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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환상 통증 09화

환상

by 최소망

[환상]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사람의 눈을 보지 못하고, 당폭식을 멈출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보시는 곳에서 강연을 하지도 못했겠죠? 아직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려운 고립 청년들을 위한 쉐어하우스 숨마루, 타인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기엔 아직 어려움이 있는 청년들을 위한 고양이 소품 가게 냥냥쭙쭙, 마지막으로 다음 달에 오픈하게 될, 사람들과 가벼운 소통이 가능해진 청년들이 일하게 될 카페 이음온실까지. 저희 부부는 깜깜한 방 안에서 혼자 묵묵히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다가가고 싶어요. 저희도 그랬으니까요.”

사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옆에서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서대표를 한 번, 객석에 앉아있는 청중에게 한 번 깊은 눈빛을 보냈다. 평소 타인의 눈을 피하고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 쓰고 다닌 안경은 보이지 않았다. 숨겨왔던 사장의 눈은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신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검은 동공이 반짝이며 깊고 은은한 빛을 발했고, 세상을 초록빛으로 물들이는 듯한 신비로움과 함께, 그 어떤 말보다도 더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듯했다.

“가벼운 산책을 하고, 상담을 받고, 처방받은 약을 먹는다고 해서 당신의 우울증이, 대인기피증이, 번아웃이, 그도 아니면 현대적 의학 용어로는 명명하기 어려운 그 통증이 멈출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치료 방법이 없거나, 혹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어쩌면 그 치료 방법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해결 방법을 알려줘요.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다. 네가 게을러서 그런 거야.

당장 먹을 거 없고 잘 데 없어봐, 배부른 소리 한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끔찍한 난도질에 피가 철철철 흘러넘치는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를 모른채 무작정 책임을 전가하는 말들만큼 잔인한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무서우신가요?

사는 게 싫으신가요?

사람이 무서운가요? 저들이 나를 볼까 봐, 평가할까 봐 그들이 있는 밖으로 나갈수가 없으신가요? 용기내어 나가보려 침대에서 두 발을 내려놓는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지시나요?

당신께 작은 위로가 되고 싶습니다.

아니, 그 누구도 감히 당신을 위로 할 순 없는다는 걸 잊고 이렇게 말했네요. 습관이참 무서워요. 방금 건 잊어주세요.”

사장이 잠시 눈을 감고 한 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담담하고도 단단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다시 이렇게 말해볼게요. 침대 밖으로 내려놓은 여러분의 두 발 위로 떨어지는 모든 눈물에 공감해요.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죠? 누가 내 일에 공감해준다고 당장 내가 겪고 있는 통증이 사라지지는 않잖아요. 그의 것은 그의 것. 나의 아픔은 나의 것인걸요.”

사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강한 결단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마무리 지었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게요, 방법을 제시하지 않을게요, 위로하려고 하지 않을게요, 공감하려고 하지 않을게요. 그냥 우리, 같이 두려워해요. 같이 아파해요. 같이 울어요. 같이 해요. 그게 뭐든.”

사장의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 번져가는 빛은 그가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의 아픔과 희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 보는 이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그 눈빛이 객석을 가로지르며 모든 이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것 같았다.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커튼을 조심스럽게 제치자,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어진 공기가 느껴졌다. 오래전부터 스며 있던 가게 특유의 향이 그대로였지만,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탓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마치 오랜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얼마만이에요.” 사장이 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잘 지내셨죠? 강연하시는 거 잘 보고 있어요.”

가볍게 웃으며 가방에서 작은 쇼핑백을 꺼냈다.

“나야말로 책 잘 보고 있어요. 근데 이게 뭐예요?” 사장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쇼핑백을 요리조리 살폈다.

“초콜릿이에요, 벨기에에 일이 있어서 다녀왔거든요.”

사장은 흥미롭다는 듯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감싸인 초콜릿 상자가 유럽 왕실에 있을법했다.

사장은 상자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살짝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초콜릿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한꺼번에 뜯어먹으려 들었겠지만, 이제는 손끝으로 포장지를 천천히 쓸어보는 정도였다.

“선을님이 이런 걸 사다 줄 줄은 몰랐네요.” 사장이 가볍게 농을 던졌다.

“이제는 기분 좋은 날 드시게 되었으니까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식탁 위에 쌓여 있던 과자봉지와 초콜릿 포장지, 바닥에 굴러다니던 빈 음료수 캔들. 그리고 이를 치우면서 사장과 벌였던 크고 작은 실랑이들.

그렇게 싸우고, 다투고, 결국은 서로 지쳐버렸던 나날들.

사장은 한참 초콜릿 상자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과거의 사장에게 초콜릿은 끝없는 충동과 후회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작은 기쁨이 되어 있었다.

사장은 초콜릿 한 조각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같이 먹어요.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죠.”

웃으며 기쁨을 받아드는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여운님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사장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도톰한 흰 봉투 두 개를 꺼냈다.

사장은 말없이 내 손에 그 카드를 살며시 건넸다.

하얀 봉투 위에 금박으로 새겨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 여운 & 민석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며칠 전에 도착했어요. 직접 쓴 메모도 함께 있더라고요.”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그땐 연락처 같은 걸 서로 교환할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테니... 아무튼 혹시 몰라 같이 보냈대요.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정성스럽게 적힌 손글씨와 담백한 문장.

구석에 작은 스마일이 그려진 짤막한 메모가 있었다.

함께 일했던 시간, 제겐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언니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오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

가슴 한 켠이 따뜻해졌다.

청접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사장은 여운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먼저 취직을 했다고 한다.

예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디자인 회사였는데 나이도 많고,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어서 많이 망설였다고 했다.

자격증이나 어학연수 같은 경력을 가짜로 기재할까도 고민했지만 여운은 그럴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모든걸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느라 대학도 못갔고, 그 흔한 컴퓨터 자격증이나 어학연수 경험도 전무하다며. 있는 그대로 다 말했기에 후회는 없었지만 약간의 창피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귀부터 목까지 빨개져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여운.

오히려 회사에서는 그 부분을 높이 샀다고 했다.

돈만 주면 증서로 바꿔주는 스펙이 아니라, 안 보이는 곳에서 무너짐을 견디고 다시 일어나 이력서를 작성하고, 옷을 갖춰입고, 오늘 이 면접장에 앉아있는 여운의 용기를 본것이었다.

처음 해보는 직장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평소 고양이와 소품을 좋아하던 여운에게 문구 디자인 회사는 찰떡같이 적성에 맞았고, 좋은 사장님과 동료들 덕분에 일도 빨리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절대 할 수 없을거야 생각했던 일들을 조금씩 해내고 있는 자신을 볼 때 놀라움을 감출수 없었다. 갈수록 일이 너무 재밌었고 회사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

일이 어느정도 적응되었을 때, 회사에선 여운에게 야간 대학을 권했다.

복지 혜택으로 등록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기에, 낮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엔 천천히 수업을 따라가며 멀게만 느껴졌던 대학의 문을 조심스레 열 수 있었다.

늦게 다시 시작한 인생의 시간.

바쁘게 살아가는 날들이 조금씩 그 시간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만 같았다.

야간대학이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모두 저마다의 사정으로 늦깎이 대학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라,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았다. 나이차가 나도 언니 언니하며 여운을 따라는 친구들이 많았다.

과제가 어려울 땐, 굳은 머리를 맞대며 힘을 보탰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히던 두 글자, 학교.

한때는 그 단어만 떠올려도 마음이 굳어버렸지만,

함께 과제를 하고, 웃으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점점 그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학교는 이제 예전처럼 아픈 말이 아니었다.

두려움이 조금씩 걷히자, 그 자리에 자신감이 조용히 자라났다.

그 자신간은 예전엔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도 조금씩 해보도록 만들었다.

동호회 활동이 그 중 하나였는데, 거기서 예비 남편될 사람을 만났다나 뭐라나.

날씨가 유난히도 화장했던 오후에 그림 스케치 모임,

모두가 맑은 하늘을 그리는 중에 두사람만 저물어가는 노을을 그리고 있었다고.

서로의 그림을 바라보다 웃었고, 그게 시작이었다고 했다.

“임신 3개월이래요.”

사장은 그 말에 스스로도 조금 울컥한 듯,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축하할 일이었다.

진심으로 기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여운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다.

암이 재발할까 봐 늘 조심스러웠던 그녀였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정말 괜찮은 걸까.

“의사 선생님이 아무 걱정 없다고 했대요, 깨끗하다고. 앞으로도 정기검사만 잘 받으면, 아기도 엄마도 모두 건강할 거라고요.”

얼마나 다행인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녀가 말하던 인생이 떠올랐다.

별것 아니라고 여겨지던, 누구나 누리는 것처럼 보이던 그 평범한 삶.

그 모든 것이 여운에겐 한때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은 아득한 환상이었다는 걸.

그래서 더 기뻤고, 그래서 더 슬펐다.

“내 정신 좀 봐.”

사장이 허둥지둥 탕비실 한편으로 달려가 전기포트에 물을 받았다.

“얘기하느라 정신 팔려서 차 한 잔도 못 줬잖아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그런데 사장이 갑자기 물을 끄고 전기포트를 그냥 내려놓았다.

“아, 그러지 말고 우리 카페 가서 마셔요.”

“카페요?”

이음온실은 냥냥쭙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장이 강연에서 얘기한 걸 들은적이 있다. 고립생활을 벗어나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청년들이 일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 손님들과 가벼운 대면 교류가 가능하지만 아직은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어야하는 온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흙 냄새와 식물의 숨결이 느껴졌다.

햇살은 큼직한 창을 통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그 빛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천장에는 덩굴식물이 드리워져 있고, 테이블마다 작은 화분이 놓여 있어 생기로 가득했다.

직원들이 커피를 만드는 공간은 잎사귀가 큼직하게 퍼진 몬스테라와 바나나잎 식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사이로 직원들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마치 식물 사이를 스치는 햇살처럼 은은하게 비쳤다.

카운터엔 배지를 단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배지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새싹처럼 천천히 성장 중입니다.”

“저의 작은 도전을 응원해 주세요.”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아직은 낯선 청년들이지만, 이 공간에선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는 듯했다.

손님도, 직원도 서로를 재촉하지 않았다.

음료를 기다리는 공간은 마치 작은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고, '오늘의 응원 메시지'가 적힌 보드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계산대에는 이런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저희 소중한 직원이 마음의 평온을 찾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손님 여러분도 잠시 이음 온실의 평온함을 즐겨보세요. 냉장고에서 무료 캔음료를 꺼내 드셔도 좋습니다. 직원이 돌아오면 음료 주문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은 조용히 귀뜸했다. 커피 만드는 공간과 연결된 안쪽에는 비밀정원 같은 휴게 공간이 있다고, 직원들은 아마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거라고.

괜시리 공간이 주는 느긋하고 조심스러운 배려에 잠시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 책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공간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조용히 마음속에 피어날 무렵, 나뭇잎 사이에서 조용히 발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몬스테라 잎을 살짝 밀고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밝은 빛이 잎 사이로 흩어지며 그 사람의 흰 셔츠와 얼굴을 부드럽게 비췄다. 깔끔하게 정돈된 앞치마, 차분한 눈빛과 단정한 헤어스타일. 세련되고 깔끔하게 생긴 남자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은 그를 향해 부드럽게 나무를 걷고 카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조용히 뒤따랐다.

“점장님.”

사장이 그를 부르자, 그는 커피가루를 타올로 닦으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걸어와 두 팔을 카운터 테이블 위에 올리며 인사했다.

“사장님 오셨어요?”

부드러운 미소, 낮고 단단한 목소리.

외유내강. 그를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단어였다.

말투도, 눈빛도 한결같이 부드럽지만 그 안에선 긴 시간을 견디며 다져진 강인함이 느껴졌다. 저 사람은 이제 여기서 일할 필요가 없어보이는데.

자신 있게 말하고, 여유를 흘리고, 사람 눈을 마주보며 웃는 저 모습은 더 이상 세상과의 거리감 없이 자연스러웠다.

눈길은 어느새 쇼케이스에 진열된 디저트들로 향했다.

씨앗 모양의 초콜릿과 견과류가 작은 유리 접시에 정갈히 놓여 있었고, 녹차 크림 위에 작은 허브가 돋아난 ‘새싹’ 디저트는 아기자기한 감성을 자아냈다.

‘씨앗... 새싹...’

디저트를 바라보다가, 다시 점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 눈을 보는 건 가능해졌지만, 저런 식으로 응시당하는 건 아직도 부담스러웠다.

시선을 피하듯, 외워지지도 않는 디저트 이름과 가격을 괜히 중얼거렸다.

“작은 새싹 한 입 6,500원, 햇빛 속의 씨앗 7,000원…”

왜 사람의 시야는 180도일까.

디저트를 보고 있어도, 그의 시선이 옆에서 바늘처럼 느껴졌다.

피하고 싶은데, 완전히 외면하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선을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가워요.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는데.”

“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사장이 옆에서 깔깔 웃었다.

“누군지 모르겠어요?”

“...누구...?”

씨익. 그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가슴 왼편에 달린 은색 명찰을 들어 보였다.

빛나는 금속 위에 새겨진 이름이 반짝였다.

점장 김석찬

이음 온실에서 그는 점장 겸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었다. 처음엔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그가 직접 내린 커피와 함께 전하는 손편지가 입소문을 타며 점차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장도 손님들에게 가끔 손편지를 썼었는데 그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손님들은 온실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그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거나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때 깊은 절망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자신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고, 아팠던 시간들을 의미 있는 무언가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손님들에게 전하는 짧은 글귀는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그 속에는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있었다.

어느 날, 단발머리에 여자 손님이 조용히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수척한 얼굴로 메뉴판을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그리고... 편지를 주신다고 들었어요.”

석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는 정성껏 커피를 내리고, 서랍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내 컵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편지는 석찬이 손님들에게 전하려고 밤새 쓴 것이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고민과 두려움들이 담긴, 짧지만 진심이 담긴 편지였다. 그 안에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글이 적혀 있었고, 그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힘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석찬은 그 편지를 한 손으로 살짝 만지며, 그 글이 이 손님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걸까.

손님은 행여나 커피가 편지 위로 쏟아질까 조심하며 한갓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는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음온실을 찾아주신 소중한 고객님께,

이곳, 따스한 햇빛이 스며드는 이 온실 속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새싹들이 싹을 틔우듯,

지금 이 순간,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자연의 흐름 속에서 잠시 머물러 주세요.

그 누구보다 따뜻한 햇살과 신선한 공기가,

당신에게 필요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따스한 물 한 모금처럼,

이 공간이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드리길 바라며.

저희와 함께 조금만 더 이곳에 머물러 주세요.

새싹처럼 자라나는 마음을 담아, 이음온실 드림.

그녀는 편지를 가슴에 꽉 끌어안으며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그동안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듯, 고요한 온실 속에서 편지의 따뜻함이 그녀를 감쌌다.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 고통속에서 이곳이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 순간 석찬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그날 이후로도 카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시험에 떨어져 낙담한 학생, 실연을 겪고 아파하는 사람, 무기력한 삶에 지친 직장인. 석찬은 모두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넸다.

한참 밀린 주문을 모두 끝낸 석찬이 나와 사장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이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예전에 그가 겪었던 고통과 고립의 시간들이, 그가 얼마나 더 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점장으로 일하는 이 카페는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고립의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은 그가 지난 아픔을 끌어안고 새로운 희망을 찾은 장소가 되었다. 석찬은 이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손편지와 커피 한 잔이 가진 힘을 믿었다. 때로는 그 작은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석찬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점장 김석찬’ 그의 이름이 내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이름에는 더 이상 절망도, 고립도 없었다. 오히려 그 이름 속에 담긴 것은 햇빛과 물, 고른 땅, 그리고 어둡고 침침한 땅을 벗어나 싹을 틔워낸 씨앗이 담겨 있었다.

“이제 선을님 얘기 좀 해봐요.”

사장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빨대로 저어대자, 얼음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컵 안에서 부딪혔다. 차가운 음료가 고요한 공기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며, 그 소리가 새로운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저는...”

물결이 밀려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창문을 조금만 열면, 짭조름한 바닷내음이 방 안 가득 퍼졌다.

책장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해풍이 페이지를 살짝 넘길 뻔했다.

책이 잘되어 받은 인세로 지방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강연이나 출간 행사가 있을 때면 가끔씩 서울에 올라가곤 했고, 그 외의 날들은 대부분 이렇게 지냈다.

아침이면 책 한 권과 노트를 들고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고, 오전과 오후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글을 썼다. 해가 질 무렵이면 집 앞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가족에게 들킬까봐 주방 한 번,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고, 혹시라도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올까봐 문에 이중잠금을 걸며 초조해하지 않아도 됐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는 시간,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보내는 하루는 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날들이었지만, 내게는 꿈만 같은 나날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손끝에서 태어난 책이 이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서점에 가면 내 책은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 책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특히, 수많은 은둔 청년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직접 만나서 내 상황을 해결하자고 다가오지 않아서 좋았어요. 멀리서, 글자로, 책으로...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그 느낌이 가장 큰 위로였어요.”

그 말이 내 마음을 깊이 흔들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무언가를 고치려 들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고, 그저 써 내려간 글이 누군가의 어둠 속에 작은 불빛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이는 내 책을 읽고 냥냥쭙쭙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직 작가님만큼 냥냥쭙쭙하고 친해지지는 못했어요. 츄르 줄때만 가까이 온다니까요. 그래도 여기서 일하고 나서,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서, 뭔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메시지를 읽고 또 식탁에 놓인 티슈 한 통을 비웠다. 기껏 만들어놓은 점심이 다 식어버렸다.

또 어떤 독자님에 메시를 읽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보다못한 가족들이 자신을 서 대표님의 게스트하우스로 억지로 억지로 끌고 갔다고 했다.

“처음엔 죽고 싶었어요. 마치 폐쇄병동에 끌려온 것 같았죠. 일 년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여기서 살아보니까... 정말 잘 왔다고, 사실은 살고 싶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마음 깊이 간직했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소설이라는 형태로 감쌌기에 대부분 허구이거나 일부 사실이라고 해도 독자들은 쉽게 구별해내지 못했지만. 내가 알지 않은가. 이런 내 모습을, 삶을, 가정환경을, 오랫동안 잊고 싶어 쳐박아 두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활자화 하는 작업. 물리적 존재를 부여받은 존재로 시각화 되어있는 나의 아픔들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타인들에게 공개하는 것. 그들이 판단하고 비판할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이 모든 고백은 나, 그리고 또 다른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을 향한 고객이었다.

그 고백에 답이라도 하듯 독자들이 내게 전해온 또다른 고백들은 그 어떠한 거창하고 멋있는 말 위에 선 위로였다, 치유였다.

독립을 결심하고 집에서 나가던 그 날, 캐리어를 끌고 조용히 나가려던 참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나가고 싶었는데... 현관 앞에, 엄마 아빠가 서 있었다.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애비가 참 못됐었다.”

너무 놀라 말도, 어떤 표정도, 반응이란 걸 하지 못했다. 왜 갑자기 그런말을 하는거야. 평생 사과라는 걸 해본적도 없는 사람이. 그냥 이제와서 내가 좀 잘된 것 같으니까? 쳇. 그런다고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아? 그렇게 상처를 줘놓고. 평생을 내 자존감 도둑으로 살았으면서 이제와서 왜.

“조심해서 가. 우리 딸, 좋은 일만 있어~”

아버지가 다가와 등을 톡톡 두드린다.

그 작은 두드림이 앞쪽으로 움직여 심장으로 전해진다.

엄마는 한참 말이 없더니, 내 손에 작은 봉투를 쥐여주며 말했다.

“너무 부담을 줬지?”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았고, 말끝이 조금 떨렸다.

“그땐 그게 사랑인 줄 알았어.”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내 손을 잡고 주물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주제에... 그런 말 하는게 아니었는데... 성공하라고 키워준 값 갚으라고 그런 말도 하는게 아니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고개만,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마음의 딱지들을 애써 닦아 내지 않은 채.

“엄마가 미안해.”

사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꼭 한번은 정확히 날짜까지 계산해서, 그때 그 말, 그때 그 행동에 대해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며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다.

몇 년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날 그 자리에 서 있으니 그 마음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더 따지지도 않았고, 더 원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 말이면, 그 날이면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기다렸던 건 거창한 해명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수고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거였나 보다.

나의 늦은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 사랑을 세상과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카페를 나서며 사장님과 석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내쉬곤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운 골목을 지나, 역으로 향했다.

“7A... 7A가 어디지?”

좌석번호를 중얼거리며 열차에 올라탔다. 간신히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깥 풍경은 금세 촉촉한 빗방울에 젖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니 회색 도시의 빛은 어느새 옅은 녹색 풍경으로 물들어갔다.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너무 말을 많이해서 그런지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고 말았다.

나무, 나무, 비닐하우스. 다시 나무, 나무, 비닐하우스.

깊은 생각없이 뇌에게 휴식을 허락하고 있던 순간,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시계를 확인했다. 이런 벌써 시작했겠어.

재빨리 가방 속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라디오 어플을 켰다. 잠시 뒤,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따뜻한 음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끔은 아무 일도 안 한 하루가, 그냥 버틴 하루가 제일 대단한 날일지도 몰라요.

잘 지내는 척 안 해도 괜찮고, 꼭 뭔가를 이뤄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사락—

부드러운 종이가 살갗에 스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온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요. 그냥 지금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자세로, 여러분으로 머물러보세요.”

빠삭—

이어서 OPP 봉투가 으깨어지는 소리. 무언가 물건을 그 사이로 밀어넣는 마찰음.

“오늘도 여기까지 온 당신, 그걸로 충분히 잘했어요.

지금 당신에게 닿을 작은 문장들을 조심스럽게, 곱게 포장하고 있어요.”


카페에서 나오기 직전, 사장은 제이의 근황을 전했다.

냥냥쭙쭙에서 만들던 포장 ASMR 영상이 예상치 못한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한 유명 팟캐스트 PD가 연락을 해온 것이다.

전임자가 그만둬서 후임을 구하는 중인데, 혹시 일일 디제이로 한 번 나와줄 수 있겠냐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용기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녀는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평소에 자주 쓰던 포장지와 냥냥쭙쭙에서 사 모은 소품을 챙겨갔다.

익숙한 손짓으로 포장을 하며, 짧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들을 읽어주었다.

그날 방송은 예상치 못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청취율은 단숨에 치솟았고, 채팅창에는 호평이 이어졌다.

며칠 후 그녀는 해당 프로그램에 메인 디제이로 발탁되었다.

따봉 디제이.

청취자들이 그녀의 목소리가 진심이 담긴 따뜻한 포장 봉투 같다며 지어준 애칭이었다.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했던 제이의 목소리는 이제 공중파 심야 라디오까지 울려 퍼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점점 더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찾았다. 최근엔 한 방송국에서 심야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발탁되면서 활동 무대가 더 넓어졌다. 한때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프리랜서 아나운서이자 라디오 DJ로 자신의 길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었다.

특유의 따뜻하고 담백한 진행 실력 덕분에 각종 행사와 북토크, 강연회, 음악회 MC까지 섭외가 끊이질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내 북토크에 제이가 사회를 보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이의 삶이 환하게 빛나는 것이 기뻤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제이는 자신감을 회복했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점차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중과의 소통에 대한 두려움도 점차 줄어들었다. 방송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았다.

제이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도, 아픔도,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요소임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숨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당당하게 세상과 소통하며,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었고,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았다.

폭력으로 가장된 사랑이 그녀의 목을 조르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일에대한 그녀의 사랑이 다시 그녀를 숨쉬게 했다.

남녀간의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랑 하나에 인생 전체를 걸고, 상대가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분노하고,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조이고 망가뜨리기까지 하는 사람들.

그 남자도 그랬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삶을 통제하고, 아나운서라는 그녀의 꿈을 와장창 부수었다.

함께 걷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는 사랑이라 했지만, 제이는 점점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손끝에서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

작은 종이 위에,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담는 그 시간이 조용히 그녀를 다시 꺼내주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향한, 아주 오랜 사랑이 그녀를 숨쉬게 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제이는 오래전부터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느낀 것들,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들, 살아 있다는 감정.

그녀는 포장지를 접으며, 라디오에 출연하며, 그 모든 걸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사랑은 꼭 남녀 간의 연애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 하고 싶은 일을 향한 열망, 그런 내가 되어 타인에게 전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그녀는 이제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사랑에 향한 뜨거운 목소리로, 스스로를 불태워 다시 피어났다.

사각사각—

크라프트지가 단정하게 접히는 소리, 그속에 의미를 담고 있는 목소리가 담긴다.

“여긴 제이의 환상의 밤, 통증의 끝에서.

오늘도 함께여서, 덜 아팠어요. 내일도 괜찮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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