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무엇이든 늙는다. 식물과 동물의 노화는 자연으로 받아들이지만 사람의 노화는 어쩐 일인지 수용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더욱이 사회는 될 수 있으면 노화를 늦추고 신체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것을 하나의 능력으로 취급한다. 또한 자신의 몸을 관리 유지는 데 게으르지 않으니 매사 그러한 성향을 띨 것이라 예단한다.
그러나 늙지 않으려면 아니, 천천히 늙어가려면 태연하고 느긋한 태도와 습관이 유용하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오는 압박, 스트레스가 적을수록 또는 효과적으로 해소할수록 늙음은 완만한 속도로 진행된다.
노화를 촉진하는 요인은 수없이 많지만 대표 격으로 자외선, 노동, 근심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외선에 무방비로 일정 시간과 양 이상으로 노출되면 피부는 손상을 입는다 단지 피부색만 까맣게 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혈관 확장이나 염증을 일으키고 종국에는 깊게 파인 주름살을 얼굴에남긴다. 주름은 노화의 정도를 가장 알기 쉬운 척도로 얼굴에 생기는 주름을 반길 이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자외선을 피하는 방법은 공식화할 수 있는 만큼 정확하다. 피부에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거나 모자나 양산을 이용하는 것이다. 해결이 예상보다 쉽다
노화를 재촉하는 두 번째 요인은 노동이다.
노동이라 하면 육체를 무리하게 놀리는 노동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소득을 얻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이 노동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이중엔 본인이 진정 원하고 즐거워서 스스럼없이 해내는 노동도 있기 마련이지만 대다수노동자는 필요에 의해 노동 현장으로 나선다.
생활비, 용돈, 양육비, 자금 마련 등 필요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 다르다. 자의 반 타의 반인 노동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압박감은 신체를 불편하게 자극한다. 노동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필요자본을 충분히 확보하는 길인데 만만치 않다.
마지막은 근심이다. 근심은 개인 성향에 따라 그 양과 질이 판이하다. 살아가면서 근심은 반드시 필요하다. 근심이 있어야 그것을 해소하거나 해결하려는 목적을 설정하게 되고 그 목적을 이루는 길이 삶의 의욕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어서다. 그런데 정도를 지나친 근심은 분명 몸과 마음에 해롭다. 특히, 이른 시일 내에 아니면 평생에 걸쳐서도 덜 수 없는 근심에 사로잡히면 노화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악영향을 끼친다.
노화는 분명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이다. 아무리 애써도 부정할 수 없는 이치이다. 하지만 사회가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자연스러운 늙음을 추하다고 여기는 사회풍조가 만연해졌고, 어느덧 우리는 노화를 병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럴수록 안티 에이징 산업은 불황을 모르고 활활 타오른다. 노화의 흔적을 지워준다는 기능을 내세운 갖가지 상품과 기술들은 현대인에게 외치고 있다. '늙어도 곱게 늙어야지!"
외양이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평가는 칭찬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기준은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아마 어딘가 나이에 걸맞은 표준 외양 도감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 이러한 평가는 순전히 개인적 호감에서 비롯된 거다.
누구나 자신에게 알맞은 신체나이가 있다.
그것은 유전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생활상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일례로, 외국의 어느 커피농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사진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여성의 나이는 21세로 소개됐는데 겉모습은 그보다 적어도 20년은 더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뜨겁게 타는 태양 아래서 분주히 노동에 집중한 그녀가 얻은 겉모습은 타국인 눈에는 노화가 앞당겨진 안타까움의 단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외양을 늙음이라는 병에 걸려 고쳐야 하는 대상으로 판단했다면 사진 속에서 그렇게 자신 있고 맑은 미소를 보이진 못했을 것이다.
감독 피터 시걸 영화 첫키스만 50번째의 여주인공 루시는 매일 아침이면 그간의 기억을 모두 잃고 특정일로 기억이 세팅된다.
바로 어제 만나 연애감정이 싹튼 헨리를 아침이 되면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 취급하며 아무리 날짜가 바뀌어도 자신이 고집하는 특정일을 오늘로 삼는다.
루시의 특정일은 사고를 당한 날로 이후 단기 기억상실증을 겪는다. 그녀의 병세를 알고도 마음을 얻기 위해 헨리는 매일 새로운 만남을 위장하며 애쓴다.
과연 언제까지 이 노릇을 계속할 수 있을는지. 종국에 영화는 루시가 자신의 병세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극적 반전을 시도한다.
시간은 흐르고 무엇이든 변하기 마련이다. 변한 모습을 수용하고 인정하기가 쉽진 않지만, 루시처럼 단기 기억상실증을 겪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시간이 축적된 신체를 부끄러워하고 거부하는 '노화 기피증'은 당신의 지난 세월을 강도당하는 것과 진배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