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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May 15. 2022

15 행삼이와 춘식이

고양이 한 마리의 집사는 모두의 집사

얼룩이


 얼룩이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10월 9일이었다. 새벽 5시 반의 이른 출근길,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두운 아파트 단지. 옷깃을 여미고 차가워지는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말정말 출근하기 싫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왜앵앵앵!"


 어디선가 고양이 소리가 들려 잠깐 멈춰 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양이를 좋아하고 모시게 된 후로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곤 했다.


 하지만 얼룩이는 보지 않을래야 그럴 수 없는 고양이였다. 왱왱왱 울면서 나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배고프다고?"


 제2 외국어로 냥국어를 조금 배워둔 나는 말귀를 대충 알아듣고 품에서 츄르를 꺼내 주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츄르를 먹는데, 마음이 급해 입구를 다 씹어먹었다.


 개인적으로 길고양이가 여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여태껏 길고양이들에게만 츄르를 줘와서 그런지, 입구를 씹어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잔뜩 구멍이 뚫려 사방팔방으로 츄르가 새어나가 짜주기가 불편해도 그냥 그게 고양이들의 방식이구나 하고 여겼다.


 그런데 레오를 입양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집에 와서도 한동안 츄르 입구를 씹던 레오가 점차 입구에서 나오는 대로 핥아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집사가 자신을 위해 남김없이 짜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고양이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눈앞의 집사가 금방 자리를 피할까 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먹기 위해 경쟁하듯 씹어먹던 버릇이 없어지면서 나도 깨닫게 되었다. 길고양이들이 츄르를 씹어먹는 것은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라고.


 얼룩이는 내가 본 길고양이 중에서도 특히나 구멍을 많이 내며 씹어먹는 고양이였다. 반도 채 주지 못했는데 벌써 입구가 너덜너덜해져서 짜주기 어려웠다.


 한 개를 다 먹고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왱알거리며 나를 쫓아와서 한 개를 더 주었다.


 출근 시간이 촉박해 자리를 뜨려 하자 얼룩이는 황급히 나를 따라 뛰다가 길을 막고 발라당 드러눕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뜻하는 바가 명확했지만 미안하게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지각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크림치즈프레즐을 통해 길고양이는 사람 손을 타지 않고 야생성과 경계심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것이 좋겠다는 나의 지론에 따라 얼룩이가 그 이상으로 사람에게 신뢰를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발을 쿵쿵 구르며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에도 걱정되어 자꾸 돌아보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얼룩이는 울며불며 내게 매달리듯 쫓아오다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즈음에야 포기하고 돌아갔다.










삼색이


 삼색이를 처음 만난 것은 21년 3월 4일이었다. 갓 독립한 티가 팍팍 나는, 아깽이 티를 간신히 벗은 작은 고양이었다. 레오와 똑같은 삼색 고양이에 레오를 처음 만났을 때 같은 나이였기 때문에 행삼이를 보고 레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색이는 아파트 1층에 거주하시는 어떤 천재 집사님이 내어준 실외기 자리에서 만났다. 아직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으신 건지, 실외기 공간이 넉넉해 담요와 식사 거리를 놓을 자리가 충분했다. 감사하게도 누군가 집을 준비해주셔서 얼룩이를 만났을 때보다는 안심이었다.


 딱 그 나이 때 고양이답게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과 호기심으로 주위를 맴돌았다. 약간의 경계심을 동반한 채여서 너무 사람에게 친화적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나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미 손을 탔는지 먼저 다가와 애교를 부렸다. 넉살 좋게 손을 베고 누워 눈을 감고는 잘 준비를 하기도 했다. 이미 고양이를 구경하고 있던 동네 모르는 꼬마 둘을 불러서 츄르를 나누어줬다. 마침 같이 있던 얼룩이도 같이 츄르를 하나씩 나눠먹었다.


 레오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레오도 딱 요만했는데, 레오는 더 앙칼졌는데, 레오랑 무늬가 비슷하네. 그 이후로도 삼색이는 종종 보이더니 자취가 뜸해졌다. 출근이나 퇴근마다 일부러 빙 둘러서 그쪽을 지나다녀봤지만 점점 마주치는 일은 적어져 갔다. 다만 물과 밥자리는 정해져 있으니, 배곯지 않고 몰래몰래 잘 먹으며 다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후로도 얼룩이는 가끔씩 나타났다. 때로는 자주 나타나다가 한동안 뜸하기도 했다. 나는 출퇴근길에 고양이가 어디에 있으려나 두리번거리며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풀숲 뒤에 숨어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살며시 캔을 따주기도 했다. 물론 발견되면 즉시 잠에서 깨어 다가왔다.


 웬만하면 절대 집을 나서지 않는 내가 비가 오는 날에 굳이 편의점에 가며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어디서 비를 잘 피하고 있으려나, 혹시 숨을 장소를 몰라 비를 다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진 않을까. 크림치즈프레즐을 돌볼 때도 비나 눈이 오는 날을 싫어하곤 했는데, 이곳에서조차 날씨에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자조적인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얼룩이는 눈치 빠르고 똑똑해서 비를 잘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때로는 자전거 보관함에, 때로는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계단에, 때로는 코로나19로 막힌 놀이터에 있었다.



21년 5월 16일
5월 16일은 비가 내렸다. 살려달라고 쫓아오는 고양이를 거절해 너무 속상한 마음이었다.
21년 7월 7일. 오작교가 얼룩이와 나를 만나게 해준걸까?
21년 7월 12일






 카오스 삼색이를 다시 만난 것은 21년 7월 27일이었다. 근 4달만의 만남이라 처음에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밤샘 작업 후 아침에 퇴근하던 중이라 제정신이 아니었고, 청소년 고양이였던 삼색이는 어느덧 세상 풍파를 맞은 표정으로 나를 대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동일한 고양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욱 놀랍게도 삼색이는 젖이 불어있었다. 레오를 통해 수유 중인 고양이를 본 적 있던 나는 바로 수유 중임을 알아차렸다. 본인도 아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아직 어린 나이에 아기를 낳아 기르고 있다니…. 마음이 아픈 한편 레오가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츄르를 하나 까주었는데, 순식간에 흡입한 삼색이는 배고파하며 내가 가는 것을 온몸으로 막았다. 어쩔 수 없이 1회에 츄르 1개라는 공식을 깨고 마지막 츄르마저 주었다. 그런데도 너무나 배고파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그 눈빛을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이미 크림치즈프레즐을 위해  거리까지 다니며 마음 쓰고 있는데,  다른 고양이에게 정을 주어 마음 아픈 일은  이상 없게 하고 싶은데.


 어쩌면 '사랑에 빠지면 안 돼'라는 말은 사랑에 빠지게 하는 주문일지도 모른다. 이사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절대로 정을 주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은 일단 출산한 고양이를 먹이고 봐야 한다는 밥의 민족에겐 더없이 흐물흐물한 결심이 되었다. 게다가 그냥도 지나치지 못했을 모습이었는데, 레오와 비슷한 삼색이라 더더욱 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마르고 작은 삼색이




"하……. 너 여기 있을 거야?"


 삼색이는 하필이면 인도와 주차장 사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누웠다. 내 곁을 맴돌다가 내가 고민하는 것을 느꼈는지 그곳에 자리를 잡고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여기 꼼짝 않고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그런 눈빛이었다.


"너 정말 여기 있을 거지, 나 금방 밥 가지고 온다? 근데 사람들 좀 피해 있으면 좋을 텐데, 해코지당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삼색이는 뜨겁게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빨리 밥을 가져와 자리를 옮겨 먹이는 수밖엔 없어 보였다.


 황급히 집에 돌아와 기뻐 날뛰는 레오와 감자에겐 인사만 건네고, 급하게 캔을 챙겨 다시 내려갔다. 예상대로 삼색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혹시나 입맛에 맞지 않아 먹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 기호도가 가장 좋은 캔과 깨끗한 물을 대령했다.



"여기 있을테니 밥 가져오세요!"


 밥을 주는 곳 근처에는 얼룩이도 자고 있었다. 알았더라면 더 넉넉히 가져왔을 텐데 풀숲에 숨어있어 몰랐다.


 밥 주는 소리에 일어난 이 녀석은 신나게 밥을 먹으러 달려왔다가 삼색이에게 먼저 양보했다. 원래 터줏대감인 데다 더 큰 어른 고양이라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감동이었다.


 아마 삼색이가 더 어려서인지, 수유 중인 걸 알았는지, 아니면 암컷이라서인지... 아무튼 물러나서 삼색이가 충분히 다 먹기를 기다렸다.


 배가 고팠던 삼색이는 다행히 캔을 싹싹 비워주었다. 배를 채울 기대에 차있다가 졸지에 코앞에서 먹을 걸 다 빼앗긴 얼룩이는 화내지 않았다. 그냥 잘했다는 듯 삼색이의 옆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배려 넘치는 고양이 사회의 의리를 본 나는 다시 한번 얼룩이의 고운 마음씨에 감탄하는 한편 다시 집으로 올라가 다른 밥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고양이의 밥을 본격적으로 챙겨주기 시작하게 되었다.







 일단 출산한 고양이가 아파트 단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굉장한 패닉-흥분상태에 빠졌다. 레오가 출산을 했을 때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느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이 고양이는 어떻게든 잘 챙겨주고 싶었다.


'정은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밥은 제대로 먹일 거야.'


 이미 정을 줬으면서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되뇌었다.


 아기 고양이들을 어디에 낳아뒀는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알게 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이 마음을 주고 챙겨줘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레오의 아기들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에 헤매던 나는 일부러 삼색이의 둥지를 찾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 나서진 않아도 우연히 발견하면 챙겨줘야지. 그건 정말 운명이겠지.'


 어이없게도 이 생각을 한 날 퇴근길, 삼색이의 거처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허무하게도 내가 항상 밥을 챙겨주던 곳의 바로 옆이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집주인의 얼굴


 아기들은 이미 한 달쯤 되어 보였고, 삼색이에게 준 습식을 뺏어먹는 녀석도 있었다. 놀라운 생존능력과 식탐이었다.


 이왕 집을 알아내고야 말았으니 책임감에 마음 한쪽이 무거워지는 한편 더 챙겨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벼워지기도 했다.


 나는 이후로도 삼색이와 아기들, 얼룩이에게 밥을 주었다.


 집을 알고 있다는 책임감은 내 생각보다도 무거워서 퇴근길과 출근길, 쉬는 날에도 하루에 두 번씩은 밥을 주러 나가곤 했다.


 출퇴근 시간이 남들과는 많이 다르고 그마저도 시간 변동이 잦은 직업이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시간에 밥을 줄 수 있어서 좋았다.


 두 고양이는 내가 밥을 가지고 나가면 자연스레 어디선가 나타나 식사를 하고 잠시 누워서 여유를 즐겼다. 삼색이야 고된 육아에 지쳐 잠시 맛보는 꿀맛 같은 휴식이라지만, 이미 중성화가 된 얼룩이는 자기 아기들도 아닐 텐데 삼색이를 챙겨주었다. 마치 내가 레오를 챙겨주었듯 친정 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바깥에 나갈 일이 없던 나도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다 먹기를 기다리거나, 그릇을 정리하고도 아이들 주변에 앉아있는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누군가 밥 먹는 아이들을 못살게 굴까 봐 옆에서 지키고 있으면서도 내게 시비를 걸까 봐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기도 했지만 생존을 고민하며 먹는 아이들을 보면 인간 세계의 걱정은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삼색이가 이소를 했다. 레오가 그랬듯 기존의 집이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판단하면 그곳을 버리고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하는 것이다.


 삼색이가 어떤 위협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갑자기 사라진 후로 한참을 보지 못해 걱정만 쌓여갔다. 한 번 챙겨주기 시작하니 자꾸 생각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새로 만든 보금자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할 때는 그렇게 금방 눈에 띄더니, 정작 간절하게 찾고 싶을 때에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마음 아팠던 작별이 떠올랐다. 비가 살살 오는 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한적한 놀이터 부근에서 밥을 주고 삼색이와 얼룩이가 먹는 것을 기다린 다음 그릇을 수거해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힘들 때면 애교를 부리며 자기도 데려가라고 졸졸 쫓아오고 울던 얼룩이는  인간이 나를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체념을 했는지  자리에 누워  쪽을 다가 오히려 고개를 반대로 돌려버렸다. 반면 삼색이는 뜨거운 열망이 담긴 눈으로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부르거나 손짓만 해도 당장 달려올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삼색이를 부를  없었다. 어른 고양이는 현실을 알아 기대 없이 고개를 돌리고, 어린 고양이는 현실을 몰라 기대하며 고개를 돌린다. 건물의 입구에 서서  반대로 고개를 돌린  고양이들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떼어놓기가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다.




 반쯤은 재회를 포기한 삼색이를 다시 만난 것은 이미 한 달이 지난 후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아기 고양이의 성장은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이미 아깽이들도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네 발로 걷기도 힘들어서 바들거리며 몸을 지탱하던 그 작은 아기 고양이들은 어느새 깡총깡총 뛰어다니거나 뒹굴며 서로 장난을 칠 줄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 둘은 땅굴 속에서 자고있었다
습식 먹는 아기 고양이들






고양이를 위한 비밀 조직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또다시 아기고양이들을 지키는 데에 실패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기묘한 경험을 하고 운명적인 인연들을 맺게 되었다.


 삼색이의 아기들을 예방접종시켜 입양 보내려던 나의 계획은 어떤 동물학대범 때문에 무산되었다. 아파트 단지에 고양이가 있는 것이 내내 불만이던 어떤 사람이 아기들만 모아다가 제각기 다른 곳에 흩뿌려놓은 것이다.


 최근 끔찍한 고양이 학대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중 하나인 무분별 방사는 영역 동물인 고양이에게 치명적이다. 심지어 젖을 떼지도 않은 아기들을 하나하나 떼어놓아 방사했으니 아예 죽으라고 저승 문턱에 밀어 넣은 셈이다.


 한날한시에 사라진 아기 고양이들은 내게 과거의 트라우마를 불러왔다. 고양이들을 챙겨주고, 특히나 아기고양이들을 입양 보내기 위해 눈독을 들이고 있던 단지 내의 집사들이 모였다. 나처럼 이미 고양이를 모시거나, 개를 반려하거나, 반려동물이 없더라도 각자 다른 시간대에, 다른 방식으로 고양이를 챙겨주는 마음 하나만큼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뜻을 함께한 집사들은 고양이를 위한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정보를 공유하고 아기를 찾아 헤매며 우는 삼색이의 울음소리를 핸드폰에 녹음해 틀고 다니며 불철주야 아기들을 찾아 나섰다.


 전단지를 만들어 당*마켓이나 지역 카페에 올려 제보를 받기도 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부착해 주민들의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많은 집사님들이 시간이  때마다 발로 뛰며 찾아다녔음은 물론이다.  역시 매일 퇴근길에  정거장 먼저 내려 집을 지나쳐서까지 녹음된 삼색이의 울음소리를 크게  두고 풀숲을 살피며 걸어 다녔다.


 그렇게 며칠 동안 찾은 고양이는 5마리 중 단 두 마리였다. 발견된 장소는 절대로 아깽이 혼자 갈 수 있을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인간조차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정 반대의 위치, 차로 돌아다니며 아무렇게나 먼 곳에 내다 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렇게 찾아낸 두 마리 아기 고양이와 삼색고양이 모두 좋은 집사를 만나 입양을 가게 되었다. 찾지 못한 다른 아기고양이들도 어디에선가 건강히 잘 지내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행삼이와 맹돌이


 삼색이는 엄마 밥을 빼앗아 먹던 치즈 아기냥이와 같은 집에 입양을 가 각각 행삼이, 맹돌이라는 이름을 받고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


 행삼이는 똑똑해서 의지하며 지내던 얼룩 고양이로부터 고양이 사회의 예의범절을  배웠다. 덕분에 입양이  후에도 k-고양이를 대표할  있을 정도로 예의 바르게 살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아들인 맹돌이와 비슷한 시기에 구조, 입양된 업둥 딸인 광순이까지  가르쳤으니 그야말로 몇 달 연장자 고양이로서  도리는   셈이다.


 다만 점잖고 깍듯한 성격의 행삼이는 천방지축 두 아깽이들이 날뛰는 것을 받아주느라 끝나지 않는 육아에 조금 어이없는 표정이다. 그래도 인간 집사의 마음을 헤아리고 분위기를 읽어 살림과 육아를 돕는 훌륭한 반려묘가 되었다.



5:5 앞머리가 너무 귀여운 행삼이
연예계 활동 당시 카메라세례를 많이 받아 이제는 사진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파트 연예계에서 은퇴 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행삼이
뒤쪽의 치즈는 엄마밥 뺏어먹던 맹이, 정장냥은 업둥딸 광이
힘든 시기를 함께 헤쳐온 아들과
얼굴에 근심 대신 살이 붙어가는 모습이 정말 보기좋다.
아기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삼색이마저 해코지를 당할까봐 이웃님이 급히 만들어주셨던 목걸이






왕자


 다른 집으로 입양 간 아기고양이 한 마리는 '왕자'라는 이름을 받고 말 그대로 왕자님처럼 극진히 대접받으며 지내고 있다. 그런데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밖에서만 살다가 편안한 실내에 들어와서 긴장이 풀린 탓일까, 낯선 손길에 엄마와 떨어져 목숨을 위협받았던 탓일까? 왕자는 입양 초기에 흉수가 차 크게 아파서 생사를 헤맨 적이 있다. 짧다면 짧은 시간, 입양을 했더라도 아직 정이 깊게 들지 않았을 시기였다.


 동물병원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작은 처치에도 놀라운 가격이 매겨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입양자님은 "당연히 왕자부터 살리고 봐야죠."라고 말씀하시며 거액의 치료비를 선뜻 지불하셨다.


 굳이 소리내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파트 고양이를 위한 비밀결사단체의 조직원들은 단체로 감동받은 것 같았다. 특히나 나는 무지와 무관심을 변명삼아 고양이를 다양하게 학대하는 사람이 비일비재한 세상에 이미 지쳐버린 상태였다. 염세적이고 만사에 시니컬해진 와중에 왕자 집사님의 당연하지만 어려운 그 한 마디가 얼마나 고귀한 행동인지 크게 느껴졌다. 먼지만 가득 쌓인 벽난로에 따뜻한 불씨가 화르륵 번지는 것 같았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살아만 달라고 몇 주 동안 밤낮으로 입원한 왕자를 면회 가고 돌보신 집사님, 불철주야 생명을 살리려 진심으로 노력하신 의료진, 그리고 다른 집사님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걸까? 왕자는 천만 다행히 고비를 넘기고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한 듯 좋은 집사를 만난 왕자. 심지어 왕자의 집사님은 행삼이와 얼룩이 이전에 아파트 단지에서 지내던 아기 치즈냥이를 이미 입양해 '공주'라는 이름으로 보필하시는 분이었다.


 초기에 아팠던 것이 평생의 액땜이었다는 듯이, 왕자는 지금도 공주와 함께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왕자야 이제 아프지말고 건강하게 지내야한다~
사진으로도 느껴지는 장난꾸러기의 기운
공주와 왕자


어느새 많이 큰 최근의 왕자
왕자와 공주
훌륭한 어른고양이로 자라난 왕자. 왕위 제 2 계승자
왕자의 얼굴에서 행삼이와 맹돌이가 보인다.






춘식이


 행삼이와 맹돌이, 왕자가 입양을 가고 이제 아파트 단지에 남은 것은 얼룩고양이 뿐이었다. 동네 인심이 동네 고양이의 경계도를 대변한다는데, 우리 동네는 썩 인심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고 아파트 벽에 프린트물이 나붙을 정도였으니까.


 얼룩이는 똑똑해서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과 괴롭히려는 사람을 잘 구분할 줄 알았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들의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얼룩이는 치아 상태도 좋지 않았고, 곰팡이성 피부질환인 링웜의 조짐도 보였다. 예의 바른 데다가 자기 좀 데려가 달라고 매일 사람을 따라다니며 우는 고양이. 섣부른 냥줍은 고양이에게 해가 될 수도 있지만, 얼룩이 같은 경우에는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에 얼룩이에게 따뜻한 집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커서 '귀여운' 아기 시절을  수도 없고, 어떤 잠재적 질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고양이를 누가 선뜻 입양할까? 결국 비밀결사단체에서 모금에 나섰다. 기본적인 건강검진과 예방접종, 스케일링  깨끗하고 준비된 모습으로 입양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민 카페에 얼룩 고양이에 관한 계획을 설명하며 '입양 홍보를 할 예정이니 잠시만이라도 내쫓지 말아 달라'는 글을 올린 직후였다. 얼룩이는 벌써 자신이 입양했다는 댓글이 달렸다.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정말로 얼룩이가 없어졌나 놀이터에 나가봤지만 항상 있던 얼룩이가 없었다.


 얼룩이는 이렇게 얼떨결에 간절히 바라던 입양을 가게 됐다. 나는 이런 것을 묘연이라고 생각한다. 얼룩이는 집사님이 좋아하시는 카*오 캐릭터에서 따온 '춘식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춘식이의 집사님은 개만 길러봤지 고양이에 대해서는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셨다.


"고양이 산책은 어떻게 시키나요?"


 집사들의 단톡방에서 여쭤보신  질문에 집사들이 놀랐다. 개에게 가장 당연하고도 중요한 산책이 궁금한 마음은 이해가 갔다. 국내에서 고양이가 인간의 반려동물로 알려진  얼마 되지 않은 만큼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은 고양이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고,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역시 크림치즈프레즐을 만나기 전에는 고양이가  먹는지도 몰랐다. 특히나 요즘은 다양한 sns 통해 학대의 일종인 산책 냥이가 유행처럼 번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춘식이 집사님은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 금세 야무지고 숙련된 집사로 거듭나셨다.


 셀프 입양 홍보를 나설 때엔 한없이 젠틀스윗하고 예의 바르던 춘식이. 새로운 집사님과 비밀조직원 집사가 함께 병원에 데려갔을 때엔 겁먹은 나머지 울며불며 사람을 물고 집기들을 때려 부수는 사상 최강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개구 호흡과 혀가 파래지는 청색증에 이어 배변 실수까지 하는 역대급 진상 고양이었다는 춘식이.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무서워서 그랬을 텐데 탓할 수도 없고 되려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건강검진 결과 신장 수치가 좋지 않아 신부전 2기를 잠재적으로 진단받았다. 약을 먹이고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춘식이의 새 집사님은 이제 혼자서도 춘식이를 멋지게 케어하시는 훌륭한 집사님이 되셨다. 단기간에 초보 집사에서 환묘를 노련하게 돌보는 숙련 집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애정과 노력을 기울였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헤어질 줄 모르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춘식이는 원하던 대로 이제 마음껏 사랑받으며 지내고 있다.


       

링웜이 재발해 넥카라를 착용한 춘식이
넥카라마저 베개로 활용하는 편안한 모습이 보기좋다
기분좋은 춘식 행복한 춘식
핑크뱃살 춘식

        





내가 사랑했던 모든 고양이들에게


 이렇게 해서 내가 살면서 알고 지낸 고양이들을 모두 소개했다. '절대 정을 주지 말아야지'에서 '영원히 죽도록 사랑해'까지, 이 몇 년 간의 여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이제껏 견지해온 삶의 시선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했고 그건 내 영혼에 눈을 틔우고 향을 입히고 빛을 물들이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고양이를 위한 삶을 살며 고양이로 행복 받는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크림과 프레즐까지 입양해 모두 행복한 노후를 보내게 해 주는 것이 이번 생의 최종 목표이다.


 고양이 한 마리의 집사는 모두의 집사이다. 집사가 된 후로 나를 이루는 국적, 성별, 직업 등 그 어느 정체성보다도 집사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뚜렷해졌다. 어디를 가도 남들은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보이고 들린다. 당연히 잘 먹이고 깨끗이 처리하며 모든 고양이들의 장수와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고양이들아, 너희가 영원히 당연히 행복할 그날까지 발전하고 노력할게. 너희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어.


 고양이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섬세하고 영롱한 영혼들을 가진 존재다. 온 세상의 고양이가 행복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한 동물을 사랑하기 전까지

우리 영혼의 일부는

잠든 채로 있다.


- 아나톨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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