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빠른 말썽꾸러기 어리광쟁이 겁많은 막내고양이
치노가 떠난 이후 레오는 날마다 치노를 찾아다녔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울었고, 나에 대한 분리불안도 심해졌다. 분리불안에 대한 해결책으로 절대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 혼자 있는 것을 명백히 외로워하고 다른 고양이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본 내 선택은 둘째 들이기였다.
원래 입양하고 싶었던 프레즐과 크림. 하지만 둘 중 누굴 입양한단 말인가? 크림이는 조용하고 순둥해서 성격이 잘 맞고 낯을 익힌 내가 입양하는 게 적합할 것 같았다. 프레즐은 말이 많고 참견쟁이에 싫을때는 발톱을 세우지만, 레오와 둘도 없던 사이였고 나를 매우 좋아했다. (물론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둘 중 누구를 먼저 데려오더라도 남은 한 마리에게 못할 짓인것 같았다. 그렇다고 둘 모두를 동시에 입양하자니 좁은 방에서 세 마리 고양이를 기르는 것 또한 못할 짓 같았다. 한참 고민하던 나는 제 3의 길도 생각하게 되었다. 아예 다른 고양이를 입양하는 것이다.
크림, 프레즐, 새로운 고양이. 세 가지 생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일매일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점령했다. 정말 크림이와 프레즐을 데려올 수는 없는걸까 고민하면서도 나는 매일 루틴으로 포인핸드 어플과 인스타그램의 입양홍보 계정, 고양이 카페의 입양홍보 게시판을 살폈다.
세상에는 어찌나 예쁘고 안타까운 고양이들이 많은지! 마음같아서는 고양이 헤븐을 지어 이 땅의 모든 고양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지만 불가능하니, 최소한 둘째로 들일 고양이에게만은 천국처럼 잘 대해주겠노라 다짐했다. 임보집사님들이 작성해주신 고양이의 성격 등 특징을 읽으며 내가 데려올 경우 어떤 관계가 될지 계속 상상해보았다. 한두달 정도를 그렇게 찾아다녔을 때였다. 인스타그램에서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보았다.
망충한 눈빛과 치즈색 코트, 순수한 얼굴. 프레즐, 크림이와 같은 치즈색 고양이였다. 길냥이었던 엄마가 로드킬을 당해 츄르별로 떠나고 형제들과 구조되었다는 이 작은 고양이는 단숨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껏 수많은 고양이 사진들을 보면서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끌렸던 적이 없었는데, 유독 자꾸 시선이 가고 입양 홍보 글을 몇번이나 정독하게 되는 아기였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거리가 너무 멀었다. 거의 남한의 끝과 끝이었던 지라 운전면허증도 없었던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인스타그램을 끄고 네이버 카페에 들어갔다.
고양이 네이버 카페의 입양홍보 게시판에 들어갔을 때였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글이 바로 이 아기 고양이 글이었다. 어쩐지 묘연처럼 느껴졌다. 거리가 멀지만 일단 한 번 입양문의를 보내보기로 했다. 다행히 임시보호 집사님께서 데려다 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입양하고 난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모카의 임시보호 집사님은 내가 성심껏 작성해온 입양신청서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씀해주셨다.
20년 5월 3일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남매들은 한창 젖을 먹을 때에 엄마를 잃었다. 그중에서도 유일한 여아였던 모카는 셋 중 마지막까지 입양을 못가고 있던 아이였다. 나머지 둘은 다행히 한 가정에 입양을 가서 지금도 잘 지내는 중인데, 가끔 사진을 보면 감자와 똑 닮게 커서 깜짝깜짝 놀라곤한다.
입양 날짜가 정해졌다. 20년 7월 26일이다. 급하게 구조되긴 했지만 남매들은 모두 곰팡이성 피부병변인 링웜을 앓고 있었다. 약을 바르고 꾸준히 소독을 해주면 금방 낫긴 하지만, 그만큼 한 번 걸리면 재발이 쉬워 신경을 써야하는 병이다. 우리 집에는 레오가 있기 때문에 웬만큼 링웜이 잡혔을 후인 1달쯤 후로 날짜를 정했다. 중간에 직장에서의 스케쥴이 계속 바뀌어서 방문 날짜가 몇 변 변경되었다. 입양한다고 해놓고 취소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만큼 임시보호 집사님께서도 걱정이 꽤 돼셨을거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감자를 입양하기로 한 내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입양 날이 다가왔다. 나는 미리 신청해둔 휴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모카가 오면 제일 먼저 냄새를 맡아 적응하게 해야겠다. 울타리로 분리해둔 격리구역에는 기존에 먹던 사료를 사두었으니 먹도록 유도해야지. 화장실도 잘 가린다고 했으니 위치만 알려주면 쓸테고, 다묘가정이었던 임시보호 집에서도 다른 고양이들과 잘 지냈다고 했으니 레오와도 잘 지내주면 좋겠다! 방문이 끝나면 바로 병원에 가서 예방접종을 맞춰야지.'
떨리고 설레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모카를 기다렸다. 처음 집에 온 모카는 원래 자기집이었던 것 처럼 활발하게 잘 뛰어다녔다. 아기고양이 특유의 용감함으로 신나게 기웃거리던 모카를 레오는 처음부터 반겨주었다. 그루밍 해주려는것을 말리고 떼어놓자 슬프게 울며 모카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첫만남부터 합사가 성공해버렸다.
사실상 모카는 기존 집에서 이미 격리를 끝내고 다른 고양이들과 합사를 하다가 왔기때문에 우리 집에서의 격리도 무의미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고양이 커뮤니티에 물어보니 바로 합사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격리용 울타리를 준비해놓기는 했지만 만약 건강검진을 갔을 때 수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시면 바로 합사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했다.
임시보호 집사님과 함께 병원에 갔는데 고양이보다 강아지를 주로 진료보시는 수의사 선생님만 계셨다. 나와는 몇 번 만난적이 없는 선생님이었는데, 정석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엄격한 분이라 입양 당일 병원에 온 것을 가지고 엄하게 말씀하셨다.
"구조가 된거라면 새로운 집에서 1-2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예방접종을 맞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전 집에서 이미 세 달 가량 지내다 왔는데도요?"
"저는 주사 못놔주겠으니 일 주일 후 재방문하세요."
순식간에 혼나고 내쫓겨 얼이 빠진 채로 임보집사님과 집에 돌아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원칙을 따르는 것이 고양이를 위해서도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레오와 모카와의 동거가 이렇게 얼레벌레 시작했다.
모카는 격리용으로 마련해놓은 울타리 따위는 아주 손쉽게 부수거나 뛰어넘어 탈출했다. 치노처럼 화장실에 격리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울타리를 준비해뒀는데 전부 소용없게 되었다. 가장 편하고 기상천외한 곳을 점령하는 이 아깽이는 처음보는 사람인 내가 뭐가 그리 좋았는지 졸졸 쫓아다니고 같이 있으려고 다가왔다.
우리집에 올 당시 모카의 링웜은 거의 나은 상태였다.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마지막까지 치료받던 부위를 하루 두 번 소독할 수 있도록 임시보호 집사님께서 소독약과 솜까지 챙겨주셨었다. 그렇게 일주일 가량 소독해주자 전부 치료가 된 것 같았다. 나만의 착각이었다.
침대에 누워 당시 숏컷이었던 머리카락을 끌어모아 옆에 펼쳐두면 모카는 그곳에 둥지를 트는 것을 좋아했다. 심심하면 내 머리카락을 씹기도 했다. 초면에 내 머리카락에 올라온 모카를 봤을 때는 귀여웠지만, 씹어먹는 것은 충격이라 아예 머리카락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러자 모카는 배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때 쯤이었다. 이따금씩 윗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웠다.
'혹시 모카의 링웜이 덜 나아서 옮은 것 아닐까?'
걱정되어 몇번이고 간지러운 부분을 살폈지만 피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안심하고 잊을만 할때쯤 또 죽도록 간지럽길 수 차례, 어느 날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윗배에 동그란 병변이 생겨있었다. 즉시 링웜 후기들을 찾아보았고, 인간이 링웜에 걸렸을 경우 나와 똑같은 모양의 병변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피부과에 가서 약을 받아먹으며 연고를 발랐다. 다행히 퍼지기 전에 발견해서 링웜이 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문제는 고양이들이었다. 한 번 걸리면 면역력이 떨어질 때마다 재발된다는 링웜. 치료는 쉽지만 완치는 어렵다는 링웜에 레오까지 옮았을까봐 걱정이었다.
두 마리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각각 다른 캐리어에 넣어서 이고지고 어디에 부딪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고 대답을 해주며 힘겹게 병원에 도착했다. 검진 결과 레오는 오른쪽 귀 끝, 모카는 왼쪽 뒷다리쪽에 희미한 병변이 있다고했다. 집에 소독약이 있다고 말씀드리니 소독을 잘 하도록 설명해주셨고, 이후로는 우리 셋 모두 재발 없이 잘 지내는 중이다.
나는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이라 모카의 이름도 바꿔주고 싶었다. 모카라는 이름은 귀여웠지만 이왕 바꿀거라면 더 커서 자기 이름을 알아듣기 전에 바꿔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임시보호 집사님이 지어주신 모카라는 이름도 찰떡이고 소중하지만, 바꾸고 싶은 욕심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모카에게 결정을 맡겼다.
기존 이름인 모카를 포함하여 '밀과 보리가 자라네' 노래에서 따온 미리, 보리, 감자, 금손 등의 이름을 적은 종이에 간식을 넣어 한꺼번에 던져주었다. 그 중 고양이가 직접 고른 이름은 '감자'. 그 날부터 모카에서 감자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오레오에 이어 오감자 고양이가 된 날이다.
감자는 말괄량이에 장난기가 많으면서도 눈치가 빠른 성격이었다. 개수대 위에 올라가는 것이 위험해 교육을 시켰지만 레오는 나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그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감자는 초기부터 아주 교육을 시켜놓으리라 다짐했다. 초기교육이 잘 통한건지 아직도 감자는 내가 "습-" 소리를 내면 눈치를 보며 후다닥 도망을 간다. 하지만 내겐 고양이의 습성을 아주 만만하게 봤다는 죄가 있다. 내가 싫어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들키면 도망만 갈 뿐이지, 눈치를 보며 할 짓은 다 하는 고양이로 훌륭히 자라난 감자. 이제는 그냥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레오가 나를 '힘들 때 도와준 믿을만한 인간'으로 여기며 따라줬기 때문에 나는 이런 고양이-집사 관계가 정석인줄 알았다. 내가 약을 먹이든 뽀뽀를 퍼붓든 참아주는 레오가 유난히 순하다고 인식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유튜브나 SNS에서는 스스로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간다거나 양치할때 입을 벌려주고, 발톱을 깎을 때 손가락을 펴주는 등 정말 순한 다른 고양이도 많았기 때문에 레오의 순함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감자와 맺어가는 애착관계는 또 다른 유형의 것이었다. 감자는 나를 그냥 우두머리 고양이로 여기는 듯 하다. 놀아주면 좋겠고, 간식을 주면 좋겠는 커다란 고양이.
아깽이답게 활력이 넘치는 감자는 놀이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임시보호 집사님께 전해들은 감자가 제일 좋아한다는 데빌 스네이크 장난감을 미리 마련해두었다. 낚싯대를 휘두르면 1M 높이도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대어가 낚였다. 축구도 좋아해서 굴러가는 장난감을 두면 혼자서 잘 차고 놀았다. 레오와 우다다도 즐겨했다. 하도 재미있게 달려다니길래 나도 끼고싶어서 구석에 숨어있다가, 고양이들이 우다다 달려 지나갔을때 웡! 놀래키며 "깜짝 놀랐지!" 하고 두 팔을 번쩍 들었으나 레오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루밍을 하고, 감자는 '낄 데 끼고 안 낄 데도 끼시네요.' 하고 핀잔주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우다다가 끝난적이 있다. 민망한 경험 이후로 다시는 레오와 감자의 우다다에 참견하지 않는다.
감자와의 관계는 보통 이런 식이다. 먼저 다가와서 배 위에도 올라오고 다리 위에도 올라온다. 궁디팡팡도 받고 예쁘다고 칭찬도 받지만 칫솔질, 목욕, 발톱깎기의 '고양이와 사이 멀어지기 3종 세트'는 물론 내가 먼저 다가가기만 해도 질색을 했다. 손을 뻗으면 감자 특유의 "깨깨"우는 목소리로 싫다고 하고, 자기가 원할 때 놀아주지 않아도 "깨!" 하며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까지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다.
눈치는 어찌나 빠른지 내가 영양제를 먹이려고 '감자 잡아야겠다' 생각만해도 우다다 뛰어서 도망을 가고 숨어서 눈치를 본다. 운동량이 많은 고양이답게 근육도 있고 몸도 날쌔서 잡기가 어렵지만 막상 잡히면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는다. 다만 레오가 평상시 러브바이트를 하다가 싫은 일에는 참아주는 것과 반대로 감자는 평상시에는 날을 세우지 않다가 싫은 일에는 발톱을 드러낸다. 상처를 주려기보다는 반항할 때 저절로 튀어나오는 듯 하다.
무릎냥이는 많은 인간들의 로망이다. 레오는 밖에서는 무릎에 잘 앉아주더니 집에 온 후로는 잘 앉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온기가 해결되니 불편한 인간의 다리 위에 앉을 생각이 딱히 없는 모양이다. 나도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그래서 감자에게도 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감자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무릎에 잘도 앉아주는 훌륭한 무릎냥이로 성장했다.
감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단연 집사의 화장실이다. 딱딱하고 서늘한 타일바닥의 감촉이 마음에 드는건지, 평소에 자주 가지 않는 장소인 점이 마음에 든건지, 두루마리 휴지가 걸려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감자는 처음 집에 왔을때부터 화장실과 화장실 문 앞을 굉장히 좋아했다.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이 생기면 화장실 안쪽에 물어다놓고, 사냥놀이를 하고 쉴 때에도 화장실의 찬 타일 바닥에 가서 드러눕는다. 평상시에도 화장실 문 앞 규조토 매트 자리를 가장 좋아한다.
이 때문인지 내가 화장실에 가면 감자는 '자신을 예뻐해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화장실의 하얀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세상의 발전을 위한 고뇌를 하고 있노라면 감자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얼른 무릎에 뛰어올라온다. 나는 의자에 앉을때면 한쪽 종아리가 반대쪽 무릎에 닿는 자세를 취하는 버릇이 있는데, 감자는 이 다리의 높이 차이를 좋아한다. 상반신이나 하반신이 더 높은 자세를 좋아하는 고양이이니 이토록 기분좋은 자세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 책상처럼 머리에 걸리는 것도 없고, 레오는 화장실에 들어왔다가도 금방 나가니 자기 뿐이고, 일단 눌러앉으면 집사가 본인을 위해서라도 한참을 더 앉아있곤 하니 감자가 애교부리기엔 딱인 시간이다.
집 안에서도 집착수준으로 나를 따라다니는 레오지만 화장실만은 잘 따라오지 않는다. 하지만 감자는 다른 곳은 몰라도 내가 화장실에 가면 반드시 문 앞에서 기다려준다. 한 번은 목욕을 끝내고 나왔는데 레오만 나를 기다리고 있고, 웬일로 감자가 없었다. 혼잣말로 "어? 감자가 어디갔지?" 중얼거렸더니 자기도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던 감자가 자기를 부르는 것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서 반겨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길에서부터 이름을 알아듣던 레오는 물론 감자까지도 자기 이름을 알아듣는 것을 알게됐다.
레오가 나를 굉장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에 비해 감자는 나를 그냥 동거인 정도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누워있긴 해도 감자는 크게 응석을 부리거나 애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레오는 독립적인 성격이기는 해도 먼저 "날 예뻐해줄 시간이야!"하고 하루에도 몇 번 씩 요구하거나, 관심을 받기 위해 컴퓨터를 가리거나 솜방망이로 나를 톡톡 건드린다. 하지만 감자는 놀이시간만 충족되면 먼저 들이대지는 않는다. 외출했다 귀가하면 반가워서 달려오긴 하지만 너무나 흥분해서 적극적이다못해 광적인 레오의 애정공세에 밀려 주변을 맴돌며 슬쩍 머리나 엉덩이를 들이밀곤 했다. 그게 안쓰러워서 몰래 조금 더 두드려준 것은 레오에겐 비밀로 하자.
하지만 이렇게 안쓰럽다가도 막상 내가 다가가면 질색팔색을 하는 것도 감자 고양이가 맞다. 레오는 언제든 내가 다가가면 너무나 좋아하지만, 감자는 자기가 먼저 다가올 때 외에 내가 먼저 스킨십을 시도하면 짜증을 내며 훌쩍 떠나버린다. 그래서 감자가 먼저 다가올 때에 최선을 다해 예뻐해주지만 그것도 너무 호들갑스러우면 금방 짜증을 내므로 최대한 여상스럽고도 점잖게 대해야한다.
하지만 감자가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다. 감자는 원래 사람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아이였다. 심지어는 예방접종을 하러 병원에 가서도 수의사선생님을 보고 사람이라고 신나서 가릉대곤했다. 그런 감자가 중성화 수술을 했을때의 이야기다. 감자는 마취약이 덜 풀렸는지 집에와서도 멍하니 앉아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두커니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안쓰러워 뭔가 해주고싶어도 다가가면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굉장히 화를 냈다. 예민한 상태에서 흥분시키지 않으려고 서랍을 열었고, 아주 특별한 상황에만 열리는 그 곳에서 감자는 내 옷을 깔아뭉개며 하루종일 회복했다. 숨숨집을 놔두고 굳이 서랍을 열어준 것은 감자가 좋아하지만 금지된 장소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회복하고 나온 감자는 다시 활발해졌지만, 인간을 불신하게 되었다. 좋아하던 병원사람들에게도 배신당하고, 믿었던 집사에게도 배신당해 충격이 컸던지 인간이 다가가면 그저 도망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눈치가 어찌나 빨라졌는지 약을 먹일 생각만해도 벌써 도망치고 없다.
하지만 이런 감자도 나를 믿고 의지하는구나, 느낀 적이 있다. 자꾸만 설사를 해 병원에 갔을 때다. 레오 언니와 떨어져 혼자 병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그날따라 강아지 환자가 많았다. 심지어 모두 불안했는지 왕왕 컹컹 짖고 낑낑 울어댔다. 물론 1인용 고양이 진료대기실이 따로 있긴 했지만 가벽 너머 들리는 끔찍한 소음의 도가니에서 혼란스러웠던 감자는 코가 붉은색이 되고 숨을 빠르게 쉬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내 손이 닿으면 또 짜증이 나서 더 싫어할까봐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빠르게 숨을 쉬자 걱정이 되어 결국 이동장에 손을 집어넣고 말았다. 등과 배를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토닥토닥 해주는데, 감자가 머리를 내 손 안에 들이밀었다. 그렇게 한 손은 눈과 귀를 감싸 숨겨주고, 다른 손으로는 등을 쓰다듬었다. 놀랍게도 감자의 호흡이 눈에 띌 정도로 안정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집사라고 의지하고 있긴 했구나 느껴 참 감동받았던 기억이다.
덧붙이자면 감자의 설사는 사료 알러지 때문이었다. 같이 구조된 감자의 다른 형제들 역시 음식에 알러지가 심해 처방사료만 먹고 간식도 굉장히 제한적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종종 발바닥 습진 혹은 턱이 붓거나 귀 쪽에 털이 빠지거나 심한 설사를 하는 등 알러지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아무래도 셋 다 식이알러지 유전을 물려받은 것 같다. 감자는 형제들만큼 심하지는 않더라도 알러지가 없진 않아서 평생 잘 관리하며 돌볼 생각이다.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레오. 곰곰히 생각하면 참 집사와 닮은 구석이 많다. 나도 렌즈가 나를 향하면 피하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감자는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뿐만 아니라 집사 손에 장난감만 들려있다면 그걸 쳐다보느라 예쁜 자세를 곧잘 취해준다. 평소 우다다와 캣휠로 만들어진 길쭉한 다리와 늘씬한 등, 장난감만 바라보는 성향 덕분에 감자는 고양이계의 묘델로 데뷔할 준비를 하고있다.
이렇게 감자는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처음에 본 입양홍보 사진으로는 감자의 사진이 크림이의 색과 비슷했다. 사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 것도 있다. 그러나 필터없이 실물로 만난 감자는 치즈색도 아닌 정말 진한 감자색이었다. 사진에서 자세히 보지 않아 미처 몰랐던 꼬리도 꺾여있었다.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전혀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사진으로 처음 만났을때부터 실물을 본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감자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레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감자와의 첫 대면식에서부터 핥아주려고 먼저 다가갔을 정도니까. 감자가 어렸을 때에는 내향적인 레오가 외향적이고 혈기 넘치는 감자를 감당하기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아깽이를 지나 캣초딩과 청소년기를 거쳐 훌륭한 어른 고양이가 된 감자는 조금 의젓해졌다. 비록 집사가 청소기를 실수로라도 건드리면 깨깨 울며 베란다로 도망가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오가 나보다 더 감자를 사랑하는 것 같다. 레오가 나보다 더 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감자가 난리법석을 떨며 오바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나는 '왜 저래?'하고 쳐다보지만, 레오는 걱정되어 다가가 핥아준다. 목욕을 하거나, 발에 이물질이 묻어 씻겨주거나, 양치를 시키거나 약을 먹일때도 마찬가지다. 엄살쟁이 감자는 집사 손에 잡히는 순간부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조건 죽는다고 깨깨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면 눈이 휘둥그레진 레오가 날듯이 달려와 주변을 맴돌며 안심시키기 위해 애웅애웅 운다.
"깨-"
"애웅-"
"깨애-"
"아웅-"
고양이들의 이중창에 갇힌 나는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짓기 위해 더욱 손을 빠르게 놀린다. 감자의 엄살이 클라이맥스에 달하면, 레오는 안절부절 못하며 감자를 구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한다. 나를 여기저기 깨물고, 발톱을 세워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오려고 하거나, 솜방망이를 휘둘러 내 손을 막으려한다. 레오가 이렇게 애지중지 지켜낸 감자는 반대로 레오가 당하는 시간이 오면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천하태평이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있자면 레오에게 고맙고 기특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고, 감자는 귀엽고 약간의 괘씸함이 느껴져 그저 웃고만다. 고양이들은 오늘도 나를 웃게한다.
감자를 입양함으로써 크림이와 프레즐을 입양하는 일은 조금 더 미뤄지게 됐다. 하지만 나는 감자를 입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영원히 사랑받을 고양이, 영원히 아기같은 고양이. 감자 고양이야, 영원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