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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Apr 05. 2023

'무비 브랫의 신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BEST 5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BEST 5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칼라 TV의 보급과 히피 운둥, 청년 문화의 유행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해결책이 시급했던 그들은 재빨리 젊은 영화인들을 스카우트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스튜디오에 들어와 이전 영화인들과는 차별되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한 일군의 젊은 영화인들을 '무비 브랫(movie brats)'이라 불렀다. 마틴 스코시즈, 스티븐 스필버그, 마이크 니콜스, 피터 보그다노비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등이 무비 브랫 세대의 대표적인 일원들이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영화와 드라마, 또는 연극 현장에서 제작 경험을 쌓았거나 영화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실무를 학습한 세대였다. 그들은 이미 영화 제작 현황을 알고 있었고 영화에 대한 소신 또한 굳건히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1970년대는 그 찬란한 세대의 화려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그 무시무시한 이름들 사이에서도 1970년대에만 한정한다면 가장 고점을 찍은 인물이다. 그의 동료들이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죠스>, <미지와의 조우>, <졸업>, <마지막 영화관>과 같이 굵직한 영화들을 내놓고 있었지만, 코폴라의 필모그래피는 그것을 뛰어넘는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1972년 <대부>를 시작으로 1974년 <컨버세이션>과 <대부 2>, 1979년 <지옥의 묵시록>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은 역대 영화사를 통틀어도 비견될 만한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1970년대 코폴라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경지를 써나가고 있는 천상계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영화를 줄곧 만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를 몰락이라 단정하며 비난하고 조롱했다. 같은 무비 브랫 세대의 일원인 스코시즈와 스필버그 등이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지금까지도 그 역량을 잃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코폴라의 이후 행보가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난과 조롱이 다소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1970년대 영화와 비교하면 이후 만들어진 영화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수준 이하였던 것은 전혀 아니다. <럼블피쉬>는 청춘 영화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도취적인 성향에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매력적인 괴작이며, <대부3>는 시리즈를 탁월하게 마감한 수작이다. <터커> 역시 경쾌한 리듬으로 실존 인물의 전기를 성실히 따라가는 뛰어난 영화이며,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테트로>, <트윅스트> 같은 영화들 또한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미장센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영화들이다. 그중에서 <테트로>는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고독과 불안에 대한 표현 등에서 거장의 터치가 확연히 느껴진다(카이에 뒤 시네마는 <대부3>, <테트로>, <트윅스트>를 각각 그 해의 영화 4위, 6위, 3위로 선정했다).


후기로 갈수록 개인적이고 형식적인 영화에 치중하면서 코폴라는 대중으로부터 멀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탁월한 예술성을 뽐내는 아티스트다. 대형 프로젝트로 알려진 다음 영화 <메갈로폴리스>가 나올 때 그의 대중적 위상이 어떻게 변화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 결과와 별개로 이미 전설적인 감독이지만.



5. 대부 3 (Mario Puzo's the Godfather Part 3) / 1990



꽤 많은 이들이 <대부 3>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지만, 나는 시리즈의 마무리로서 탁월한 미덕을 갖춘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피아 보스가 되었던 마이클이 끝내 딸을 잃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는 서사는 아주 자연스럽고 탄탄하게 전개된다. 간혹 뜨악한 부분들, 예컨대 친척 관계인 메리와 빈센트의 사랑, 그리고 시실리에서 만난 어른 돈 토마시노가 모든 해결책을 알려주는 대목 등이 아쉽긴 하지만 이러한 몇몇 결함이 영화 전체의 완성도와 유려함을 심각하게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특히, 메리와 빈센트의 사랑은 영화의 초반부부터 암묵적으로 성실하게 묘사되는 편이라 핍진성이 없다고 하기도 어렵다.


<대부 3>은 결국 마이클이 속죄에 실패하는 이야기다. 마이클은 불법을 합법으로 바꾸고, 폭력을 대화와 타협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그의 이상은 마피아 세계의 폭력적 관성과 불화하며 끝내 실패하고 만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오직 몰락과 타락의 항로만이 존재한다. 설사 겉보기에 상승하는 듯 보여도 내면은 철저하게 파괴되는 참혹한 세계. '피는 피로 갚는다.'라는 원칙이 단 한 번도 예외가 되지 않는 세계. 마이클은 "왜 저는 두려움의 대상이 됐을까요?"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내적인 여정을 펼치지만,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한다. 아니, 그에 대한 답을 모른 척 유보함으로써 참극을 겪게 된다. 친형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조건을 두고 내면의 두 자아가 충돌하며 어둠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요컨대 마이클은 대외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족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잃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마피아다.



4.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 1979



영화의 도입부, 폭탄이 떨어지는 베트남 전장의 모습과 잠들어 있는 윌라드 대위를 이중 인화로 보여주는 대목은 이 영화의 환각적이면서도 몽환적인 특색을 예고한다. 뒤이어 그의 슬픈 춤사위와 소리 없는 울음이 이어지고, 참전한 그의 모습이 사이에 틈틈이 삽입된다. 그러니까 지금 코폴라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실재의 참상을 윌라드 대위의 꿈, 그리고 환상과 겹쳐 놓으면서 다소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폴라는 멈출 생각이 없다. 그는 이 환각적 비전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 어떤 전쟁 영화에서도 찾기 힘든 초현실적 정조와 환각적 마력을 선사한다. 과장하자면 <지옥의 묵시록>은 마약 중독자의 환각 속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에서 윌라드 대위는 대부분의 시간을 관찰자의 자리에 머문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를 보는가. 말할 것도 없이 광인. "킬고어도 커츠 못지않은 정신병자에 살인광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런데 왜 커츠만 죽이려 할까?"라는 윌라드의 의문처럼 베트남은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광인들로 넘쳐나는 끔찍한 지옥이다. 윌라드는 그곳에서 인간의 광기, 다른 말로 파괴된 영혼을 본다. 흥미로운 것은 초반부 킬고어 대령이 서핑할 곳을 찾기 위해 정글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으며 베트콩들을 제거하는 대목을 제외하곤 별다른 교전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코폴라는 전투를 치르며 광인이 되어가는 '과정' 대신 이미 광인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망실된 영혼을 내밀히 들여다보는 쪽을 택한다. 돌이켜 보면 한때 전쟁 영웅이었던 미치광이 커트 대령을 만나러 가는 여정 자체가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여정 아닌가. 이는 참전이라기보다 영혼의 상실을 체험하는 내적 여정에 더 가깝다.


이미 미쳐버린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는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양상과는 전혀 다른,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국으로 전개된다.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의 외면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그 심연으로 깊숙이 들어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독보적인 동시에 무척이나 도발적이다. 전쟁의 재현이라는 문제에서 코폴라가 취한, 외면은 발라내고 그 심연으로 들어가는 모호한 양식에 대해 동의할 수만 있다면 <지옥의 묵시록>은 최상의 체험을 안겨다 줄 것이다.



3. 컨버세이션 (The Conversation) / 1974



<컨버세이션>은 <대부> 시리즈에 가려진 비운의 걸작이다. 197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다뤄지는 도청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이때 도청 행위는 비단 한 인간의 정신과 내면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포괄하는 사회의 감시 체제를 상징한다. 도청 의뢰를 받고 감행한 작전에서 우연히 살인 교사에 관련된 내용을 듣게 된 콜은 그로부터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거대 회사(사회와 시스템, 혹은 국가)에 대항하다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나약한 개인이라는 영화의 설정은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국가뿐 아니라 타인에 의한 감시도 일상처럼 행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감시 행위가 지닌 은밀한 속성과 억압의 가능성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쉽게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허용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문젯거리다. 주체가 국가든 개인이든, 그 목적이 숭고하든 비루하든 감시 행위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 걸까. 파고들수록 복잡해지는 이 쉽지 않은 문제를 <컨버세이션>은 탄탄한 서사와 다면적인 캐릭터를 내세워 탁월하게 전개시킨다.


특정 장면 안에서 일어나는 서스펜스는 순간에 머물지만, 심연을 관통하는 서스펜스는 작품 내내 이어진다. 도청 전문가인 콜은 삼중으로 문을 막아 놓고 출입자가 생길 경우 알람까지 울리도록 보안에 신경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를 뚫고 관리인이 생일 기념 술을 문 안에 놓아두는 불가해한 일이 벌어진다. 이는 그의 보안 체계가 누구에게라도 쉽게 뚫릴 수 있음을 선포하며 그가 언제든 위협에 휩싸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를 노리는 의문의 세력이 잠재해 있을 것이라는 심연의 서스펜스를 만들어 낸다. 이 하나의 장면으로 관객은 상상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스스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지경에 이른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제 더 이상 서스펜스를 인위적으로 직조하지 않아도 관객은 알아서 서스펜스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 가공할 만한 심연의 서스펜스는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서도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콜이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관객은 그의 고해를 듣고 있는 어둠 속 인물이 신부가 아니라 그를 감시하는 수행원일지 모른다는 의심에 빠지게 된다.


서서히, 그러나 묵직하게 우리를 옥죄는 심연의 서스펜스는 사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이미 예견된 바 있다. 광장의 인파 속에서 콜을 향해 서서히 줌인되는 줌렌즈의 움직임은 그 속도감에 있어 서스펜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컨버세이션>은 그 느린 속도감을 통해 한 인간을 서서히 잠식해버리는 감시 행위의 무시무시한 파괴적 잠재성을 부각시킨다. 이 속도감은 박람회 시퀀스에서 제시되는 감시카메라의 속도감과도 연결되는데, 천천히 좌우를 훑는 이 감시카메라는 영화의 엔딩에서 도청기를 찾기 위해 자택의 벽지를 다 뜯어낸 다음 쓸쓸히 색소폰을 연주하는 콜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패닝 속도와 동일하다. 구석 상단에서 천천히 좌우를 훑으며 콜을 내려다보는 이 카메라는 박람회 시퀀스의 감시카메라를 상기시키며 타인의 감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불안을 추출해낸다. 코폴라는 아주 미니멀한 요소로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을 만들 줄 아는 감독이다. 궁극의 서스펜스가 무엇인지 체감하고 싶다면 <컨버세이션>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2. 대부 2 (Mario Puzo's Godfather part 2) / 1974



신인 감독 격이었던 코폴라는 <대부>를 만들면서 언제든 해고될 불안과 각종 간섭 속에서 그야말로 악착같이 영화를 찍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부>가 유례를 찾기 힘든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대부 2>의 독점적인 연출권을 획득한다. 언터쳐블이 된 그는 그만의 독창적인 예술관을 끝까지 밀어붙였는데, <대부>에서 부분적으로 활용했던 교차 편집을 아예 서사의 형식으로 차용하는 비범한 선택을 감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역사를 대비시켜 세대의 문제를 조명하는 것은 물론 미국의 역사를 동시에 파헤치는 탁월한 이중의 서사 장치로 기능한다. 이 독창적인 플롯은 세대와 미국의 역사 양면에서 거듭 불화를 일으키는 마이클의 고립감을 배가하는 데에도 크게 일조하며, <대부 2>를 가장 쓸쓸하고도 비정한 갱스터 영화로 만들었다.


<대부 2>에서 마이클은 불법적인 사업을 합법화시키려 노력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마피아의 기업화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반대 세력이 출몰하게 되는데, 비극적이게도 여기에 그의 친형인 프레도도 동참하게 된다. 아버지 비토처럼 시업적인 면에서는 줄곧 승승장구하던 마이클이 가족이라는 가치에서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도 이 마피아의 기업화라는 거룩한 행보 때문이다. 결국, 마이클은 친형 프레도를 포함한 반대 세력을 전부 처단하고 가장 외로운 마피아 보스로 등극하며 자기만의 건국 신화를 써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피로 얼룩진 살육의 신화일 뿐이다.


코폴로가 <대부>에서부터 마피아라는 조직을 미국의 자본주의와 연결시켰던 것을 고려하면 그가 바라본 미국의 역사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예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아름답고 거룩한 가치가 아니라 외면의 성공을 위해 피를 묻히며 영혼을 파괴해야 하는 추악함에 다름 아니다. 지나친 우아함 때문에 마피아를 미화시킨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던 <대부>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대부 2>는 마피아의 세계를 보다 냉혹하고 현실적으로 재현한다. 여기에는 어떤 낭만도 환상도 없다. <대부 2>는 코폴라의 전체 필모그래피에서도 비장미가 가장 극에 달한 어두운 영화다.



1. 대부 (Mario Puzo's The Godfather) / 1972



"나는 미국을 믿습니다(I believe in America)."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대부>는 정확히 그 말을 뒤집으며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꼬집는다. 영화에 묘사되는 마피아는 자본주의에 대한 명확한 은유인데, 암흑가와는 거리가 멀었던 마이클이 마피아가 되어 주변 사람을 점차 잃어가는 몰락의 과정은 자본주의에 천착하며 점점 독단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끔찍한 양태와 사실상 동일하다. 두 세계가 유일하게 다른 점은 마피아가 집단 내 배신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마피아 내부에서 배신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마피아는 믿음을 저버리는 배반 행위를 철저히 단속한다. 그런 탓에 마피아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와 달리 어떤 낭만이 깃들어 있는 듯 여겨진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철저하게 천대받는 '믿음'이라는 가치가 미피아 내부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숭고한 철칙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 때문인지 코폴라는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 마피아가 미국보다 더 낫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코폴라가 <대부>에서 보여주는 연출은 거의 기적적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특히, 영화의 도입부인 결혼식 시퀀스와 후반부 살해 행위와 세례식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 유명한 교차 편집 시퀀스는 실로 놀랍다. 마피아에 속한 수많은 인물을 차례로 소개하며 마피아 가문의 위엄과 그들의 원칙을 동시에 설명하는 유려한 테크닉은 다른 영화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경지다. 여기서 카메라는 부정한 청탁이 오가는 실내와 결혼식이 열리는 화창한 외부를 철저히 단절시키며 선과 악, 빛과 그림자라는 두 세계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축조한다. 이때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던 마이클이 양쪽 세계에 발을 내딛는 순간 긴장감은 증폭된다. 이러한 공간의 대비는 후반부 마피아 보스가 된 마이클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을 처단하는 광경과 조카의 세례식에 대부로 참여하는 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대목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속적인 것과 가장 성스러운 행위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쫄깃한 서스펜스는 물론이고 순수했던 마이클의 몰락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영화에 완전히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누구도 여기서 눈을 돌릴 수 없다.


개인의 창의적 역량이 거대한 할리우드 시스템을 만났을 때 탄생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 그러니까 할리우드가 만들 수 있는 꿈의 영화가 바로 <대부>다. 코폴라는 할리우드에 하나의 이상을 제시했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성취한 이 귀한 사례는 언제 보아도 심장을 뛰게 만든다. 그야말로 걸작 중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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