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견을 넘어 기호로 말한 저항

프레임 리터러시 : 열아홉 번째 이야기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운이 좋은 천재 작가였을까.

사회적 편견과 싸우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 혁신가였을까


DDP에서 열리고 있는 〈장 미셸 바스키아 :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전시 입구.


건방진 듯한 포스로 우리를 응시하는 바스키아의 얼굴을 마주하면 자연스레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마약 중독자 천재”,

“27세 요절한 천재적 작가”,

“2017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 달러에 낙찰된 미국 작가”,

“검은 피카소”.


그를 향한 말들은 늘 화려하거나 자극적이다.

사실 이 전시를 보지 못했다면 27세의 죽음과 약물 중독 사실 때문에 나는 ‘요절한 천재 작가’로만 인식했을 것이다.


1960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그는 아이티계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 사이의 혼혈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비장을 적출하는 수술을 받았던 그는 절망하며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어머니가 건넨 해부학 책으로 예술 세계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두개골과 뼈, 장기들이 도표처럼 그려진 책 속에서 그는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며 인간의 본질을 어린 나이에 마주했다. 그 경험은 훗날 그의 그림 속 뼈와 해부학적 이미지로 되살아났다.


평탄치 않은 가정사로 어린 나이에 마주한 부모의 이혼, 어머니의 정신질환 등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는 잦은 가출 행동으로 표현했다. 그런 불안정한 어린 시절이 혁신이라는 독창적인 그만의 시선을 만들어냈다니 아이러니한 인생이다.


바스키아는 그 고통을 오히려 예술로 드러내며 사회와 연결시켰다.

그라피티로 시작한 그의 길은 곧 미술계의 무대와 이어졌다. ‘SAMO©’라는 이름으로 뿌려진 낙서는 도시의 언어가 되었고, 그의 회화는 거칠지만 생명력 넘치는 리듬으로 가득 찼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 뒤에 사회적 편견, 흑인 정체성, 자본주의 비판이 숨어 있었다. 그는 미술과 거리의 경계를 허물며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언론은 그를 “검은 피카소”라 불렀고, 평론가들은 그를 “야생마”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그런 낙인에 굴하지 않았다. “나는 갇혀 있지 않다. 나는 자유롭게 작업한다.” 그의 말처럼, 그는 누구의 틀에도 들어가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어린아이 그림 같다"거나 "낙서 같다"는 비난도 많았지만 독창적인 시각과 흑인 정체성, 사회적 메시지 덕분에 비평가와 갤러리, 컬렉터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그는 '20대 슈퍼스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전시는 극찬과 대성공을 이끌며 평론가들은 "팝아트의 천재", "예술계의 지미 헨드릭스"란 별명을 붙였다.

특히 1981년 첫 미국 개인전은 대박을 터뜨려, 하룻밤에 전시작이 모두 팔리고 20만 달러(약 2억 7천만 원)를 벌었다고 한다.

이후 세계 각국의 갤러리 전시에서 작품이 완판 되고, 20대 초반에 이미 'Young & Rich' 스타 작가가 됐다. 운도 뒤따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는 시인이자 뮤지션이기도 했다. 노트북에는 낙서뿐 아니라 시적 문장, 철학적 단어들이 가득했고, 실험 밴드 “Gray”를 결성해 노이즈와 재즈, 펑크를 오갔다. 그의 그림 속 즉흥성과 리듬은 음악과 언어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태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바스키아를 “앤디워홀의 제자”로 기억한다.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실제로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은 동등한 예술적 파트너였다.


이번 전시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그의 공책에 있는 시적 문장과 짧은 글이다. 그는 책을 즐겨 읽었고, 작품 속에 시구, 역사적 문장, 철학적 단어를 끼워 넣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노력이 있었다.


이를 통해 바스키아의 작품은 개인적 고통을 넘어 흑인 정체성, 식민주의, 경찰 폭력, 자본주의 비판까지 포괄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다.


세계 미술 시장은 바스키아를 ‘희귀한 흑인 예술가’로 포장했고, 그의 이름은 작품보다 먼저 팔렸다. 그래서 “과대평가된 천재”라는 편견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낙서, 해부학, 음악, 역사, 언어를 결합해 미술사에 없던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 그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미술사 자체를 뒤흔든 혁신의 기록자였다.


바스키아는 단순히 마약에 취해 무너진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우며, 언어·역사·음악·정체성을 통합한 다층적 예술가였다. 그의 삶과 작품 속에는 아직도 충분히 발굴되지 않은 풍부한 서사가 숨어 있다.


바스키아는 운이 좋은 스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남다르게 바라본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눈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