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도 삶은 계속된다
《상식과 교양으로 읽는 중국의 역사》 4장, p63에 보면 ‘난세에도 삶은 계속된다’라는 소제목으로 내용이 펼쳐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삼국지’를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저 제목만 알고 있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기억은 없다. 이름만 익숙한 등장인물들 [조조, 유비, 관우, 제갈량]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이번 챕터는 삼국~남북조 시대를 다룬 이야기였다. 그런데 너무 어려웠다. 낯선 이름들과 전쟁의 흐름이 복잡하게 얽혀, 읽어 내려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놀라웠던 건 역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의 차이에 대한 부분이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구절이 있었다.
삼국연의의 소설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p65) 내용을 읽으며,
저자가 역사의 사실과 그 해석에 얼마나 초점을 두고 있는지를 느꼈다.
한때 번역을 배우던 시절, 번역하려면 ’ 삼국지‘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역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수록 오히려 멀어졌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늦게나마 흥미를 가지고 책을 펼치지만, 여전히 낯선 단어와 복잡한 이름들이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전쟁 역사보다는 궁중사나 문화사에 더 끌린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결국 그 시대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왕조가 세워지고 무너지고를 반복하는 동안, 이름 없는 사람들은 그저 하루를 버텨내려 애썼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왕조가 있었다면, 어쩌면 모든 중국인들에게도 왕족의 피가 조금씩 흐르는 건 아닐까?’ 한순간 그런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곧, 그들의 피보다 그 시대를 살아낸 백성들의 노고에 더 마음이 갔다.
그 시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을 택한 도연명의 선택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가 쓴 〈귀거래사〉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천지에 이 몸을 기탁할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마음 가는 대로 내맡기지 않고 안절부절 어디로 가려하는가?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신선이 사는 곳은 바랄 수가 없다니.
좋은 날이면 홀로 거닐면서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하고,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맑은 물가에서 시를 짓기도 한다.
애오라지 자연의 조화를 따르다 삶을 마칠 것이니, 천명을 즐기되 무엇을 더 의심하리?” (p75)
“마음 가는 대로 내맡기지 않고 안절부절 어디로 가려하는가?”
이 구절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나 역시 지금, 마음 가는 대로 내맡기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문장을 읽는 동안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해 멍하니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 내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마 혼란의 세상 속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을 숨겼을 것 같다. 요즘처럼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까”라는 고민 대신, “오늘은 어떻게 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겠지.
예전에 들은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6.25 전쟁 중, 남한, 북한 중 어느 쪽이 그 지역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국기를 바꿔 달았다고 한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그때의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위진남북조시대 배경으로 만들어진 중국 드라마 [금수미앙]의 여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을까?
수많은 배신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는 삶보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물론 오늘의 세상도 혼란스럽다.
하지만 생명의 위협이 있는 전쟁이 아닌 세상, 글을 읽고 사유할 수 있는 평화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난세에도 영웅은 나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지금의 세상에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선하게 세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