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간 5명의 집주인. 그 추억과 홧병에 대하여

by 지은

'악덕 집주인으로 떼인 전세금 00억에 달한다...',

'내 전세금을 지켜주는 전세보증보험, 이제는 필수!',

'임대인의 000 반드시 확인할것...'


세입자를 불안하게 하는 부동산 뉴스가 사라질 날이 없다. 사실 집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그 집 밖에 없어서 혹은 날짜가 맞아서 계약하려는 것뿐이다. 집주인이 마음에 들어서 사는 게 아니다. 그러니 애초에 집주인과 좋은 사이여야 한다는 압박감도, 그 어떤 의무도 가질 필요는 없다. 그저 매의 눈으로 각종 서류를 살펴보며 요목조목 뜯어보면 된다.


집을 가운데 두고 전 재산이 걸려있다. 그러다보니 한번 틀어지면 걷잡을 수가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생사를 두고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볼일이니까.


원래부터가 평행선이었던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는 갈수록 틀어지는 형국이다. 영영 만날 수 없게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 뉴스를 보면 집주인들은 다 놀부 심보를 타고 났으며, 나쁜 사람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나쁜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 집주인이 되는 것인가, 집주인이 되면 착한 사람도 변하는 것일까. 이제 전세 계약을 할때면 물 떠놓고 기도할판이다. 그 집이 곰팡이가 피었고 뭐건 간에 집주인만 제발 멀쩡한 사람이길 비나이다비나이다.


뉴스에 나오는 그 사람이 나의 집주인이 아님에 매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다음 집주인은 또 누구일지, 이 집에 계속 살게 될지 여전히 앞날이 뿌옇다. 부동산 기사를 볼때마다 한숨이 푹푹 새어져나온다. 명절에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훈훈한 관계들은 역시나 인터넷에 떠도는 풍문인가보다. '그 분'의 번호가 핸드폰에 띠링 울리기라고 하면 가슴이 철렁하니 원. 왜 이렇게 어렵고도 머나먼 당신이 되어버린것일까.


결혼 후 12년의 세월동안 5명의 집주인을 만났다. 욕을 한바가지를 하며 (물론 마음속으로) 계약 종료가 된 적도, 쿨하게 작별을 한 적도, 각종 법률 정보를 찾아가며 전세금 반환되는 날까지 심장이 쫄렸던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똥 밟았다는 심정으로 뒤돌아 퉤퉤 침뱉고 억지로 잊으려 애썼다. 내 집을 갖지 못한 내 탓이라고, 집주인을 잘못 만난 내 운이라고만 여겼다.


지금도 여전히 전세 유목민 신세이긴 하지만, 어느덧 나도 집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세입자의 마음과 집주인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역지사지라 했던가. 집주인이 되고 보니 새삼 스쳐간 집주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 분들도 나의 연락에 마음 졸이고 몇 편의 시나리오를 썼겠다싶다. 부동산에서 왜 이렇게 눈에 힘을 주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는지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간 숱하게 '인생 잘 사는법', '인간관계'에 대한 수 많은 책을 읽고 강의를 들어도 흘러랐던 이야기들이 이제사 무엇인지 알 것같다. 5명의 집주인을 만나는 지난 12년간 찐하게 인생을 배웠으니.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실사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혹은 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많은 정보를 알고 서로의 영역에 침범할 수 없도록 선을 긋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대방이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먼저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게 우선이었다. 세입자의 설움, 집주인의 갑질로만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와 돌이켜보니 나에게 교훈을 한가지씩 던져주었던 12년의 자기계발서 전집이었다. 전세살이를 하면서 인생 철학을 배우게 되다니, 이래서 사람은 많이 겪고 오래 살고 볼일인가.


오늘도 세입자 라이프는 지속되고 있다. 더불어 집주인 라이프도 새롭게 시작되었다. 나는 어떤 마음과 태도로 집주인에게 연락하고 반대로 세입자 연락을 받아볼까. 이런 말 한마디가 어떻게 들릴까. 혹여 내 말투로 오해를 하진 않을까. 이모티콘 하나에도 고심하고 망설인다. 연애문자도 이렇게 고민했나 모르겠다.


부디 저의 세입자님들이여 무탈하게 잘 살아주시길. 저의 집주인님 저도 이 집에서 조용히 잘 살테니 계약종료날 만나요. 그런 마음으로 오늘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