못해 밤늦게 돌아와 두 번째 저녁을 먹곤 했던 엄마 이야기……. 아빠가 할머니는 이제 하늘의 별이 되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거라고 했으므로 우리 네 사람은 귀가 빨개진 채 하늘을 보고 걸었다.
다 큰 지금에야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잃고 헤맨 긴긴밤을 지나는 방식이었음을. 그리고 또 지금에야 겨우 짐작한다. 잘 굴러가던 대형 학원을 팔고 낯선 도시에서의 맨땅에 헤딩을 결심했던 30대 젊은 부부의 마음을. 긴긴밤을 지나온 이들의 이야기가 내 안 어느 곳에 켜켜이 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