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어드밴트 캘린더]
때로는 나의 배려가 상대에게는 배신으로 둔갑한다. 아마도 장난기 많은 신이 사람들의 우정을 질투해 살짝 오해의 가루를 뿌리는거겠지. 겨울이 막 오랜잠을 깨기 시작한 11월 말, 나와 사장님은 얄궂은 신의 장난에 휘말리고 있었다.
여운이 그만두고 난 후, 일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최근들어 직원들의 출근율이 저조한데다, 매년 이맘때쯤 나오는 크리스마스 어드벤트 캘린더 때문에 그야말로 가게는 초비상사태였다.
어드벤트 캘린더는 배송보다 유독 픽업손님이 많았는데,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일러스트가 담겨있는 패키지를 손에 직접 들고가는 것이 연말 분위기를 더 진하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때문에 오늘 냥냥쭙쭙은 픽업하러 온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아치형 창문 앞에 오픈런이라니 백화점 명품관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가족, 연인, 친구끼리 캘린더를 주고받으며 행복해하는 소리가 창문을 타고 흘러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자기야~ 우리 매일 하나씩 열면서 데이트할까?”
“좋아! 크리스마스까지 매일 만나는 거다?”
“야, 이거 작년엔 15일쯤 이상한 맛 나오지 않았냐?”
“어. 민트 초콜릿... 우웩 치약 먹는줄.”
“올해는 제발 맛있는 거 나와라~!”
“엄마, 하루에 하나만 먹는 거지?”
“그렇지,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까지 날짜 써 있는 칸에 들어있는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서 먹는거야.”
“에이,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 한 번에 다 먹으면 안 돼?”
“한 번에 다 먹으면 안 돼~ 자 이제 야옹이한테 빠빠이하고 집에 가자.”
“빠빠이~ 메리 꾸리수마쑤.”
꼬마 손님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앙증맞은 인사를 했다. 나는 꼬마손님이 멀어질때까지 한참 손을 흔든 뒤 메리크리스마라는 문구를 붙인 고양이 장갑을 가게 안으로 불러들였다.
마지막 픽업 손님을 맞으려 장갑의 문구를 다시 ‘안녕하세요’로 바꾸려는 그 순간, 창문 너머에서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마지막 초콜릿까지 먹고나면, 죽을 거야.”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떠한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한 달 동안 이렇게나 착실하게 준비하는 걸까?
왜 하필 크리스마스일까?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마치 그 사람의 남은 날을 전달하는 같았서.
“저기요, 빨리 주세요.”
죽음의 날을 받길 재촉하는 손님. 어쩔 수 없이 창문 밖으로 물건을 내민다.
조금에 망설임 없이 잽싸게 물건을 낚아채는 힘에서, 그의 마지막 결단이 느껴진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발자국 소리. 반사적으로 창문 너머를 살폈다. 벌써 어둑해진 골목길,
멀리 손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대로 보내도 될까? 달려가서 무슨일인지 들어주기라도 해야하는거 아닐까?
네가 그럴수는 있고? 그렇지만 저렇게 보내면 혹시나 사장님이 놓친 그 죽음처럼 나도 이 순간의 망설임으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 어떡해.
내 머리에 휴전선을 그어놓고 살고 있는 두 나라가 다시금 영토 전쟁을 시작했다.
총알이 날아들고, 폭탄이 터졌다.
잠시 뒤, 전쟁은 저쪽 나라의 승리로 끝이났다.
내 두다리는 선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닫힌 커튼만 바라보며.
하루 종일 픽업 서비스에 쏟아낸 에너지에 몸이 무겁고, 정신도 멍해졌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가게 내부엔 나만 남아있었다.
사장은 어디 간걸까?
“여기도 없네.”
탕비실에도 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부시럭거리는 소리만 나지 않았어도, 차라리 내가 못 들었으면, 아니, 들려도 못 들은 척 했으면 그런일이 터지진 않았을텐데. 모든 이야기 속 주인공이 그러하듯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위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곳은 탕비실과 연결된 짧은 복도 끝, 근무자의 급작스러운 공황이나 발작 증상을 염두에 두고 만든 비상 공간, 수면실이었다. ‘실’ 그러니까 방이라는 뜻을 품기엔, 빛이 차단되는 암막커튼과 이동형 간이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발걸음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옮기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 작고 소중한 공간에 커튼을 살짝 들어 올리니 또다시 그 장면이었다. 아니, 이번엔 훨씬 더 심각했다. 사장은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마카롱과 다꾸아즈를 번갈아가며 입에 넣고 있었다. 그 옆에는 패밀리 사이즈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린 채 떠먹히고, 케이크 한 통은 우유에 푹 담가져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은 상태로 입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달콤함이 혀끝에 맴도는 느낌, 점점 질려버릴 것 같은 단내가 코를 찔렀다. 쩝쩝 소리와 함께, 마치 음식을 삼키는 것보다 쓸데없이 씹고 있는 그 모습이 점점 더 역겨운 구석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1부터 24까지 숫자가 적혀 있는 크리스마스 어드벤트 캘린더였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략 눈으로만 세어봐도 열 개는 족히 넘으리라. 사장은 앉은 자리에서, 크리스마스를 열 번 넘게 맞이한 셈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사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 있었을 뿐인데, 사장은 타인의 존재만으로 발가져벗겨버린 자신의 흉짐을 은폐하려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그냥 못 본 척...”
사장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손으로 강제로 쏟아지려는 물질을 막으며 급히 뛰쳐나갔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몸이 울부짖는 고통의소리.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내 마음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울 치료라고 했던가?”
배달 음식을 잔뜩 먹고 소화도 못 시키고, 소화제를 먹고 토하고. 그 모습이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느껴졌다. 꾸역꾸역 먹고, 또 먹는, 끝없이 반복되는 폭식.
사장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괜찮냐는 말과 함께 건넨 물을 받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아까 먹다 남긴 음식들을 보니 다시 이성을 잃었다.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들고, 이미 다 먹은 것처럼 보였던 음식을 퍼먹기 시작했다. 진짜 정신이 나간건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사람은 조금만 친해지거나, 편해지면 선을 넘는 것 같다. 그때, 내가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오만하고 건방진 자신감이 들었다. 내가 이걸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하세요. 대체 요즘 왜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따지듯 말하자, 사장님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하려 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침대 위의 노트북과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서 화면을 봤다. 협박, 조롱, 악플이 가득했고,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백 통이 넘게 쌓여 있었다.
“이...이게 뭐예요?”
나는 화가 나서 물었지만,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시지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여자는 단순히 딸을 잃은 안타까운 어머니로 보이기보다는, 딸의 죽음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보험 사기꾼 같았다. 물건을 사느라 불법 사채와 같은 대출을 받았고, 그 이자만큼 부담이 커져 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환불을 요구했다. 사장은 법적으로 환불할 의무는 없었지만, 도덕적인 판단에 따라 몇 백만 원을 돌려주었고, 물건값까지 손해를 보며 결국 천만 원 가까운 피해를 봤다.
선인의 도의적인 행동은 악인들에 의해 악용된다.
딸이 쌓아 둔 물건을 버리는데 돈이 든다. 버리는 값 달라.
매장으로 보내 주시면 저희가 처리하겠다. 내가 그걸 어떻게 들고오냐.
이런 말도 안되는 티키타카는 시작에 불과했고, 점차적으로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요구가 이어졌다. 딸이 죽은 사실을 내가 목격했다, 그로 인한 충격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이어서 가족들도 정신적 피해를 봤으니 보상하라는 등의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끝없이 계속해서 돈을 요구하는 그 여자의 극악무도함은 점점 더 드러나지만, 사장은 오롯이 혼자 그 모든 것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이 달콤한 것들에 도움을 받으며.
“경찰에 신고해요. 이러다 사장님도 죽어요. 그 여자 딸이 죽은 건 사장님 탓이 아니에요.” 내 말에 사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케이크를 퍼먹으려 했다.
내가 막으려고 몸을 던졌지만, 그걸 또 막으려는 사장님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초코 범벅이 된 우유가 내 몸으로 쏟아졌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사장은 오히려 나에게 화를 냈다.
“이건 선을님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선은 지켜주세요.”
내가 본 사장의 모습 중 가장 차가운 표정이었다. 잠시 녹았던 유리성 같던 모습은 다시 굳어졌다. 그 차가운 냉정함이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서운한 마음이 화로 바뀌었고, 그 불길이 치솟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제가 사장님 이럴까봐 배려해서 리뷰도 다 지웠는데.”
아차 싶었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게 쏘아졌다. 그 눈빛은 마치 호랑이가 무사히 지나가는 길을 막은 자를 응징하려는 듯한, 그런 날카로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리뷰를 지웠다고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분위기가 뒤틀린 걸 직감했지만, 그 순간은 지나갔다. “그걸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멋대로!! 대체 왜!!!”
사장이 포효하며 절규했다. 그 소리는 비명처럼 들렸다.
사장과 나는 모두 은둔 생활 경험자다. 각자 다른 이유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왔고,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같은 것들을 품고 살아왔다. 평소엔 서로에게 상처를 줄까 말도 행동도 조심했지만, 지금은 우리 둘다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배려를 해온 상대에게 배신감을 느낀것이다. 그 화가 밀려오면서 나는 내 안에 있던, 상처받은 원초적인 본능을 억누르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순간엔 내 분노와 고통이 덧칠해졌다.
퇴근 시간에 만원 지하철, 기다란 손잡이를 잡은 채 문 앞에 선다. 깜깜한 지하철이 갑자기 지상으로 올라갔다. 눈이 소복이 쌓인 철로 위로 열차가 달린다. 창밖 풍경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누군가 지하철 창문 크기에 딱 맞춘 필름을 재생하는 것처럼 흘러간다. 그 속에서,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이 선로 위 담장처럼 하나씩 떠오른다. 나의 유년시절, 치열하게 달려온 10대, 20대, 30대, 은둔 생활 시절, 마지막으로 최근에 냥냥쭙쭙에서 다시 시작해보려 노력했던 순간들까지 모두.
냄비에 끓는점이 낮은 우유를 데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어라? 하는 순간 부글부글 끓어올라 넘쳐 흐른다는 걸. 지금 나는 우유를 담고 있는 냄비다. 가슴속부터 끓어오른 무언가가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로 넘쳐 가장 가까운 출구인 눈으로 거품을 쏟아낸다.
얼른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거품이 금방 숨을 수 있게.
기운을 차리려고 하면 누군가 일부러 넘어뜨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시 일어서려고 하면 이번엔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듯한 고통이 따라왔다. 꿈속에서도 팔다리가 부러지는 장면이 반복됐다. 그 꿈조차도, 내가 다시 일어설까 봐, 시작해볼까 봐, 용기를 낼까 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억누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 더 해봐. 누가 그런다고 질줄 알고?’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팔다리가 부러졌어도 기꺼이 일어나야 한다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무너지지는 않겠다고. 내 몸이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 더 높은 곳으로 가겠다고. 그런 패기 있는 말을 아무리 떠올려도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만한 용기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내가 나에게 묻는다.
‘이제 다 그만할래?’
쉽게 포기하고, 실패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거기가 원래 내 자리였으니까.
애초에 무언가를 해보려 했던 내가 잘못된 거라고.
그렇게 애써봤자 결국 이런 거지 꼴로 주저 않아 있는데.
다시 시도하면 환상의 나라가 널 기다릴 줄 알았어?
주제 파악을 또 못한거지, 멍청하게.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집. 일부러 집 주변을 한참이나 서성거린다. 매서운 추위에 몸은 덜덜 떨리고 콧물도 줄줄 흘러내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얼얼했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가족들과 마주칠까 봐, 그 순간이 너무 싫었다. 특히 아버지가 나를 보고 무슨 말을 할지 생각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더 걸었다. 걸어야만 했다. 아무리 추워도, 집 근처에서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가도록 그냥 걷고 또 걸었다.
어느덧 핸드폰 시계는 밤 11시 10분을 가리킨다.
“이쯤이면 다들 자겠지?”
도어락을 삐삐삐 살짝 누르고 집에 들어간 순간, 불길한 TV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제발 제발 모른 척해라.
기도하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냥 두라니까요. 하지 마요.”
그 말에도 아버지는 끝끝내 나를 불러세운다.
“너 요새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병신 짓거리 하느라 허송세월 하지 말고, 생산성 있는 일을 해.”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저 땅만 본다.
“왜 대답이 없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게 근데 갈수록 싸가지가 없어지네. 네가 그렇게 잘났냐? 뭐가 그렇게 잘나서 애비, 에미를 무시해?”
무시하냐. 그 말은, 아버지가 습관처럼 쓰는 말이다.
아무도 그런 말 한 사람은 없는데.
“얼른 들어가.”
말리는 엄마의 목소리.
문을 닫아도 멀리서 들려오는 나를 욕하는 소리.
나를 탓하는 소리.
한쪽 벽에 기대어 두 팔에 얼굴을 묻는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도대체 언제쯤 내 눈물은 마를까. 그런날이 오기는 할까.
온 몸에 수분이 하도 빠져나가서 그렇게 무기력한걸까.
일어나려고만 하면 내 인생을 짓밟으려고 하는 힘의 근원이 타인도 아닌 부모다.
몇 달을 고생해서 조금씩 회복된 일상이, 일순간에 파괴되어 버린다.
저런말에 상처받지 말아야지, 아무렇지도 않아야지.
아무리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려 해도, 눈물을 꾹 참아 보려 해도, 결국 또 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나를 안아주는 침대에 기대어, 소리 죽여 운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다.
나도 똑같은, 아니 더 악랄한 악마가 되는 것.
남의 고통 따위는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기분에 맞춰, 매일같이 말로 살인을 저지르는 추악함. 나도 그렇게 해 보려고 했다. 같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패악을 부려볼까도 싶었다.
난 그것마저 실패하는 루저 중에 루저다. 안 되는 일이야. 이건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도덕과 윤리가, 물건을 던지려는 내 손을 가로막는다.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 입을 다문다.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안 되는 일이다.
만약 영화에서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거실에서 아직도 소리 지르며 악을 쓰는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해도, 난 그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보단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다.
악인들은 잘 먹고 두발 벋고 잘 자지만, 차마 악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조용히 그 길을 택하나 보다.
어쩔 수 없어.
나도 이제 그 길을 택하는 수밖에.
덜컥.
침대 옆 서랍을 연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약병이 또르르 굴러온다.
이불 속의 따뜻한 온기 대신, 물속의 냉기가 몸을 감싸며, 갑자기 숨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이 폐 속으로 파고들며 숨을 쉴 수 없고, 몸은 그저 휩쓸리듯 가라앉는다.
차가운 물속에서, 내가 살아있는 게 맞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정신이 흐릿해진다. 처음엔 숨을 쉴 수 없는 공포에 몸이 긴장하며 부풀어 오르지만, 어느 순간 그 공포마저 잦아들었다.
‘죽고 싶어했잖아. 이대로 바다에 가라앉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부패되어 불순물이 되든, 물고기의 먹이가 되든,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나는 서서히 몸에서 힘을 풀어낸다. 숨은 더 가빠지고 몸은 점점 아래로 더 아래로.
고통은 모두 사라질거야. 이제 편안해질 수 있어. 엷고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다.
얼마 못가 몸이, 내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수압이 몸을 압도하며, 내가 몸을 버리려고 할 때, 내 몸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렸다.
내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숨이 가빠진다. 하지만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내가 숨을 들이쉬려 할 때마다, 물속에서 그 공기가 내 폐를 찢어놓는 것 같았다.
내 폐 속은 더 이상 공기와 물이 공존할 수 없다는 듯, 그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 아프게 조여들었다.
내 몸은 더 이상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통증은 깊숙이 들어와, 내 살갗 아래서 살짝살짝 튀어나올 듯했다.
이 모든 고통이, 내 안에서 살아 있는 증거처럼, 뼈 속까지 파고들어온다.
손끝마저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은 둔해지고, 생명의 마지막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이건 내가 원하는게 아니야. 고통 없이 편안할 줄 알았는데.”
죽음은 자신을 하찮게 여긴 나에게 날카로운 고함을 질러대며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하고 있었다. 삶, 그딴 새끼보다 내가 더 악랄하다고, 더 잔인하다고.
웅웅웅웅.
그때, 죽음의 괴성을 희석시키는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전장을 알리는 뿔 소리인가, 인어의 목소리인가.
물결과 한몸을 이루어 유영하는듯한 소리.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분명 그 소리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미간을 세게 찌푸리며 온 신경을 소리에 집중해본다.
회오리 바람이 장면을 감싸안아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조금씩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누군가의 목소리, 익숙한 그 소리.
조금씩 선명해지는 시야, 누군가의 뒷모습, 익숙한 그 모습.
나는 다시 좁고 어두운 공간에 앉아 있었다.
대각선 맞은편에 그 여자가 보인다.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여전히 팔다리는 부러진 상태고, 온 몸은 오물로 찌들어 있다.
“하필이면 왜 또 여기야.”
어떤 시도를 해도 최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오자 나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전처럼 그 여자에게 말을 걸지도, 부러진 팔다리로 애를 써가며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시도는 이미 다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 속지, 두 번속아? 장난하나. 하도 당해서 이제 딱보면 답이 나오잖아. 어차피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안 되는 거, 아버지가 맨날 말하던 그거.
그냥 이렇게 있다보면 굶어죽든, 목 말라 죽든, 찌들어 죽든 어떻게든 숨통이 끊어지겠지.
죽는거 그거 더럽게 힘드네.
왜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왜 이런식으로 죽음을 맞이해야하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어차피 죽어가는 마당에 그걸 따져서 뭐하나 싶지만 머리는 쉬지 않고, 물음표를 내게 돌린다. 저 여자, 아니, 사람들은 왜 나를 이렇게까지 외면하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왜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 거야?
끝없이 이어지는 고찰에 또 다른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포기 속에 묻혀 있던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여자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 속에 묻어두었던 모든 것이 터져 나오는 순간처럼, 그 분노를 고스란히 쏟아내기 위해, 나는 의도치 않게 그 여자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신세한탄이었을지도 모른다.
“저기요. 그쪽이 어차피 대답도 안 하고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아는데요.”
내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려갔다. 어디다 내 억울함을 풀긴 풀어야했고, 지금 내 앞엔 저 여자밖에 없었다.
“내가 그쪽한테 큰 잘못이라도 한 거예요?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 같으면 도와줄 것 같거든요. 지금 내 꼴을 한 번 봐봐요. 사람이 이 지경으로 망가져 있는데... 아니 뭐 그래요. 도와주진 않아도 한 번 쳐다는 볼 것 같거든요. 아니면 묻는 말에 대답정도는 적선이라고 치고 해줄수있고.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쪽도 똑같아요. 저 세상에 있는 인간들하고 똑같다고요. 사장이나 그 진상 여자나 우리 엄마, 아빠나 하는 인간들하고 똑같다고요. 당신은 이미 정신적으로 날 죽였어요. 당신도 똑같아. 똑같은 살인자라고!” 내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비참함과 분노가 넘쳐흘렀다. 내가 이렇게까지 된 건, 다 저 여자의 외면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폭력 때문이다.
악을 지르고 몸통을 벽에 쿵쿵 치며 발악을 해봐도 역시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황망했다.
힘을 쭉 빼고 벽에 지친 몸을 맡긴다.
더 이상 난동을 부릴 힘도, 누구 탓을 할 힘도 없었다.
그때였다.
“당신도 살인자에요.”
여자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 여자가 내 말에 대답했을 했어.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또 서운할만큼 낯설었다.
“마... 말도 안되는 소리. 난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요? 처음엔 주변 사람들이었겠죠. 하지만 마지막엔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당신을 죽였어요.”
그 여자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절대로 그런 적 없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내 잘못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닥쳐. 세상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얘기해. 이건 다 내 잘못이라고. 다 내 탓이라고. 당신도 그 살인마들이랑 똑같아. 당신은 방금 나를 또 죽인거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내 모든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 여자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어두어진 적막속에서 여자의 말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살인자라니.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도 안돼.
양쪽 팔에 체중을 싣고 거친 숨을 헐떡이던 그때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몇 초면 되는 일이, 몇 백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흐릿해져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붙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얼굴, 그 표정,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내 얼굴.
그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를 무시하고, 나를 방치하고, 나를 죽게 내부려 두던 바로 그 여자의 입에서 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제발... 제발 살려줘, 선을아.”
온몸의 세포가 떨려왔다. 그 목소리는 내 것인데, 그 여자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내 목소리가 나를 공격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굳어지며,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그 얼굴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나의 거울이었고, 그 여자는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절박한 외침이었으며, 그 여자는 바로 나의 절규였다.
나도 모르게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던 소리.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삶.
내 몸이 온 힘을 다해 공명을 만들어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통제되지 않던 몸에 힘이 돌아오고, 불가피한 본능처럼 물속에서 헤엄칠 힘이 생겼다.
수면 위로 올라가야 했다.
숨을 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