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디자이너를 다시 정의하게 되는 이유
좋은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일까요.
예전에는 이 질문에 조금 더 쉽게 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용자를 잘 이해하는 사람, 문제를 잘 푸는 사람, 화면을 잘 만드는 사람.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답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질문은 더 어려워집니다. 실제로 제가 인상 깊게 봤던 디자이너들은 늘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어떤 사람은 사용자 맥락을 읽는 힘이 탁월했고, 어떤 사람은 기술을 이해하는 속도가 정말 빨랐고, 어떤 사람은 팀을 설득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유난히 좋았어요.
최근에 영화님의 글에서 좋은 디자이너를 여섯 가지 축으로 설명했어요. 사용자, 기술, 비즈니스, 문제 해결, 심미성, 커뮤니케이션. 익숙한 말들인데도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맞는 말이어서가 아니라, 이 여섯 가지를 한꺼번에 떠올리는 순간 디자이너라는 역할이 예전보다 훨씬 넓어졌다는 사실이 또렷해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글을 읽고 난 뒤에는 "좋은 디자이너는 누구인가"보다 "지금 우리는 어떤 디자이너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더 오래 생각하게 됐어요.
좋은 디자이너를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여러 축이 고르게 좋은 사람이 더 좋은 디자이너일까, 아니면 한 축이 아주 선명한 사람이 더 경쟁력 있을까.
저는 한동안 균형 쪽에 더 마음이 기울어 있었어요. 실무에서는 한 가지만 잘해서는 자주 막히니까요. 문제를 잘 짚어도 구현 감각이 없으면 답답해지고, 미감이 좋아도 비즈니스 맥락을 모르면 설득력이 약해져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고르게 좋아야 한다는 말에 쉽게 동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팀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요. 막상 같이 일할 사람을 찾을 때는 고르게 잘하는 사람보다 어떤 한 축이 유난히 선명한 사람이 더 절실할 때가 있어요. 사용자 언어를 정확히 번역해 주는 사람, 복잡한 기술을 제품의 언어로 바꿔주는 사람, 흐릿한 방향을 끝까지 정리해 주는 사람. 이런 사람은 팀 안의 빈자리를 바로 채워 줍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좋은 디자이너는 균형형과 특화형 중 하나라기보다, 기본 체력을 갖춘 상태에서 자기만의 강한 축을 가진 사람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고요.
모든 축이 다 뛰어나야 한다는 말은 멋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지나치게 평평하게 만들기도 해요.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은 기본은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떤 한 지점에서 분명히 다른 힘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디자인은 문제 정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익숙하게 배워 왔습니다. 지금도 그 말은 여전히 중요해요. 좋은 문제 정의 없이 좋은 해결이 나오기 어렵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AI를 다루는 제품을 보다 보면 늘 같은 순서로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이 생겨요. 분명한 문제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진다기보다, 지금 이 기술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만져보는 과정에서 아예 새로운 사용 방식이 보이기도 하거든요. 예전에는 없던 경험이 생기고, 그제야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겠구나"가 보이는 거예요. 예전에는 문제를 푸는 사람이 디자이너라면, 지금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실험하는 사람도 디자이너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물론 기술에서 출발하면 위험도 있어요. 되는 것을 보여주는 데 몰입하다 보면 왜 이걸 만들어야 하는지,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건 문제 중심이냐 기술 중심이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감각인지도 모르겠어요.
문제를 보는 눈이 있어야 공허해지지 않고, 기술을 읽는 감각이 있어야 상상력이 닫히지 않아요. AI 시대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건 문제를 잘 정의하는 익숙한 역할 위에, 기술 가능성을 빠르게 실험하고 해석하는 태도가 더해진 모습에 가까워 보여요.
디자이너의 역할이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늘 조금 복잡해져요.
이제 디자이너는 화면만 그리는 사람으로 설명되기 어려워졌어요.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사업 구조를 봐야 하고, 실행 방식과 운영 맥락까지 함께 생각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가 꽤 반갑게 느껴졌어요. 더 넓은 판단을 할 수 있고, 더 앞단의 질문을 다룰 수 있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조심스러운 마음도 들어요. 역할이 넓어진다는 말이 곧 무엇이든 다 해야 한다는 말처럼 쓰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가 비즈니스도 알아야 하고 기술도 이해해야 하며 커뮤니케이션도 잘해야 한다는 말은 맞아요. 다만 그 말이 모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몰아도 된다는 뜻은 아닐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역할의 크기보다 역할의 중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디까지 하느냐보다 무엇을 놓치지 않는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디자이너는 사람의 경험을 중심에 두고 문제와 기술과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화면 바깥으로 나가되, 왜 이 일을 하는지까지 잃어버리지는 않는 사람. 지금 필요한 디자이너는 그런 균형을 가진 사람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좋은 디자이너는 화면을 잘 만드는 사람일 수도 있고, 문제를 깊이 읽는 사람일 수도 있고, 기술과 사업을 연결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아마 그 답은 팀마다, 시기마다, 맡은 문제마다 조금씩 달라질 거예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여요. 이제 좋은 디자이너를 하나의 능력으로 설명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디자인이라는 일이 얼마나 넓고 살아 있는 역할인지 보여주는 의미 같아요.
그래서 저는 요즘 좋은 디자이너를 정답을 가진 사람보다, 상황마다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에 가깝게 생각합니다. 사용자를 보되 기술을 놓치지 않고, 기술을 보되 비즈니스를 외면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보되 결국 사람이 쓰는 경험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좋은 디자이너의 기준이 흐려진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봐야 할 장면이 훨씬 많아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6년 Config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면 알려주세요!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