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우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4 방콕 Bangkok (25.01.24-26)

by 도토리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친구와 자유여행을 갔던 곳이 방콕이다.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여행 경비를 지원받아보려는 철없는 시절이었다. 여행지도 그리 가깝지도 그리 안전하지도 않은 곳을 어쩌다 선정하게 되었는지. 첫 일탈과도 같았던 그 여행의 허락을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었다. 비행기는 뭘 탈거고, 숙소는 어디에 묵을 거고, 교통편은 어떻게 할 것이며... 품 안에 자식이고 보수적인 편이셨던 부모님이지만, 딸이 워낙에 밖으로 나도는 것을 좋아한단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끝내 말리지 못하셨더란다.


해외여행으로 같은 도시에 여러 번 방문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오사카, 파리, 보홀, 그리고 방콕. 그러나 첫 번째 여행 이후 십 년 이상의 텀을 두고 재방문을 하게 된 것은 새로웠다. 스물한 살의 그것과는 너무 다른 느낌의 2025 방콕 시티.



설 연휴 시작과 남편의 방콕 레이오버 일정이 맞아떨어졌다. 팀 변경으로 업무가 변경된 첫 달, 해야 할 일도 산더미인 월 말에 설 연휴를 핑계 겸 만사를 제쳐두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짜릿한 배덕감이 느껴졌다. 금요일 업무를 마무리하고 방콕행 비행기에 올랐다.


밤 열 시가 다 되어서 출발한 비행기는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6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현지 시각으로는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 새들도 아가양도 자는 시간이지만 우리는 아까운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호텔까지 택시를 잡아 탔다.


허겁지겁 체크인을 한 후 호텔에서부터 가까운 식당까지 10분 남짓을 뛰듯 걸어갔다. 구글 맵에는 3시까지 영업을 한다는 식당에 두 시가 넘어 도착했다. 우리를 들여보내줘. 식당은 펍일지 포차일지, 실내와 야외가 구분되지 않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태국의 젊은이들이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와글거리고, 철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품들이 선풍기 바람에 펄럭거렸다.


기본 안주로 생 채소가 한 접시 나왔다. 난 생 처음 본 작물을 집어 들고 먹을지 말지 실랑이를 벌이다가 한 입 베어 물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한 겨울인 서울을 뒤로하고 뜨끈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싱하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니 그곳이 천국이었다. 매일 나누는 대화도 장소를 바꿔하니 또 새로웠다. 할 얘기가 뭐가 그리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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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우본'의 풍경과 처음 보는 생채소




식당의 이름은 아마도 벽에 쓰여있겠지만 읽을 줄을 몰라 구글맵에서 확인하게 되었는데, '랍우본'이라고 했고 알고 보니 방콕의 MZ들(..)이 많이 찾는 핫 플레이스였다. 세시면 영업이 종료될 줄 알았는데 세시가 다 되어 새로 들어오는 팀도 있었다. 현지 언어에 둘러싸여 우리도 나름대로의 생각을 뿜어냈다. 치킨윙과 모닝글로리를 안주 삼았다.


방콕 젊은이들도 지쳐 떠나간 새벽 다섯 시. 만족스러운 야식으로 배를 불리고 기분 좋게 호텔로 복귀했다.










이튿날 아침 겸 점심은 푸팟퐁 커리를 먹자는 나의 강력한 주장이 반영되었다. 남편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안 먹어본 음식이 없는데도 어쩐 일로 푸팟퐁 커리는 낯설어했다. 조금 두려워하는 듯한 그를 끌고 푸팟퐁커리로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다. 걷는 길 화창한 날씨가 기분이 좋았다.


방콕에서 오징어게임2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광고가 사방에 붙어 있었다. 바나나 굽는 노점도 보았다. 맑은 날씨에 대조되는 빨간 버스도 보았다. 그리고 식당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대마초 가게를 보았다. 예쁜 간판에 해맑은 한국어 폰트로 쓰여있었다. '대마초 판매'. 도덕의 잣대란 건 대체 무엇인가. 한 시대 같은 하늘 아래 한쪽에서는 처벌받을 일이, 다른 한쪽에서는 당연한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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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살 커리를 위한 여정에 마주친 풍경들




이름난 푸팟퐁 커리집의 음식들은 과연 훌륭했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커리와 달랐던 점은 원 없이 게 살을 퍼 올려 입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한 스푼마다 행복 한입을 머금는 동안 남편은 뭉글거리는 식감이 썩 어색했는지 평소와는 달리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땡모반을 곁들이고, 볶음밥을 곁들이기도 하면서.



다음 목적지는 '왓 아룬(새벽사원)'이었다. 근처의 전철역으로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강을 건너는 선착장까지 간 뒤, 배를 타고 왓 아룬까지 가기로 했다. 방콕 시내를 통과하는 전철은 MRT와 BTS 두 종류인 모양이다. 가까운 BTS역에 도착했더니 역무원이 탑승권을 여러 장 들고 있다가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받아 들고는, Free? Free Today?라고 요상한 영어로 물었더니 그렇단다. 왜죠? 이유는 끝내 알지 못했지만 럭키잖아. 기분 좋게 탑승구로 들어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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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오징어게임2의 '그' 핑크색이 시선을 강탈한다




선착장에 도착해서는 왓 아룬까지 가는 표를 샀다. 잠시 대기하니 통통거리는 목재로 된 배가 왔다. 배는 차오프라야 강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아이콘시암에 먼저 서고, 또다시 한참을 달려 왓 아룬으로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왓 아룬은 배에서 내리기 전에 보이는 실루엣부터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영화나 인스타에서 많이 보던 그 모습! 상상보다 규모가 더 크고, 색감이 무척 멋졌다.


스물한 살의 방콕을 반추해 보면, 왓 포라는 사원에 갔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마침 체하는 바람에 사원에 들어가자마자 어느 실내의 불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잠들었고, 같이 갔던 친구는 혼자 사원을 돌며 타이머를 맞춰놓고 사진을 찍었다.


다행히 왓 아룬을 둘러보려고 배에서 내렸을 땐 컨디션이 최고조였다. 짧은 바지를 가리고자 사원 앞의 상점을 돌다 코끼리 바지를 사 입었다. 나풀거리는 소재가 다리를 스치는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에 휩쓸려 사원으로 입장해 보니 눈을 때리는 듯한 화려한 무늬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서자 까마득히 높아 보이는 탑을 올려다보니 감탄이 입에서 달려 나왔다. 모자이크 양식의 벽이 화려하게 아름다웠다. 전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탑의 허리로 올라서서 보니, 탑을 받치고 있는 듯한 모양의 동상이 수백 수천 개가 사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국의 미가 절제와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라면 태국은 정 반대 지점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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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받치고 있는 동상의 포즈를 따라하는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점심이 지나자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혼미해지는 기분을 붙잡고 음료를 하나 사 마시고, 다시 배를 잡아 탔다.

아까 배를 타고 오며 보았던 아이콘 시암에 가기로 했다.


아이콘 시암은 대형 백화점 겸 쇼핑몰인데 쇼핑몰에 큰 관심이 없는 나인데도 외부 전경이 너무 멋져서 들르고 싶었다. 게다가 찌는 듯한 더위에 절여진 몸을 시원한 실내에서 식히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남편은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에르메스 매장을 향해 돌진하면서 가방을 사주겠다고 했다. 가방은 못 사... VIP들한테만 팔아... 아니나 다를까 판매 가능한 가방은 없다고 하여 왠지 우리 둘은 삐진 마음이 되어 입을 삐죽 내밀고 몰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시암은 굉장히 넓고 입점해 있는 가게도 정말 많았다. 압도적인 스케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이 큰 매장이 유지가 될까 싶어 걱정되던 차, 꼭대기 층으로 올라서니 방콕의 모든 관광객이 모여든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차오프라야 강을 보며 음료수라도 한 잔 마시고 싶어서, 그래도 비교적 한적한 테라스 쪽 식당으로 나가 앉았다. 밖은 에어컨은 없어 공기는 후텁지근했지만 사람도 적고 강이 내려다보여 보여 기분이 좋았다. 강을 따라 줄지은 높은 건물과 호텔들을 구경하며 우리 별장은 어디에 있는 거냐며 장난을 쳤다. 배가 수도 없이 오가며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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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본 아이콘 시암의 테라스가 너무 멋져보여서, 직접 가보았다.




지하 식당가 층으로 곧장 이어진 에스컬레이터에 '쑥 시암(Sook Siam)'이라는 입구 표시가 되어있었다. 수상 시장을 실내에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했는데 진짜 시장과 같은 인테리어에 점포들이 가득 들어서 있고 조명등이 예쁘게 켜져 있어 구경할 맛이 났다. 남편이 지난번에 들렀을 때는 컨셉에 걸맞게 바닥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고 했는데, 우리가 갔을 땐 물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점포들이 들어서있었고, 사람도 많아 복작거렸다. 구경을 끝 마칠 무렵엔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로 망고를 품에 안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남편은 새벽 비행을 위해 잠을 청했고 나는 근처의 마사지 샵을 다녀왔다. 어쩐지 혼자 받는 마사지는 재미가 없기도 하고. 가만히 누워있는 것뿐인데도.


노곤해진 몸으로 노을 지는 방콕 시내를 돌아 방으로 와서 약간의 빈둥거리는 시간을 가지고, 꿀 같은 망고를 이빨 사이로 녹여 통과시키며 방콕 24시간 투어의 막을 내렸다.


망고를 코끼리만큼 많이 먹을 수 있다. 그런 상상을 해요. 또 봐요 방콕!





p.s.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빠르게 복구되기를 기원하며 글 마침.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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